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철 '찔레꽃 만다라'
유선철 '찔레꽃 만다라'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20.08.06 17: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행간에 담은 시 한 편의 광장을 갖고 싶다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만다라 세상을 펼치는

유선철의 첫 시조집찔레꽃 만다라!!

 

  제11회 오늘의 시조시인상을 수상한 유선철 시인의 첫 시조집찔레꽃 만다라가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5부로 나뉘어져 총 70편의 신작 시조를 수록한 찔레꽃 만다라는 시인의 빛나는 통찰력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만다라 세상을 펼친다.

  등단 후 8년간 시의 밭을 갈고 닦아온 시인은 70수의 행간에서 전봉준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며,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녹아내린 노인의 꿈을 만나기도 한다. 낮고 가까운 이웃의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역사 속을 걸어가 거친 목소리로 우는 누군가를 불러내기도 한다. 가락이 가락을 만나 장을 이루고 유장히 흘러온 장은 종장에서 결구를 짓는다. 시인의 말처럼 날마다 별들의 안부를 묻고//꽃술에 한 뼘 더 가까이 가면//검은등뻐꾸기처럼 울 수 있을까

 

소주병 서너 개가 대문 앞에 누워있다

물이랑 첨벙첨벙 건너온 가난 앞에

애꿎은 담배연기는 생머리를 풀었다

쑥부쟁이 스러지는 꽃의 행렬 끝자락에

심장이 뜨거워서 차마 못 건너는 강

이승의 한 모퉁이가 아직도 불콰하다

저 푸른 논객의 칼, 나 언제 가져보았나

바람을 맞서다가 바람이 되어버린

그 남자, 소실점 돌아 또 한 잔을 건넨다

- 늦가을 문상전문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바람을 맞서다가 바람이 되어버린’ ‘푸른 논객이고, 닮고 싶었지만 닮을 수 없었던 결기를 가진 사람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정신만은 가난하지 않았던 존재였기에 심장이 뜨거워서차마 이승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어 소주 한 잔을 올려 추모한다.

  또한 시절가조時節歌調답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를 노래한 아토피, 구명조끼를 벗어준 단원고 학생 정차웅에 관한 웅아, 정규직 전환 뉴스를 보고 쓴 정가네 찐빵, 탈북민에 애정의 눈길을 준 얼룩무늬 봄이등 현대사회를 날카롭게 직시하며 노래하기도 한다.

  「A4도 마찬가지다. 시대와 사회를 노래한 시들은 제대로 발효시키지 못하면 생경할 위험이 있고, 진정성이 묻어나지 않으면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허황하여 어색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유선철 시인에게는 말을 부리는 재능은 물론, 자신과 비슷한 눈높이로 그들을 바라보는 순정한 눈빛이 있다. 그 진정성은 해직교사 생활의 경험이 투영된 자신의 삶과도 직결되어 있다.

 

빛은 서로 다투지 않고 꽃은 서로 겨루지 않죠

하얗게 비워둬야 비로소 담기는 글씨

누구도 지우지 못할 그 사연 기다립니다

가난한 일기에서 간절한 편지까지

봉숭아 꽃물 같은 눈물이 번지는 날

광장은 사나운 파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농담처럼 둘둘 말아 휴지통에 버린대도

움켜쥔 주먹만은 다시 펴지 않습니다

화르르, 밑불이 되어 소문 없이 사라져도

- 「A4전문

 

 

  백지 한 장엔 어떤 글도 담을 수 있다. 위로와 격려, 혹은 일필휘지하여 목마른 이들에게 한 동이 물을 쏟아부어주는 글을 담을 수도 있다. 이처럼 시 「A4의 첫 수 초·중장의 빛은 서로 다투지 않고 꽃은 서로 겨루지 않죠//하얗게 비워둬야 비로소 담기는 글씨는 백지에 담을 염원을 말한다. 시인은 가난한 일기에서 간절한 편지까지행간에 담은 시 한 편의 광장을 갖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표제시인 찔레꽃 만다라는 어떠한가.

 

신라는 적막이다, 혈관이 막혀 있다

찔레의 푸른 맨발 절벽을 딛고 서서

돌부처 어깨에 걸린 먼 고요를 바라본다

어둠의 속살마저 베어 문 달빛 아래

하얀 몸 벗어놓고 스러지는 너의 향기

부서져 꽃길을 연다

만다라를 펼친다

- 찔레꽃 만다라전문

 

 찔 레꽃은 천 년 전 신라에도 피었고, 지금도 그 모양 그대로 피어난다. 가시덤불을 뚫고 피어난 찬란한 개화의 순간, 꽃을 둘러싼 세상은 적막하다 못해 피가 멎는 듯 절대의 고요를 가진다. 하지만 찔레는 꽃 무덤을 이뤄야 아름답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향기를 발한다. 야성을 지녔기에 푸른 맨발절벽을 딛고선다. 그러하기에 돌부처 어깨에 걸린 먼 고요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5월 달빛은 어둠의 속살을 베어 물고 찔레 향기는 그 빛 속에서 옷을 벗는다. 달빛이 바람에 부서지고 스러지면서 비로소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만다라 세상을 펼친다. 즉 사람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 우주의 힘이 응집되는 하얀 꽃무덤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찔레꽃을 통해 신라의 적막을 읽어내고, 야생의 향기를 맡으며 만다라의 세상을 열어간다. 시인의 통찰력이 빛나는 아름답고 날카로운 시의 발견이다.

 

  저자 유선철 시인은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201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2013년 제5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2017년 제 11회 오늘의 시조시인상을 수상했다.

  올 여름, 유선철 시인의 집적된 경험이 오롯이 담긴 첫 시집 찔레꽃 만다라를 읽으며, 그 행간 속 변주와 시의 그늘에 한번 동승해보면 어떨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