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Theme] 연애시의 비밀
[8월 Theme] 연애시의 비밀
  • 유성호(본지 주간, 한양대 국문과 교수)
  • 승인 2020.08.03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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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역사를 가로지르는 고전적 쟁점 가운데 사랑과 죽음이 대표적일 것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랑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는 불가피한 호혜적 운동이다. 이 가운데 사랑은 인간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정서이기도 하고, 심리적 현상이기도 하고, 어두운 강렬함을 품은 욕망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과 행동과 그 결과를 주음(主音)으로 삼는 시를 두고 우리는 ‘연애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연애소설이 사랑의 관계가 빚는 갈등과 해결 과정을 극화하는 것에 중심이 놓이는 데 비해, 연애시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상황에서 초래되는 정서에 관심을 둔다. 가령 연애소설에서는 인물과 사건이 중첩되면서 누군가 누구를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이 중요하다. 특별히 서로 처음 만나거나 감정을 나누게 되는 사랑의 시작과 파국이나 해피엔딩으로 매듭지어지는 사랑의 끝은 연애소설의 가장 매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연애시에는 인물이 부재하거나 희미하게 나타난다. 사건이랄 것도 없다. 파국이나 해피엔딩을 끝없이 지연시키는 감정의 느린 연쇄가 있을 뿐이다.

  사실 사랑의 대상은 무심한 사물이 아니라 주체와 마찬가지로 욕망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랑은 자기애(自己愛) 같은 것이 아니라 상호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물론 일방향적 ‘짝사랑’이나 ‘외사랑’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말해 사랑은 쌍방향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쌍방향의 소통 과정에서 하나의 방향이 사라진 것이 이를테면 연애시의 문법이다. 오히려 일방향적인 외로운 목소리의 형태가 연애시의 대종을 이루고 있고, 그 모티프는 사랑의 결여형식이라는 비극적 조건에서 생겨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사랑이 제도적으로 승인되기보다는 운명이나 불가항력적인 타자의 개입으로 인해 소멸 또는 유보되는 것이 연애시의 정수로 남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 비추어 왜 사랑의 결여형식이 완성형보다 더 감동을 주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대중가요 가사들이 하나같이 이러한 연애시의 문법을 띠고 있는 것 역시 그러한 사랑의 대중성에 대한 유력한 알리바이가 될 것이다. 따라서 뛰어난 연애시는 이 같은 비극적 상황에 처한 개인을 위무하고 그들에게 삶의 활력을 역설적으로 불어넣어주는 효용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김소월, 「먼 후일」 전문

 

  표면적 문맥대로라면 ‘당신’을 잊는 것은 먼 미래에나 가능하다. 물론 그것은 결코 오지 않는 미래다. 화자는 당신을 매일매일 잊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당신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망각/기억’ 의 대립이 ‘먼 훗날’의 끝없는 지연을 통해 소멸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소월 시는 당신과 사랑을 나누기보다는 당신을 그리워하는 심리 상태를 더 사랑한다. 그것은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이 아니라, 내가 품은 사랑에 대한 나의 사랑을 노래한다. 원망과 자책을 숨기고 당신을 향한 기다림만을 노래한 이 작품은 결여형식을 통한 사랑의 영원성을 잘 보여준 사례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 집」 전문

 

  이 시편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인상적 구절로 시작함으로써 그 다음 펼쳐질 신(scene)들이 모두 ‘쓰기’와 연관될 것임을 암시한다. 화자는 언젠가 사랑하는 이에게 무언가를 썼던 기억을 떠올린다. 창밖에 떠돌던 겨울안개, 그 안개에 감싸였을 짧은 밤, 밝혀진 촛불, 무언가를 쓰려 펼쳐놓았을 흰 종이, 망설임과 공포 속에서 떨구어지던 눈물이 ‘쓰기’를 감싸던 세목이었을 것이다. 촛불은 밤을 밝혀주었고, 눈물은 헤어짐의 공포를 예비하던 백지를 적셔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기억을 그는 “잘 있거라”의 반복을 통해 떠나보낸다.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지막 ‘쓰기’를 수행한 화자는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행위를 통해 결별을 완성한다. 그때 “가엾은 내 사랑”이 갇힌 ‘빈 집’이 탄생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을 잃고”에서의 ‘사랑’과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에서의 ‘사랑’이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된다. 앞의 것이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함의라면, 뒤의 것은 그동안 쏟아온 자신의 사랑을 뜻한다. 자신의 사랑을 ‘빈 집’에 가두어버림으로써 그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역설의 소망이 화자 내면에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기형도는 이처럼 잃어버린 사랑을 가둔 ‘빈 집’을 탄생시킴으로써 그 사랑을 항구적으로 붙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바다로 내려간/소금인형처럼/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당신의 피 속으로/뛰어든/나는/소금인형처럼/흔적도 없이/녹아 버렸네
— 류시화, 「소금인형」 전문


내 안에 있는 이여/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으로 흘러/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그대가 곁에 있어도/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전문

 

  류시화는 누군가를 향한 투신과 합일과 소멸의 순간에서 오는 극적 사랑의 감동을 선사한다. 이때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구적 결여를 통해 끝없이 미완의 연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 연속성의 핵심이 바로 흔적도 없이 녹아 그리움으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인 셈이다. 우리는 보통 ‘사랑에 빠진다(falling in love).’라고 한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이란 수동적 정동(passive affect)이 아니라 능동적 활동(active activity)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존재 증명에 사랑보다 더 명징한 것은 없다. 그래서 연애시에는 사랑의 과정이 아니라 사랑이 끝난 후의 기다림과 그리움과 항구적 소망만이 개입하게 된다. 연애소설과는 다른, 연애시만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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