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영화 격월평] 영원한 모라토리움의 끝: 미야케 쇼 〈주온: 저주의 집〉
[장르 영화 격월평] 영원한 모라토리움의 끝: 미야케 쇼 〈주온: 저주의 집〉
  • 양진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0.08.3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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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 감독의 〈주온:저주의 집〉

  축제는 학생들에게 있어 ‘시간과 공간이 멈춘 장소’이다. 교내 밴드가 평소에 갈고 닦은 실력을 보여주는 흥겨운 축제뿐만 아니라, 교복 입은 두 소년이 서로를 죽을 만큼 때려도 쉽사리 끝나지 않는 주먹다짐도 ‘축제’에 해당한다. 그들은 ‘졸업’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축제 안에 선생님과 부모님의 자리를 만들어 두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평가받지 않고 성장하려는 것이다.

ⓒTVA

  외계인 소녀 라무와 엉터리 고등학생 아타루의 코믹한 연애를 그리는 80년대 일본 순정만화 『우루세이 야츠라』(타카하시 루미코 作)의 두 번째 극장판 <뷰티풀 드리머>(오시이 마모루 作, 1984년)에서 축제는 ‘시간의 무한 루프’로 표현된다. 시리즈에서 라무와의 관계에만 만족하지 않는 아타루가 다른 여자아이들과 가까워지려다 실패하고 매번 돌아올 때(그리고 라무가 그것을 용인해주었을 때) 이미 그것은 축제 그 자체였지만, 영화에서 그들은 ‘정식 축제’인 학원제를 준비한다. 축제 전날까지 열심히 준비하며 잠들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축제 전날로 돌아와 있다. 다들 즐거우니까 아무도 이 상황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세계에 질린 아타루가 이 모든 게 ‘라무의 꿈’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망설임 끝에 거기서 탈출한다. 미야케 쇼 감독의 청춘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다. “9월이 되도, 10월이 되도 이 계절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라는 청년 ‘나’의 고백은 서점에서 함께 일하는 ‘사치코’와의 연애라는 축제의 시작 지점부터 그 연애가 끝나는 시점까지 유효하다. 하지만 ‘나’가 사치코에게 진심으로 “너를 사랑해”라고 고백하며 그녀를 붙잡을 때 그들의 소우주에 갑자기 균열이 생긴다.

  <주온: 저주의 집>은 그 균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설명할 수 없는 계절들을 품고 어른이 되지만, 어떤 사회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건 가격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다락방에 쌓아 둔 지난 계절들을 버리지 않는 어른은 자신을 매물로 내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라는 건물을 부동산에 내놓기 전에 우리 안의 먼지 묻은 계절들을 매입자에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것들과 어떤 방식으로 마주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야케 쇼 감독은 ‘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디지’라고 묻는 것 같았던 사치코의 마지막 표정에 대해 어른의 얼굴로 답한다. 이제 그런 곳은 없다고.

ⓒ넷플릭스

  <주온: 저주의 집>은 <주온> 시리즈의 프리퀄로, 넷플릭스에서 6부작으로 공개되었다. 1화는 “<주온>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 사건은 모두 어느 주택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라는 내레이터의 음성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영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라는 설명이 덧붙여진다. 이것은 이번 시리즈에 한정된 설정에 불과한 것이지만, 공포의 구심점을 ‘카야코-토시오’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기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리즈는 공적(公的) 시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것은 서사 속의 사건들이 사회의 특정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1988년부터 1996년까지는 일본의 경제 호황이 끝나고 대량 실업 사태와 대기업의 부도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던 시기다. 이 위기가 찾아오기 전까지 그들은 ‘어른인 척하며’ 지낼 수 있었다. 문화평론가 우노 츠네히로는 이것을 ‘유형성숙(neoteny)’으로 표현했다. 2차대전 패전이후 일본은 전쟁이라는 행위에 대해 반성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기도 전에 경제적인 팽창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늘 ‘정신적 공백’이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그들은 ‘허구’라는 방법을 동원해 ‘남성성에 대한 긍정’과 ‘역사로부터의 도피’라는 해결책에 도달한다.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려 했던 좌파 진영이 내분을 겪다가 1970년대 적군파 사태로 몰락했을 때, 일본은 현실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건 ‘허구’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본의 정신적 공허라는 다락방에 허구들이 채워졌지만 이것은 버블경제 붕괴와 함께 수명을 다하고 만다. 그것은 ‘라무의 꿈’과 같은 대중문화적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방어막의 부서진 곳으로 ‘미성숙’이라는 현실이 침입했고, 현실정치의 대리자들은 이것을 ‘헛소문’ 같은 것으로 치부하려 했다. 그들은 이미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가상적인 적들과의 결투를 앞둔 ‘소년’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흘려넘긴 헛소문들은 콘크리트 살인사건(1988년), 옴진리교 사건(1994, 95년)과 같이 찾아왔고, ‘주온’ 시리즈에서는 저주받은 집으로 재현되었다.

