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 신성한 노동의 정원, 바르비종의 밀레 아틀리에
[Gallery] 신성한 노동의 정원, 바르비종의 밀레 아틀리에
  • 손정순(시인, 본지 편집인)
  • 승인 2020.07.28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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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7월, 나는 현금을 쥘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인 자동차를 팔아서 파리로 도망쳤다. 당시 국제문화센터(Centre Culturel International de Cerisy-la-salle)에서 열리는 일주일간의 국제학술세미나 참석을 겸했지만, 불어 한 마디 못하는 내게 그건 핑계였고, 그냥 나를 모르는 낯선 세상을 향한 도피였다. 난 과중한 일에 너무 지쳐있었고, 모든 의욕을 상실했으며, 무엇보다 시를 한 줄도 쓸 수 없다는 현실에 무척 괴로웠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은 정신없이 쏘다녔다.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하룻저녁이면 충분할 것 같은 파리였지만 황제의 무덤 위에서 빛나는 황금빛 지붕 위로 녹청색 바다처럼 쭉 뻗은 그랑팔레의 지붕, 구슬땀 흘리며 어디론가 달려가는 야생마들로 도시는 끝내 잠들지 못했다.

  둘째 날부터는 미술관을 찾았다. 루브르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로댕미술관 등 하루씩 그림을 보러 다녔다. 그러던 중 오르세미술관에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1814∼1875)의 그림 <만종>과 마주쳤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소위 이발소 그림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구도의 그림이 낯선 도시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작은 평화를 가져왔다. 바르비종(Barbizon) 부근 샤일리 평야, 멀리서 울리는 마을 교회의 종소리에 두 농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삼종기도를 드리고 있다. 순간 나는 바르비종에 자리한 밀레의 아틀리에에 가보고 싶었다.

  그 충동을 안은 채 다음날 나는 세미나 장소인, 파리에서 동서쪽으로 320여 Km나 떨어진 바닷가 작은 마을 스리지-라-살로 떠났다. 이곳에 도착하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제일 먼저 떠올랐지만 캬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무대인 서부 프랑스의 군항 쉘부르가 바로 옆에 있고, 한번쯤 맛보았을 까망베르 치즈도 바로 이 지방 노르망디가 생산지였다. 문화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의 성(castle)에서 며칠 동안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진지하게 한 가지 문제를 논의해 보라는 것이 약 100년 전 이런 토론 장소를 기획한 사람들의 의도인 듯했다.

  이곳에서 일주일간 세계 각국 교수와 학자들이 모여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의 세미나와 함께 매일 저녁이면 만찬과 함께 댄스파티를 열었다. 나는 저녁이면 파티보다는 수평선과 맞닿아 영원히 해가 지지 않을 것만 같은 노르망디의 해변을 따라 걸었다. 이곳에서도 <만종>이 떠올랐다. 광활하게 펼쳐진 샤일리 평야는 무한함을 상징하면서도, 아득히 멀어지는 수평선과 맞닿아 바다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노르망디의 그레빌 아그(Gré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밀레가 추억 속의 바다를 작품 속에 투영한 것은 아닐까?

  세미나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곧바로 바르비종으로 향했다.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65㎞ 정도 떨어져 있고,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작은 마을 바르비종(Barbizon)! 이곳은 밀레와 루소(Jean-Jacques Rousseau),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등 많은 화가들이 사랑했던 시골마을이다.

  자동차로 파리에서 1시간 남짓 달리자 녹색의 세계인 퐁텐블로(Fontainebleau) 성과 숲이 나왔다. 한때 나폴레옹 1세가 머물렀던 이곳은 거목들이 빽빽하게 자라 서로 어깨들을 맞대고 있다. 여기서부터 바르비종으로 이어지는 숲길은 과히 인상적이다. 또한 들판을 따라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은 바로 밀레의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에 나왔던 그 곳이다. 밀레는 1849년 거대한 평야가 펼쳐진 이곳 바르비종에 거처하며 빈곤과 싸우면서 독특한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밀레 아틀리에가 바라보이는 그레빌에 도착하자 해가 황금 들녘 위로 서서히 떨어지면서 온 바르비종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처음 온 곳이고 내 나라가 아닌데도 그저 편안히 감겨오는 느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이 작은 마을과 들판이 가장 낮게 손짓해 황금빛 노을이 닿을 듯한 하늘 길, 정말 황혼이다! 탄성을 지르자 잔뜩 더위 먹은 고물자동차가 툴툴툴 멈추어 서고, 황금빛 들판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마을 한복판에 매달린 둔중한 종소리가 모든 들판에 울려 퍼지는 시간, 저 부서지는 물방울의 조각들이 고향하늘처럼 마지막 햇살에 반짝거렸다. 순간 밀레는 이삭을 줍다 말고 한 손으로 해를 부여잡으며 빠르게 스케치 했겠지?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바로비종에선 내 속의 모든 복잡한 생각들이 스르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다.

  밀레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바르비종에서 만나는 들녘, 마을, 아틀리에 등은 하나같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소박한 풍경들이다. 걸어서 30분 정도면 마을을 두루 산책할 수 있다. 그의 채취가 물씬 풍기는 집도, 골목길도 그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오래된 정원처럼 정겹다. 건물의 벽면과 창틀도 마치 캔버스에 그린 것처럼 하나의 작품이 되고 있다. 특히 <만종>의 배경이 되었던 농경지는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원풍경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 그림을 통해 느꼈던 것 이상의 감동을 전한다. 그러나 밀레의 그림으로 만나는 바르비종의 풍경들은 보다 숭고하고 한차원 높은 노동의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밀레 아틀리에는 사설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밀레의 화구와 가족사진, 드로잉 등을 전시하고 있어 그의 생전 작업의 채취를 느낄 수 있다.

  청년 밀레는 “만종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라네. 밭일을 할 때, 삼종소리가 들리면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 일손을 멈추게 하고 삼종기도를 올리게 했지, 그러면 우리는 모자를 손에 꼭 쥐고서 아주 경건하게 고인이 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곤 했지…”라고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또한 그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나는 어떠한 사상도 옹호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농사꾼, 그저 농사꾼일 뿐이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농부들은 늘 그의 그림 속 주인공이었다. 바르비종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전원풍경은 농부들의 신성한 노동을 부각시키는데 적격이었다.

  한편, 빈센트 반 고흐는 밀레의 정신과 화풍 등 모든 것을 흠모했고 또 닮고 싶어 했다. 고흐는 밀레의 여러 작품 중 특히 <씨 뿌리는 사람>에 주목했고, 이 작품을 판화와 유화재료를 통해 수차례 모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평범한 농민들의 생활을 다채롭게 묘사했던 밀레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애석하다, 난 그림을 더 그릴 수 있는데…”

  밀레는 1875년 1월 20일, 61세의 나이로 <만종>의 배경이 된 샤이(Chailly) 숲에 잠들었다. 먼 곳에서 그를 찾아오는 발길들을 보면, 그는 죽어서도 영원히 바르비종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시가 써지지 않는 요즈음 밀레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르비종에 다시 가고 싶다. 인간의 존엄성이 짙게 배어 있는 신성한 노동의 정원, 밀레의 아틀리에가 있는 그곳으로.

TIP 1830년에서 1860년까지 당시 80여명의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마을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당시 화가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1849년 6월,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 ~1875)는 바르비종으로 이주하면서 주위의 가난한 농부들을 소재로 본격적인 농촌, 농민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밀레가 그림을 그렸던 바르비종은 원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쿨투라》 2020년 7월호(통권 7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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