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신중현 11] 《Body & Feel》
[아티스트 신중현 11] 《Body & Feel》
  • 장석원(시인·광운대 교수)
  • 승인 2020.07.2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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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8월 14일

“보고 싶어 슬퍼지는 내 마음이여.”(〈미련〉)

내가 이 앨범을 접했을 때, 빠져나올 수 없었던 감정이다. 더블 시디 표지를 연다. 신중현의 사인 밑에 일자(日字)가 번뜩거린다. 2002년이 2020년을 습격한다, 폭파한다. 어떻게 모를 수 있었는가. 어떻게 《몸과 느낌》이 그때, 붉은 함성처럼, 역사에 새겨졌을까. 음악 너머의 고요가 나를 덮친다. 바위처럼 함묵할 수밖에……

“바람이 불어와 갈 길을 잊었나 / 아무도 없는 길을 너만 외로이 가야만 하나.”

가사의 ‘너’는 음악일 것이다. 아니다. 2인칭 ‘너’는 신중현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일 것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음악의 길을 ‘혼자서’ “외로이 가야만 하”(〈마른 잎〉)는 형벌 같은 행복을 지고 묵묵히 걷고 걸었을 것이다. 다가와서 찌르고, 파고들어 내부를 헤집는, 아프고 아프지만 아름다움 때문에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음악. 신중현의 스튜디오 라이브 앨범 《Body & Feel》.

  Body

  〈나는 너를〉 : 이 앨범의 주인공은 현악일지 모른다. 아니다. 주인공은 신윤철의 기타이다. 아니다.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과 일렉트릭 기타의 조화가 주체이다. 부정한다. 주인공은 신중현이고 그의 노래이다. 부정과 부정과 부정을 연속한다. 도리질한다. 부정이 긍정이 된다. 긍정이 다시 부정된다. 긍정과 부정이 뒤섞인다. 분별할 수 없다. 하나일 뿐이다. 하나 안에서 둘이 나오고, 그 둘이 하나가 되는 운동이 끊어지지 않고 만화(萬化)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행복에 젖어 웃는다. 기타가 돌고래처럼 달려온다. 유려하다. 바람결에 몸을 맡긴 수양버들 같다. 목소리-유리 조각-기타가 살갗을 긁는다.

  〈빗속의 여인〉 : 몸이 흔들리는데 이상한 평정이 찾아온다. 기타가 빗줄기의 낙하처럼 시원하다. 비를 머금은 구름 같은 현악. 몸을 데우는 비가 있다. 신중현의 목소리가 수막(水幕)이 되어 스며든다. 이 비는 따듯하다. 아늑하다가 아득해진다. 가까워지다가 밀려나간다. 바다 쪽으로, 파랑 쪽으로 둥둥 떠나간다. 잊지 못할 “까만 눈동자” 같은 기타. 빗속의 “노란 레인코트”는 신중현의 목소리이다. 다른 가수들이 불렀던 버전의 느낌을 말소하는 원작자의, 신중현의 꿈틀거리는 목소리, 몸을 떨게 한다. 한 번 더 이 단어를 사용해도 될 것 같다. 육성. 몸의 소리.

  〈님아〉 : 대나무 쪼개지는 것 같은 드럼 비트. 착 착 착 다가온다. 쇳소리 쩔렁거린다. 현악의 밀물이 다른 악기 소리를 덮어버리는데 기타가 피막을 찢고 모습을 드러낸다. 금속의 떨림. 증폭되어 부피와 질량과 밀도가 한꺼번에 상승한다. beat, beat, heartbeat. 달려 나간다, 뛰어오른다, 터진다.

  〈미인〉 : 이것이 록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몸이 마음보다 먼저 반응한다. 휘감기는 음악에 맞춰, 질서 없는 몸짓 몸짓, 춤을 춘다. 신중현의 어쿠스틱 기타와 신윤철의 일렉트릭 기타가 대결하면서 서로의 영토를 섞는다. 비틀리고 모이고 풀어진다. 다투다가 엉긴다. 기타 두 대가 손뼉을 치는 것 같다. ‘스트링 앙상블’의 현악이 돛을 펼친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나는 화답한다.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자꾸만 듣고 싶네. 이것이 라이브란 말인가. ‘live’를 ‘life’로 바꾼다. 에너지가 저릿하다. 록의 힘이다. 긴장감 조성하는 어쿠스틱 기타와 극침(棘針) 같은 일렉트릭 기타가 조응하여 두 날개를 펼친다. 기타와 베이스가 같은 리프로 전진한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합창할 수밖에…… 노래 부르게 하고, 율동하게 하는 음악. 록의 미적 가치. 영원한 록큰롤. 수평선 위를 미끄러지는 신천옹 같은 음악. 눈부시다.

