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Theme] 픽션으로서의 연애
[8월 Theme] 픽션으로서의 연애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0.08.03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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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는 발명품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해 사귀는 일이 무슨 발명품이냐고? 이 문장의 앞뒤를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 맞다. 좋아하는 감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사귀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귀는 일에는 반드시 형식이 결합한다. 예컨대 옛날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과 오늘날 연인이 하는 사랑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감정적 차원에서 사랑의 크기와 질이 특별히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까마득한 과거부터 전승된 이야기라 할지라도 거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마음에 감정이입 할 수 있다. 10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동일한 호모 사피엔스다. 부분적인 업데이트야 해왔겠지만, 기본적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바뀌지 않았다. 유전자는 힘이 세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사피엔스』를 빌려 말하건대,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을 압도하게 된 독특한 능력—언어를 사용해 허구를 창안하고 그것을 공유해 실재로 믿는 상상의 체계다. 유발 하라리는 문명의 필수 요소인 법과 종교와 화폐가 허구임을 지적한다. 우리가 몰랐다기보다는 굳이 그 실체를 파악하지 않으려 했다는 설명이 옳을 것 같다. 이미 사회에서 잘 작동하고 있는데 이것들을 속속들이 알아서 뭐하나. 할 것도 많은데 피곤할 뿐이지. 그러나 피로를 조금 감수하고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면 세계가 달리 보인다. 흔하디흔하게 여겨지는 소설 속 연애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사귀는 형식에 주목하면 낯선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만 허구인 것이 아니다. 연애도 그렇다. 옛날 성춘향과 이몽룡 커플과 오늘날 연인의 연애가 똑같을 수 없다. 연애는 재발명된다.

  연애의 재발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이는 세상 변화의 흐름과 닿아 있다. 이제는 아무도 그렇게 쓰지 않지만 연애에는 항상 ‘자유’가 붙어 다녔다. 연애가 시대 담론이자 대중 용어로 자리 잡기 시작한 1920년대 초반, ‘자유연애’는 당대 젊은이들의 꿈이었다. 내가 스스로 사랑할 대상을 고르고, 데이트를 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가, 전통 혼례가 아닌 신식 결혼을 한다는 것은 당시 ‘힙(hip)한 주체’임을 자부한 신여·신성남성의 표지였다. 구여성·구남성들은 연애를 한 것이 아니었다. 부모가 강요한 바에 따라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과 혼인해 사는 이들에게 자유연애는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에 불과했다. 개화기를 기점으로 군상들의 서사가 펼쳐지는 소설 『토지』를 봐도 그렇다. 이 작품의 초중반 독자가 연애라고 여길 만한 에피소드는 찾기 어렵다. 부모가 배필을 고르면 다음 순서는 곧장 혼인이었으니까.

 

  이 정도는 그나마 온건한 편이다. 『토지』에는 윤씨부인을 겁탈한 김개주 등 숱한 강간이 언급된다.(성범죄의 자세한 묘사나 왜곡된 미화와는 상관없다. 박경리는 일급 리얼리즘 작가다. 그녀는 그때의 현실을 그대로 다시 그려냈을 따름이다. 일본 식민 지배의 야만은 물론이고, 신분제의 위계, 가부장제의 폭력이 『토지』에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애는 상상하기 어렵다. 두 사람이 애정을 알콩달콩 속삭이는 과정이 연애가 아니라는 뜻이다. 본인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연애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가령 한국 근대장편소설의 효시로 평가받는 『무정』을 사례로 들 수 있겠다. 이 작품을 이광수는 1917년에 썼다. 한데 왜 『무정』은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나열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는 『무정』이 모더니티의 대표격 두 가지를 전면화했다는 사실이 포함된다.

 

  모더니티의 첫 번째는 과학에 입각한 계몽주의다. 인물들의 갈등은 홍수로 고통 받는 이재민을 도와야 한다는 의식 아래 봉합된다. 그것은 곧 무지몽매한 조선 백성에게 문명의 빛을 쪼여야 한다는 인식이다. 형식은 조선 민중에게 지식을 주어야 한다며 “과학! 과학”을 부르짖는다. 미신을 배격하는 이성의 논리는 근대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사고관이다. 모더니티의 두 번째는 바로 개인의 선택에 기반을 둔 자유연애다. 여전히 인습에 매여 있으나 선형·영채·형식의 삼각관계가 이를 예증한다. 일부다처가 허용되던 중세 소설 『구운몽』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는 설정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연애의 시대’인 근대에는 용납될 수 없다. 너나 나나 다를 바 없는 자기 삶의 주체인데, 누가 누구에게 복속되는 구습을 어떻게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나. 연애는 중세의 강압적 질서와 불화한다.

 

  한국만 해당되지 않는다. 영미 문학이나 일본 문학할 것 없이 문학사에 획을 그은 근대 소설은 대부분 연애가 테마였다. 연애는 시시껄렁한 사랑놀이와 구별된다. 앞서 서술한 대로 연애가 모더니티의 대표격임을 고려하자. 그런 한에서 연애는 근대성과 결부된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짝을 발견하려고 이곳저곳을 기웃대는 노력, 짝을 맺거나 맺기 위해 같이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는 행동, 기념일에 선물을 주고받는 의례는 모두 자본의 경제 활동을 촉진한다. 소비는 생산뿐 아니라 연애의 성립 조건이다. 돈을 아끼고 싶은 사람이여, 부디 연애를 하지 마시라. 그래도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이여, 그렇다면 로맨스 소설·드라마·영화를 냉철하게 보시라. 우리는 이걸로 연애를 배우기 때문이다. 연애는 실전이라고 외치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글과 영상의 메시지는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스며든다.

  좋은 로맨스 소설·드라마·영화만 나온다면 괜찮지만 그럴 리 없다. 그러니까 독자와 시청자로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라는 조언을 하는 것이다. 성역할을 고정하거나, 성폭력을 묵인하는 작품에 대한 비난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외에 각자 다양한 판단 기준을 가질 수 있을 테다. 이를테면 실제와 유리된 연애의 환상만 자극하는 작품도 감상 목록에서 배제하기를 권한다. 아예 연애의 환상을 제거할 수는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의 환상을 경계하려는 자세는 진짜 연애를 잘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필수 덕목이다. “너는 이제 내 거야.”(소유의 환상) 혹은 “드디어 우리는 하나가 된거야.”(일체의 환상) 따위의 언설이 중심을 이룬다면 그건 거르시길. 이와 같은 나쁜 로맨스 소설·드라마·영화를 외면해야 조금이라도 나은 작품들이 제작되고, 우리의 연애도 개선될 여지가 생긴다. 연애는 언제나 새로 쓰이는 허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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