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평론가, 동료문인 100명이 선정한 시 74편, 시집 16권 수록
‘2020 오늘의 시 수상작’은 작년 최고의 시, 안희연의 「스페어」
도서출판 작가에서 매해 간행해 온 ‘오늘의 시’는 지난 한 해 동안 이루어진 시단의 성과와 그 특성을 증언하는 가장 명징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해마다 각별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올해에도 작년 한 해 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기억에 남았던 좋은 시와 시집을 모아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이하 『2020 오늘의 시』)를 내놓는다.
2020이라는 숫자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퍽 멀기만 했는데 어느새 일상적 국면이 되어버렸다. 바야흐로 2020년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2010년대 한국문학의 현상이랄까 성취랄까 하는 것을 천천히 돌아볼 때도 되지 않았겠는가. 가령 이 시대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전혀 새로운 경험을 가진 작가와 시인들의 등장과 주류화를 경험한 때이고, 사회적으로는 페미니즘의 성세와 함께 소수자들의 존재방식에 대한 탐구와 형상화 의지가 강하게 대두한 때이다. 이 소수자 담론은 일국 차원의 노동, 성, 종교, 언어, 육체 등에서 갈라지는 범주 외에도 국경을 넘어서는 탈북자, 난민,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민 여성 등 다양한 인적 구성을 포괄하였다. 한국문학은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범주의 형상적 성취로 성큼 나아간 것이다.
이제 빈번해진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과 행사 등으로 인해 세계화라는 의제는 제 철을 만난 듯하다. 활발한 인적 교류와 함께 작가들의 해외 진출도 늘어나면서 한국문학은 세계무대의 변방에서 벗어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출판시장의 불황과 디지털 혁명에 의한 스마트폰의 일상화로 문학의 수요는 급감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미학적 정예들의 활발한 성취는 한국문학의 눈높이를 훤칠하게 해주었다. 시단에서는 2000년대 ‘미래파’와는 또 다른 의미의 미학적 전위들이 나타났고, 소설에서는 장편 창작이 크게 늘어났고 표절 논쟁도 뜨거웠다. 출판사들의 잇따른 팟캐스트 출범은 작가들을 마이크 앞으로 불러냈고, 비평 현장은 새로운 매체인 유튜브로 옮겨가기도 했다. 이른바 본격문학이 정체하는 동안 다양한 모습의 장르문학이 강세를 띠기도 했다. 담론적 측면에서는 문학의 정치와 윤리가 표나게 강조되었고, ‘세월호 사건’으로 비롯된 죽음과 기억과 애도의 형식으로서의 문학의 역할이 적극 성찰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해석에서 첨예한 이견이 제출되기도 했고, 제주4․3사건이나 5․18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역사의 분수령에 대해서도 가열한 논쟁과 증언이 잇따랐다. 이때 한국문학은 근대사에서 빚어진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다시 설계하는 쪽으로 문제제기를 꾸준히 해갔다. 그 점에서 이 시대는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한국문학의 전환기이자 난숙기로서 모자람이 없다.
이러한 시기에 2020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는, 지난 한 해 동안 역작을 남긴 시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한 번 시단의 조감도가 되기에 충분한 선집을 꾸렸다. 여러 모로 우리 시대의 감각과 사유를 정점에서 보여준 수많은 가편들을 수록하였다. 많은 동료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시와 시집은, 완결성과 개성을 아울러 갖춤으로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성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번 설문 조사 결과, 작년 한 해 동안 발표되었던 시편 가운데 안희연 시인의 「스페어」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이 작품은 ‘스페어’의 열린 존재성, 가능성, 필요성을 흥미롭게 개진하고 있는데, ‘스페어’에 주목할수록 “진짜라는 말”의 허구와 억압이 환기되면서, “단 하나의 무언가”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가 경계를 넘어서 살아 숨쉬고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이 자유롭게 펼쳐져 있었을 것임을 노래한다. “단 하나의 무언가”가 아닌 다양한 가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들을 통해 가치의 다원화와 탈중심을 웅변처럼 내세운 사유를 흥미롭게 개진하였다.