  〈커피 한 잔〉 : 얼굴 앞에 육박하는 신윤철의 기타. 여섯 가닥이 꼬였다 풀어지는 소리, 징징징, 뼈마디를 울린다. 가지런한 현들이 전면에 나섰다가 기타에 자리를 내어준다. 기타는 파고들고 파고들어 더 깊은 곳을 건드린다. 움찔할 수밖에…… 나를 비운다. 악기가 빈 몸을 차지한다. 아버지 신중현이 아들 신윤철에게 기타를 유증한 것 같다. 더 정확하고, 더 명징하다. 음 하나하나에 흔들림이 없다. 깨끗하다는 인상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간주의 기타. 균제된 힘이 느껴진다. 아들의 매끄러운 연주와 현악기의 융단 같은 펼침 대 아버지 신중현의 노래, 강렬하게 대비된다. 기타는 밝고 노래는 어둡다. 기타는 매끈하고 노래는 거칠다. 기타는 화려하고 노래는 투박하다. 기타는 이어지고 노래는 끊어진다. 기타는 가볍고 노래는 무겁다. 기타는 달콤하고 노래는 쓰다. 위기타는 어루만지고 노래는 때린다. 기타는 귀로 들어오고 노래는 살갗을 지나간다.

  〈거짓말이야〉 : 긴장감 가득하다. 베이스와 어쿠스틱 기타, 시간을 분절한다. 드럼 출발. 스트링 활주 시작. 베이스의 반복음, 행진하면서 기타를 부른다. 헤이, 기타, 이리 와서 빛을 뿜어보라구. 기타가 앞으로 달려나가 불꽃을 내뿜는다.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전부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는데, 나에게는 부정할 근거도 이유도 없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하느니, 그대를 잊는 것이 행복할 것이라는, 진실 같지 않은 진실이 불러오는 현기증. 기타 솔로, 어지러움을 불러온다. 신중현의 목소리는, 거짓말이라고 읊는 딕션(diction)은, 부정과 긍정을 뭉그러뜨리는 주문(呪文)이다.

  〈간다고 하지 마오〉 : 유월 한낮의 정적 속으로 들어온 음악. 결코 유려하지 않은 경질(硬質)의 목소리. 신중현의 목소리가 흡착한 감정에 형상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 명백하게, 부족하다. 현재 속의 사실인데 개념으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의 몸이 선사하는 감정의 중량. 기표는 분명한데 기의가 사라진다. 음악이 언어를 부정한다. 하지 무렵의 햇빛이 소리를 휘발시킨다. 살이 문드러진 후에 남은 뼈 같은 목소리, 둔중하다. 어쿠스틱 기타 출발, 베이스 합류, 26초가 지나서 일렉트릭 기타 등장. 충실한 베이스가 배경을 확장한다. 6월의 훈증이 밀려온다. 말라가는 장미향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신윤철의 기타는 곡의 중간 결절 지점을 마련한다. 사이를 메우는 현과 베이스 앞에서 날카롭게 솟구치는 기타. 나에게 주어진 4분여의 시간이 늘어난다. 시간을 잊는다. 이것은 음악의 신비. 도취될 수밖에, 탐닉할 수밖에, 중독되고 마비될 수밖에…… 신중현의 목소리는 듣는 주체를 영(英→囹→影→靈→永→零)이 되게 한다.

 

  &

  〈아름다운 강산〉 : 신비롭다. 말할 수가 없다. 안절부절 상태가 지속된다. 움직이고 싶은데 붙들린다. 떠나고 싶은데 발을 뗄 수 없다. 안고 싶은데 몸이 없다. 소리-몸이 파동으로 밀려오는데, 내가 안으려고 하면, 그 몸 사라진다. 음악은 나를 포옹하지 않는다. 음악은, 오래 전에, 내 몸속에 있었다.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 음악은 언제나 심장에서 박동하고 있었다. 음악과 나는 이별한 적이 없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이다. 우리는 피와 살과 뼈를 나누어 가졌다. 음악은 몸이고 느낌이다. 나는 발열한다. 광야를 내달리는 들소떼 같다. 몰려오는 폭풍 같다. 음악의 영토, 〈아름다운 강산〉이 끝없이 확장한다. 대지 위에 서서 〈아름다운 강산〉이 쏟아내는 환희를 경험한다. 이것은 무한한 생성이다. “아름다운 이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네.” 신중현의 음악 안에 우리가 있네. 벅차다.

  Feel

  〈미련〉 : 신중현은 노래하지 않는다. 부정형으로 귀결될 그의 노래. 보컬리스트 신중현의 노래는 거칠고 둔탁하다. 끊어지고 부서진다. 주저앉고 넘어진다. 그는 노래가 아니라 목소리를 들려준다. 65세에 온몸으로 나에게 육박한다. 그가 부르는 것은 노래가 아니다. 그는 삶을 말한다. 인생을 짊어지고 표현한다. 들려오는 것은 그의 노래가 아니라 그의 인생-몸이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기교가 아니라 진심이다. 노래가 바로 ‘나, 신중현’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그의 목소리-몸이 창조해내는 느낌을 기록할 수 없다.

