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평론가, 동료문인 100명 선정
작년 최고의 시는 유계영의 「미래는 공처럼」
도서출판 작가에서 매해 간행해 온 ‘오늘의 시’는 지난 한 해 동안 이루어진 시단의 성과와 그 특성을 증언하는 가장 명징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해마다 각별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올해에도 작년 한 해 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기억에 남았던 좋은 시와 시집을 모아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이하 『2019 오늘의 시』)를 내놓는다.
1990년대 이후 우리 문학계에서 지속적으로 떠돌던 ‘문학의 위기’라는 과장된 풍문은 진부한 관성만 남은 채 실체 없는 담론으로서의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위기 담론을 무색케 하는 활발한 작품적 성취와 비평적 논의의 폭증을 지금 숱하게 목도하고 있다. 물론 문학의 위기 진단이 수용층의 저변 축소나 문학과 상업 자본의 공고한 결탁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오히려 창작과 비평이라는 문학의 두 평행 레일은 최근 유례없는 외연적 활황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이 가운데 우리가 가장 이색적으로 치르고 있는 경험은 ‘문학’이라는 현상과 행위를 둘러싼 여러 층위의 콘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점검일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 우리 시가 거둔 성취는 결코 녹록하거나 가볍지 않다. 특별한 이슈 없이 잔잔하게 다양성의 심화 현상만을 보여준다는 혹독한 진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시는 그 외연적 성층(成層)의 도약 못지 않게 새로운 시인군群의 증가와 함께 이른바 ‘미래파’ 이후의 시대를 구가하면서 서정의 확장과 심화의 양상을 저마다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2019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를 통해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시단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빼어난 성취들을 일별함으로써 우리 시대 서정의 균질적이고 지속적인 심화 흐름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 책에서 우리가 강렬하게 경험한 서정의 실례들은, 서정의 구심적 본령을 회복하고 그것을 보편화하려는 미학적 충동에서 생겨난 결실들일 것이다. 이는 우리 시의 미학적 완결성이 여전히 존재론적 해석과 전망을 통해 구현될 것이라는 경험적 신뢰에서 발원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의미 과잉을 경계하는 작법으로서, 그리고 상상적 능동성을 통해 현대인의 잃어버린 아우라를 되부르는 강력한 방법론으로서, 일종의 서정적 구심력을 강하게 요청받을 때가 있는데, 이는 시간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집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때 기억이란 항상 표면에 떠 있는 어떤 고정된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될 당시의 상황과 유사한 맥락이 도래하면 언제든지 유추적으로 재현될 준비를 갖춘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형상들을 말한다. 이러한 기억을 매개로 한 시간 형식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주류적인 서정의 원리가 되고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 읽고 관찰하고 형상화하고 내면화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시적 대상들은, 사물 그 자체이자, 인간의 삶을 담고 있는 반영체이자, 자신의 시작 행위 전체를 환유하는 역동적 상관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양한 형상적 가능성과 함께 우리 시대의 서정시는 우리 사회에 편재하는 현실적 모순을 끈질긴 관찰과 묘사와 대안 제시로 감싸안고 있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인간을 탐구하는 것을 본령으로 하는 서정시가 사회 모순이나 사람살이의 구체적 고단함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 면에서 현실을 핍진하게 반영하는 것을 중심 원리로 삼는 미학적 원근법은 여전히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는 삶의 구체성과 보편성을 하나로 관통하는 상상력의 통합 과정을 거치며 자기 긍정에 토대를 둔 사회적 상상력의 시적 가능성을 이 책에서 두루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설문 조사 결과, 작년 한 해 동안 발표되었던 시편 가운데 유계영의 「미래는 공처럼」이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이 작품은 시간-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공의 비유를 끌어왔다는 점을 통해 공처럼 운동하는 시간을 “경쾌하고 즐거운” 어조로 드러내고 있다.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공의 이미지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공을 이야기하기 위해 미래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양한 언어-이미지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과 감각을 개안시키는 것이 시의 본령 중 하나라고 할 때, 이 작품은 그런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도 세련된 감수성까지도 겸비했다는 점에 서, ‘오늘의 시’로 선정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좋은 시를 선정하기 위해 『2015 오늘의 시』는 100명의 시인,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을 추천위원으로 추대, 좋은 시 80편(시조 19편 포함)을 선정, 수록하였으며, 작년 한 해 동안 발표된 시집 가운데 ‘좋은 시집’으로 평가되는 19권의 시집(시조집 5권 포함)들도 선정하여 소개하였다. 