좋은 시를 선정하기 위해 『2020 오늘의 시』는 100명의 시인,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을 추천위원으로 추대, 좋은 시 74편(시조 19편 포함)을 선정, 수록하였으며, 작년 한 해 동안 발표된 시집 가운데 ‘좋은 시집’으로 평가되는 16권의 시집(시조집 2권 포함)들도 선정하여 소개하였다. 그리고 기획위원들의 「2020년 한국 시의 미학」이란 주제의 좌담은 우리 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난 한 해 동안 펼쳐진 우리 시의 동향을 점검하고, 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과 작품집을 함께 검토함으로써, 동시대 한국시의 미학을 제시하는 좌담이 될 것이다. 또한 말미에 붙인 안희연 시인 인터뷰는 ‘2020 오늘의 시’ 수상작 안희연 시인의 시 「스페어」에 대한 매혹적인 해석을 선사한다. 양경언 평론가는 “(안희연 시인은) 눈으론 보이지 않는다 해도 감쪽같이 일어나는 마음의 일이 사람을 얼마나 다른 상태로 바꾸어낼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며 “그런 당신과 함께 고민하는 자리에 안희연의 시”가 있으며 “그 ‘남겨진’ 무언가가 오늘의 일부가 되어 내일로 가는 길을 만들어 주기도 함을 일러주는 시”라고 평한다.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 이는 카(E. H. Carr)다. 이러한 비유적 정의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흐름이나 국면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데 지난 시간의 그것들이 유력한 참조항이 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 2020년대는 2010년대가 남긴 미완의 의제를 반복하고 그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면서 새롭게 펼쳐져갈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이 우리 시대의 이러한 과제에 대해 유추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수상작
스페어
안희연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 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 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혀진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안희연 시인은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이 있다.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목차
■펴내면서
2 0 20 오 늘 의 시
강성은 「개의 밤이 깊어지고」 _16
고영 「무중력」 _17 곽재구 「목도장」 _19
곽효환 「노둔한 사람들」 _21
권달웅 「독락당」 _23
길상호 「심해의 사람」 _24
김남규 「화요일」 _25
김병호 「그런 일이 있었다」 _26
김선태 「노래방은 흐른다」 _27
김안 「피붙이」 _29
김양희 「절망을 뜯어내다」 _31
김이강 「낮잠」 _32
김이듬 「당신이 잠든 사이」 _34
김행숙 「우산과 담배」 _36
김혜순 「숨을은물러설퇴」_38
나태주 「너무 늦게 슬픈 아들」 _40
도종환 「속유」 _41
류인서 「해당화」 _43
맹문재 「경안리에서」 _44
문순자 「소리쟁이」 _45
문정희 「절벽 위의 키스」 _47
민병도 「선운사에서」 _49
박기섭 「이름의 편력」 _50
박라연 「아무것도안하는애인」_51
박명숙 「택배」 _53
박형준 「아침인사」 _54
변종태 「에곤 쉴레 혹은 대합실」 _55
서영처 「얼룩말」 _56
손세실리아 「수묵 기법」 _57
손택수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_59
송종찬 「마음의 서쪽」 _60
송찬호 「산꼭대기의 집」 _61
신용목 「밤은 필요하다」 _63
신필영 「뚝섬」 _66
안미옥 「여름 끝물」 _67
안희연 「스페어」 _69
오광수 「슬로슬로우 퀴퀵」 _71
오승철 「연해주의 페치카」 _72
유계영 「썩지 않는 빵」 _73
유안진 「솔베이지」 _75
유재영 「겨울 테라코타」 _76
이규리 「당신은 첫눈입니까」 _77
이근화 「망치론」 _79
이나영 「드라마틱」 _81
이남순 「고시원을 아시나요」 _82
이송희 「유리잔을 마주하다」 _83
이승은 「무렵」 _85
이승하 「신용에 대하여」 _86
이원 「친목모임」 _88
이은봉 「스투키, 너는」 _90
이장욱 「신경정신과에서 살아남기」 _91
이재무 「우리시대의 더위」 _94
이정환 「월류봉」 _95
이해존 「이물감」 _96
이현호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 _98
이혜미 「원경」 _100
임성구 「빈잔」 _102
장옥관 「없는 사람」 _103
장재선 「도망 중인 그녀와 함께」 _105
정끝별 「동물을 위한 나라는 없다」 _107
정수자 「사막풀」 _109
정용국 「고사목 궁전」 _110
정희경 「뜸」 _111
조승래 「모차르트의 시간」 _112
차주일 「잇몸이 높은 여자」 _115
천양희 「그늘에 기대다」 _117
최금진 「붉은 실지렁이」 _119
최영효 「바랭이」 _121
최정례 「4분의 3쯤의 능선에서」 _122
함명춘 「해피」 _124
허연 「슬픈 버릇」 _127
홍성란 「그 봄」 _129
홍일표 「꽃의 본적」 _130
황인찬 「소양돼지닭」_132
오늘의 시집 시집 16권
권성훈 『밤은 밤을 열면서』 _138
김민정 『너의거기는작고나의여기는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_140
김영재 『목련꽃 벙그는 밤』 _142
김용락 『하염없이 낮은 지붕』 _144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_146
노향림 『푸른 편지』 _148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_150
신달자 『간절함』 _152
신동옥 『밤이 계속될 거야』 _154
이달균 『열도의 등뼈』 _156
이은규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_158
이태수 『내가 나에게』 _160
조정인 『사과 얼마예요』 _162
최동호 『제왕나비』 _164
최문자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_166
하재연 『우주적인 안녕』 _168
오늘의 시 좌담_ 시 기획위원
2020년 한국 시의 미학_ 170
안희연 시인 인터뷰
나머지를 품고 우리는 계속 가네-양경언_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