[12월 기획 대담] 꽃이 붉으면 물도 붉어진다 - 우리시대의 풍수지리가 일봉 김경우 선생과의 만남
[12월 기획 대담] 꽃이 붉으면 물도 붉어진다 - 우리시대의 풍수지리가 일봉 김경우 선생과의 만남
  • 홍용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8.12.28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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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봉 김경우, 그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현장 풍수가로 알려져 있다. 책상머리의 풍수가 아니라 이 땅의 산맥과 물길의 흐름을 몸으로 답파하여 지기地氣와 지맥地脈을 해석하고 적재적소의 택지를 찾아내는 능력에서 누구보다 앞선 지관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청도에 사는 그가 서울로 올라왔다. 그와 악수를 나눈다. 무채색 장삼 사이로 뻗쳐 나오는 악력이 강하게 다가온다. 체격이 우람하고 눈빛이 깊다. 전국을 발로 누비면서 다져진 체력과 세상사의 모양새를 응시해온 표정이 형형하다. 나는 그에게 바로 질문을 던진다. “풍수지리란 무엇입니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인간의 생명 유지에 근본이 되는 물, 공기, 햇빛 그리고 시간을 어떤 환경 조건의 공간에서 생활해야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경상도의 굴곡진 억양이 질박하다. 그러나 답변은 평명하다. 그렇다면, 풍수는 공간성의 문제가 아닌가? 물, 공기, 햇빛, 시간, 즉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기본 요소가 가장 잘 어우러진 공간. 이렇게 보면, 풍수는 크게 어려울 것도 신비할 것도 없지 않은가? 다시묻는다. “이 땅에서 수천 년 내려온 풍수의 역사가 결국 공간 선택의 문제로 요약되는군요?”

 “그렇습니다. 탈신공개천명奪神功改天命이란 말이 있지요. 신의 공덕을 벗어나 타고난 운명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물, 공기, 햇빛, 시간은 선택 가능한 요소가 아니지요. 신이 주신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지요. 그러나 공간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순간 그가 저술한 『운명을 다듬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다시 묻는다. “일봉 선생께서는 풍수란 인간이 스스로 운명을 다듬을 수 있는 방법론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환경은 그것이 품은 생명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지요. 버락 오바마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다면 부족의 추장 정도 되었겠지요. 그러나 미국에서 살게 되면서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지요. 환경 선택이 이런 것이지요.”

 그의 쉽고 확신에 찬 대답 끝에 풍수는 미신이라는 저변의 선입견도 어느새 슬쩍이 자취를 감춘다. 인간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동시에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환경공학이 풍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간 선택의 현묘한 원리를 어떻게 터득하여 제대로 택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물, 공기, 햇빛의 역동적인 형세, 줄기, 결을 감지하고 그 기운의 농담을 읽어내는 능력이란 결코 아무나 범접할 영역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시 묻는다. “풍수에서 명당은 어떤 곳입니까?” 그의 비교적 긴 설명의 요지를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언제나 목소리의 선이 묵직하고 담박하다.

 기본은 배산임수背山臨水입니다. 풍수지리는 음양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죽은 사람이 묻히는 곳을 음택陰宅이라 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곳은 양택陽宅이라 하지요. 음택과 양택의 명당자리는 근본적으로는 같습니다. 음택과 양택 모두 좌향과 물水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을이나 도시의 터는 강이 흐르는 기슭이 좋습니다. 다음은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인데 앞을 향해 왼쪽으로 뻗어 내린 산세를 청룡, 오른쪽으로 뻗어 내린 산세를 백호라 합니다. 이 청룡과 백호가 마을을 감싸 혹한 추위와 바람을 방지해주는 곳을 명당이라고 봅니다. 양파나 양배추를 보면, 겉은 속의 생장점을 감싸기 위해 존재하지요. 이렇게 명당의 생기처를 산과 강이 감싸고 있는 형세이지요.

 일봉 선생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풍수의 기본을 개관한다. 그의 말속에는 명당의 요건으로 바람과 함께 물水이 특히 중요하다.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바람길을 갈무리하고 물길을 얻는 것’이 풍수의 어원이기도 하다. 장풍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신사의 산세가 잘 어우러지면서 가능하다. 그리고 득수가 중요하다. 득수得水, 즉 물과 어떻게 어우러지느냐에 따라 부귀나 무병장수의 좋은 생기生氣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물가는 물자의 교역과 교통 요충지 구실을 해오지 않았는가. 물길을 따라 도로망이 펼쳐지면서 사람이 모여들고 교역과 상업이 발달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된 것이다. 물길은 이처럼 부를 창출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유리하다.