그리고 기획위원들의 「2019년 한국 시의 미학」이란 주제의 좌담은 우리 시의 양질의 다채로움을 세대론의 시각에서 읽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펼쳐진 우리 시의 동향을 점검하고, 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과 작품집을 함께 검토함으로써, 현재 우리 시의 좌표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또한 말미에 붙인 유계영 시인 인터뷰(전철희)는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시의 쓸모”라는자기 화법을 지닌 젊은 시인이 꾸준한 자기 세계를 개척해온 아름다운 시적 성취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 시단은 시에 대한 믿음으로 2019년 이후의 풍경을 꿈꾸게 될 것이다. 지난 한 해의 시적 성과들은, 이러한 과제에 확연하고도 분명한 미학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탄탄한 미적 완결성을 두루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이 우리 시대의 이러한 과제들에 대해 유추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수상작
미래는 공처럼
유계영
경쾌하고 즐거운 자, 그가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울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두세 번 치고
황급히 떠나는 자다
벗어둔 재킷도 깜빡하고 간 그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진지하게 가라앉고 있다
침대 아래 잠들어 있는 과거의 편선지처럼
그림자놀이에는 그림자 빼고 다 있지
겨울의 풍경 속에서
겨울이 아닌 것만 그리워하는 사람들처럼
오늘의 그림자는 내일의 벽장 속에 잘 개어져 있으므로
손목이라는 벼랑에 앉아 젖은 날개를 말리는
캄캄한 메추라기
미래를 쥐여주면 반드시 미래로 던져버리는
오늘을 쪼고 있다
울고 있는 눈사람에게 옥수수 수프를 내어주는 여름의 진심
죽음의 무더움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겠다
얼음에서 태어나 불구덩이 속으로
주룩주룩 걸어가는
경쾌하고 즐거운 자, 그는 미래를 공처럼 굴린다
침대 밑에 처박혀 잊혀질 때까지
미래는 잘 마른 날개를 펼치고 날아간다
한때 코의 목적을 꿈꾸었던
당근 꽁지만을 남기고
PS:『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에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가장 좋은 영화로 선정되었으며 ‘2019 오늘의 시, 소설, 영화’ 시상식을 지난 3월 8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문학의집 서울에서 가졌다.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목차
■펴내면서
2 0 1 9 오 늘 의 시
강현덕 「나팔꽃」_16
강형철 「밥」_18
고두현 「눈 녹이는 남자」_19
나태주 「물고기 그림」_21
권달웅 「풍금소리」_24
길상호 「천일의 잠」_25
김경미 「밤의 프랑스어 수업」_27
김명인 「지상의 시간」_30
김삼환 「그리움의 동의어」_32
김선태 「꽃들의 전쟁」_34
김성춘 「파초일기」_36
김수열 「폐가」_38
김양희 「빨간 장화」_40
김영찬 「마라케시의 구둣방」_42
김윤숙 「안개지대」_45
김일연 「폭포」_46
김종태 「안개의 방」_47
김중일 「나무는 나뭇잎이 꾸는 꿈, 나는 네가 꾸는 꿈_」49
김지녀 「개미에 대한 예의」_51
김희업 「텃밭은 가깝고 해변은 멀다」_54
류인서 「안경」_56
문보영 「충분한 성격」_58
민병도 「겨울 대숲에서」_60
박권숙 「종말이 화사하다」_61
박기섭 「꽃의 서사」_62
박시교 「빈센트 반 고흐 생각」_63
박은정 「악력」_64
박찬일 「천사는 아들이 아니다」_66
박현덕 「벅수 정거장」_68
박형준 「무덤에 가는 사람」_70
박희정 「전신마사지」_72
백은선 「몬순」_74
서숙희 「쇄빙선」_78
서홍관 「핸드폰 번호 넣어주세요」_80
선안영 「섬, 페로제도에서」_82
성선경 「글피」_84
손세실리아 「육지것」_86
손진은 「빗방울에 대하여」_88
손택수 「흉터 필경사」_90
송재학 「그림자」_92
신경림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_94
신미나 「흰 개」_95
신동옥 「후일담」_98
신용목 「대성당」_104
신철규 「세화」_107
신필영 「봄이 온다」_110
안도현 「무빙」_111
안희연 「터닝」_112
양희영 「꽃도 잊었네」_114
여태천 「저기 너머로」_115
염창권 「비 그친 뒤」_117
오성인 「바닥에 대하여」_118
우은숙 「바람의 깃발」_121
유계영 「미래는 공처럼」_123
유재영 「계절을 바라보는 네 개의 형태」_125
이규리 「하지」_127
이남순 「막사발」_129
이달균 「오래된 책상」_131
이병초 「허수아비」_133
이승은 「꽃돌에 숨어」_135
이승철 「지금 나에겐」_136
이은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_137
이재무 「울음소리」_139
이희중 「허물어지는 집」_140
임지은 「과일들」_142
장재선 「나의 오래된 적의와」_144
전기철 「관촌에서 박상륭의 소설 속을 헤매다
이문구를 만나다」_145
정끝별 「홈페이지 앞에서」_148
정수자 「검은 발에 숙이듯」_149
정용국 「앵두가 익을 무렵」_151
정희성 「나는 자연을 표절했네」_153
조승래 「철이 들어」_155
조 은 「반성이 과한 만두소처럼」_157
조정인 「함박눈이 내리기 때문입니다」_159
진은영 「죽은 마술사」_162
최금진 「누가 고양이 입속에 시를 꺼내 올까」163
최동호 「호롱불」_165
함기석 「살을 굽다」_167
함명춘 「붕어빵 장수」_169
허 연 「그해 강설」_171
2 0 1 9 오 늘 의 시 집
강성은 『Lo-fi』_176
곽효환 『너는』_178
기 혁 『소피아 로렌의 시간』_180
김 언 『한 문장』_182
김영재 『녹피경전』_184
김이강 『타이피스트』_186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_188
문태준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190
박라연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_192
박명숙 『그늘의 문장』_194
박 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196
오봉옥 『섯!』_198
이대흠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_200
이수명 『물류창고』_202
이영광 『끝없는 사람』_204
이우걸 『모자』_206
이정환 『오백년 입맞춤』_208
최영효 『컵밥 3000 오디세이아』_210
홍일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_212
오늘의 시 좌담_ 시 기획위원
2019년 한국 시의 미학_ 214
유계영 시인 인터뷰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시의 쓸모-전철희_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