ⓒ넷플릭스

  심령 연구가 야스오는 초현실적인 사건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연예인인 하루카와 출연한다. 저주받은 집에 대한 무서운 경험담을 다룬 당일 방송이 끝난 후 하루카는 야스오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수집하세요?”라고 묻고, 야스오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는 사실 하루카가 얘기한 저주받은 집에 살았던 사람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었고, 어렸을 적 가족들이 그 집에서 목숨을 잃은 이유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찾으려는 것 같다. 하루카는 애인인 테츠야와 함께 그 집에서 살 예정이었지만, 부동산 업자로부터 그 집의 저주에 대해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테츠야는 그 집에서 본 유령에 대해 하루카에게 얘기하기 시작했고, 하루카는 불안을 견뎌내기 어려웠던 탓이었는지 방송에서 저주받은 집에 대해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즈음 하루카는 테츠야의 어머니에게 결혼 전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하는데, 그 전날에 그녀에게 테츠야의 ‘부고’가 전해진다. 그 뒤 얼마간 방치된 그 집에서 또 다른 일이 벌어진다. 근처로 전학 온 ‘키요미’라는 여학생이 동급생들(요시에, 마이)과 그곳으로 담력 시험을 하러 갔다가 요시에의 남자 친구인 ‘유다이’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다. 1층에 혼자 남겨진 키요미는 넋 나간 얼굴로 2층에 올라가 이불장에 몸을 구부리고 들어가 앉는데, 다락방과 연결된 구멍으로 나타난 귀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다른 방에서 여자친구와 섹스를 하던 유다이는 키요미의 비명을 듣고 2층에 가 부들부들 떨며 안기는 키요미를 끌어안고, 그 순간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힌다. <주온: 저주의 집>의 서사는 이 집과 관련해 살아남은 두 그룹, 즉 ‘야스오-하루카’와 ‘키요미-유다이’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들이 떠난 이후 그 집에 거주하게 된 한 부부의 에피소드도 서사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저주의 집과 관련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한 가지 공통점을 더 가지고 있다. 그들은 완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점이다. 야스오는 어렸을 때 가족을 모두 잃었고, 하루카의 가족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테츠야와 키요미는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유다이 역시 하루카처럼 이 시리즈에서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데,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들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족이 없거나 가족으로부터 방치된 상태인 것 같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이번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온전한 가정을 갖지 못한다. 마치 이들에게 내려진 저주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 각자의 현실적 위치를 보장해주는 ‘가족’이라는 근거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규정할 단서를 사회 바깥,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찾아야만 했다. 야스오와 하루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족이 사라진 원인을 그곳에서 찾으려고 했고, 키요미와 유다이는 사회 바깥의 금지된 윤리를 통해 망가진 삶을 복원하려고 했다. 이때 서사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전화기’는 그들의 행동 원리를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하루카의 현실과 테츠야의 죽음을 이어준 것이 테츠야 어머니의 전화였고, 키요미가 담임선생님과 섹스를 하는 어머니를 유다이를 시켜 죽일 때 그가 사용했던 도구가 전화기였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저주받은 집에서 범죄를 저지른 남자가 애써 피해 다닌 것이 ‘전화벨’이기도 하다. 전화벨은 그들 각자의 심리적 현실, 즉 그들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공간’에 잔인하게 그어지는 균열인 것이다. 전화를 받으면 그들은 바깥으로 불려 나가게 되지만,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전화벨은 그들의 세계에 복구 불가능한 구멍들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야스오-하루카와 키요미-유다이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야스오-하루카는 저주의 기원, 즉 1954년에 그 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기 위해 전화기 건너편의 세계로 향하고, 키요미-유다이는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 그것을 부순다(‘그것으로 부순다’ 가 맞겠지만, 마치 ‘그것을 부수기’ 위해 살해 대상이 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각자의 선택에 의해 정신적 ‘공백’과 만나게 될 것이고, 동일한 결말인 ‘파멸’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일본 사회가 오랫동안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 실패했듯이, 야스오-하루카와 키요미-유다이 역시 다락방에 켜켜이 쌓인 비밀을 쉽게 풀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주온: 저주의 집>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젊은 부부가 그 집으로 이사 온다. 남편은 다락방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고, 아내는 남편을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부부는 집 안을 가구와 벽지로 꾸미고, 거실에 스며들어 있는 ‘얼룩’도 가리고 만다. 우리가 그 부부처럼 그 얼룩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를 바라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현실도 그것과 우리 사이를 완벽하게 가릴 수 없다. 아주 조그만 균열, 사회의 논리가 설명해주지 못하는 타인과의 관계의 틈으로 얼굴을 내민 ‘그것’은 우리에게 “도망쳐”라고 속삭일 것이다. <주온 1 오리지널>(1999)의 카야코와 토시오 모자(母子)는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설명 가능한 존재’가 되어갔고, 결국에는 웃음거리로 소비되기까지 했다. 미야케 쇼 감독은 이번 프리퀄 작품을 통해 그런 그들을 본래 위치인 어둠 속으로 데려다 놓았다. 토시오는 다시 갓난아기가 되었고, 카야코는 우리에게 그 아이를 넘겨준다. 아이를 받아든 우리는 형체도 없이 증발할 수도 있고, 어둠 그 자체로 변해 끝없이 ‘제물’을 찾을 수도 있고, 해석되지 않는 사건을 기록하는 심령 연구가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뉴노멀’이라는 정식화에 앞서 우리가 거쳐야 할 어두운 제의다. 이제 그 어떤 허구도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쳐론 강의록』, 김현아·주재명 옮김, 2018, 60쪽

 

 

* 《쿨투라》 2020년 8월호(통권 7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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