  〈마른 잎〉 : 귀기(鬼氣)와 처량. 마음을 부스러뜨리는 신중현의 목소리. 비 그친 후 쨍그랑거리는 햇빛을 맞이한다. 장미의 계절이 흘러간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마음 마디가 얼얼하다. 젖는다. 하염없다. 쓸쓸하다. 쓸려나간 것, 무엇일까. 잊어야 하는 사람, 누구일까. 무참해진다. 듣는 나를 지워버리는 신중현의 목소리. 넋을 놓고 나를 방임한다. 기타가 운다. 마음을 다해, 전력으로, 슬픔을 떠안고 흐느낀다. 몸이 운다. 갈라진다. 눈물이 흐른다. “누구를 찾아서 그렇게 헤매나.”

  沃度丁幾 바르신다 외할머니 손톱 하나하나 알뜰하게 바르신다 매화가 핀다 매화가 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외할머니 옷고름 씹어가며 沃度丁幾 바르신다 (……) 어제도 오늘도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길 안동연쇄 처마 아래 죙일토록 앉아 두 볼 발그레지도록 외할머니 얄궂게도 沃度丁幾 바르신다
— 채상우, 「엘레지」 부분

  〈나뭇잎이 떨어져서〉 : 이상하다. 참으로 이상해서 정신 차릴 수가 없다. 마음의 산란 또는 신산. 왜 아플까. 왜 쩔쩔맬까. 신중현의 목소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근거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 음악의 마법이라고 짐짓 얼버무린다. 가창과 발화 사이에서 신중현의 목소리는 현악 선율을 양력 삼아 부상한다. 악기 연주의 전부가 신중현의 보컬을 위해 현존하는 것 같다. 나는 단어 하나를 떠올린다. 멜랑콜리. 기타가 나를 건드린다. 그것이 아니라고, 검은 우울이 될 수 없다고, 한 대 때리는 듯하다. 가사의 의미를 최소화하는 악기들의 합주. 기표의 떨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막을 할퀴는, 신중현의 목소리.

  〈떠나야 할 그 사람〉 : 환부가 뜨거워진다. 이별 후의 이별이 다가오는 것 같다. 나 대신 앓아주는, 내 아픔까지 품고, 떠나간 사람. 그가 남겨놓은 것, 음악. 신중현의 목소리에서 퍼져 오르는 이별의 냄새. 그가 사랑의 비의를 낮게 말하고 있다. 말과 노래가 구별되지 않는다. 사랑했던 사람이 날 두고 떠났다. “맺지 못할 그 사람 눈물만이 가득”하다. 그 사람의 환후(幻嗅), 아른거린다. 그 사람, 떠나지 않았다. 신중현이 옆에 있다.

  〈석양〉 : 목소리가 듣는 자의 감정을 잘근잘근 씹는다. 신중현의 목소리는 느낌(feel)을 극한으로 끌고 간다. “안녕”을 외치는 그의 목소리 때문에 나는 찢어진다. 눈물이 고이기 전에 엄습하여 나를 짓누르는 목소리, 어쿠스틱 기타에 이어지는 목소리, 사람의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 블루지한 기타 연주가 송곳이 되어 가슴에 들어오기 전에, 목소리가 내습한다. 석양에 얼룩지는 목소리. 자상 입은 석양이 피 흘린다. 처절하다. 나는 끊어진다. 잘리고 잘려 토막이 된다. 신중현은 “가야 할 사람이기에 안녕 안녕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결단코, 말할 수 없다. 나는 아직 보내지 않았다. 안으로 휘말리는 목소리, 내파 후에, 외피를 벗겨내는(peel), 절절한 목소리. 결국, 울 수밖에……

  유월 어스름 때의 빗줄기는 / 암황색의 시골(屍骨)을 묶어세운 듯, / (……) // 조그마한 보드라운 그 옛적 심정의 / 분결 같던 그대의 손의 / 사시나무보다도 더한 아픔이 / 내 몸을 에워싸고 휘떨며 찔러라,
—김소월, 「여수(旅愁)」 부분

  음악이 내 몸을 찌른다. 그 물결, 나를 어루만진다. 몸 열고 들어온다. 막을 수 없는 것. 의지를 벗어난 것. 음악이 나를 찾아왔다. 영원한 파동. 그의 목소리가 나를 꿰맸다. 나를 지운다. 나를 매장한다. 그리고 태워버린다. 신중현의 목소리는, 그가 부르는 노래는, 나를 압착하고, 나를 침식한다. 나를 횡단하여 음향적 신체를 만들어낸다. 신중현의 목소리, 감정의 프리즘,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을 끌어안는다.

  석양이 진 후, 회(灰)와 남(藍)이 섞이고 있다. 살아 있는가. 들려오는 목소리. 입김이 느껴진다. 신중현이 이별한 사람을 부르는 소리. 살아서 “안녕 안녕” 말해주는 사람. 어두워진다. 밤이 깊어진다. 몸이 아프다. 마음이 울먹인다. 혼자 견디는데, 그 목소리 다가와서 나를 감싼다.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 것이다. 사랑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 《쿨투라》 2020년 7월호(통권 7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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