 이처럼 물길을 재물 기운의 확보 수단으로 보는 관념은 더욱 ‘진화’해서 아예 물 자체를 부와 한 짝으로 묶어 취급하기도 한다. 양택陽宅이나 음택陰宅앞으로 물웅덩이나 연못, 저수지 따위가 형성돼 있으면 그 물만큼 재물이 보장된다고 보기도 한다. 계수측지界水則止, 생기가 ‘물을 만나게 되면 멈춘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명당이 되려면 사람에게 부귀富貴의 기운을 전해주는 생기를 보호하는 역할로서의 물 또한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물은 스스로 흐 르는 역동성과 스스로 머무르는 정태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물은 생기에 대해 순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생기를 가두거나 멈추게 하는 것이 물이라는 말은, 달리 생각해보면 생기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물이라는 뜻도 된다. 즉, 물은 어떤 변수가 생길 경우 생기를 없애는 살기 노릇도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수맥水脈이라 할 수 있다. 수맥에 따라 지표면의 형세나 형질도 변질된다. 수맥은 수맥파를 발생시켜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기도 한다. 물을 얻되 잘 활용하고 물의 이치를 거스름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풍수는 분명 지리학이요 환경공학이라고 규정된다. 그렇다면 일봉 선생은 어떻게 남다른 통찰력으로 서로 다른 형상의 산수에 따라 올바른 좌향을 잡고 산수와 좌향의 조합에 따른 기운을 평가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것이 발현되는 운기를 가늠해내는 내공을 갖추게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의 아버지는 범쟁이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소중개인을 하시다가 동네 뒷산에서 멧돼지 덫에 걸려 붙잡힌 범(호랑이)을 사들여 전국으로 호랑이 고 기를 팔러 다니기도 했어요. 이때 붙은 택호입니다. 범쟁이 아버지는 밤마다 산 중턱에서 백발노인을 만나는 꿈을 꾸었어요. 꿈속의 노인은 범쟁이 아버지에게 받을 빚이 있다고 조르곤 했답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혼자 산에 가기를 무서워하면서 어린 둘째 아들인 나와 나무를 하러 다녔어요.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민둥산에 한 뼘씩 올라선 서릿발을 보고는 그 밑으로 수맥이 흐르는 것을 알았고 굽은 나무뿌리를 캐내면서 땅 속 사정을 짐작했어요. 이후 이러저러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86년 무진년에 도오 스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풍수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오 스님은 풍수와 함께 숙명통宿命通, 전생을 아는 능력까지 지닌 분이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당대 최고의 고수이셨지요. 스님은 얼굴 표정을 보면 마음을 알 수 있듯이 산이 품고 있는 정서와 정신을 마음으로 보는 힘을 얻어야 한다고 했지요. 10여 년의 수련을 거쳐 생사룡生死龍의 이치, 이기理氣론의 적용, 그리고 발복론을 습득해 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을 오른 내력이 마치 전설 같다. 그에게 풍수의 길은 결국 호랑이가 이끈 셈이다. 기이한 운명이다.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어느새 땅의 속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풍수 공부는 마음공부이며 도의 수련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을 열어 자연과 교감하고 공명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서서히 터를 보는 오감이 열리면서 터에도 마음이 있고 나이가 있음을 보게 되었단다.

 결국 풍수는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여 이에 순응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법론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풍수의 발복과 터를 잡는 것에서 배우는 인생론이 있다면 무엇일까?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못가에 꽃이 만발하면 수중에도 꽃이 비쳐 그 물이 붉게 물들 것이다.(水邊花發 水中紅)”

 좋은 터에는 정혈이 아닌 그 근처에만 들어가도 자손들이 상당한 복록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가 팔공산 달성 서씨 제실에서 터득한 이치이다. 제실의 좌향이 산의 주맥과는 어긋나게 약간 틀어져 있지 않은가. 터가 아닌데다가 대문이라도 동문으로 돌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드나드는 문이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잡혀있고 중간에 큰나무를 심어 가로막은 것이었다. 산소 역시 혈처에서 뒤쪽으로 벗어난 자리에 앉혔다. 왜 그랬을까? 좋은 터를 차지하고 부귀와 벼슬이 과하면 어떤 재앙이 따를지 모른다는 경계였다. 벼락같은 부귀영화는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삶의 지혜가 반영되어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삶의 이치를 발복 풍수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일봉 김경우 선생은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이른바 명당을 잡아왔다. 양택, 음택은 물론 절터, 관공서, 국가산업단지, 테크노폴리스 등등 이 땅의 대표적 지관으로서의 활약과 또한 그 발복의 성과는 수다하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풍수가 터를 잡는 작업은 처참할 정도로 어렵고 두려운 길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칫 천지자연을 자신이 미리 그린 그림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그린 그림이고 마음이지 자연의 마음은 아닙니다. 스스로 자연의 마음과 공명하는 무위의 자세를 잠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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