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문학월평] 불안정한 존재들의 이야기
[12월 문학월평] 불안정한 존재들의 이야기
  • 전철희 (문학평론가)
  • 승인 2018.12.2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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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존재들의 이야기

약 10년 전, 토드 헤인즈 감독은 밥 딜런의 전기영화 <아임 낫 데어>를 찍었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인 밥 딜런을 여섯 명의 배우가 공동으로 연기했다. 그 중 한 명은 현실에서의 딜런 역할을 맡고, 다른 한 명은 딜런이 출연했던 영화 속의 캐릭터를 재연하는 식으로 배역이 분담됐다. 실제로 밥딜런은 한 명의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포크세대의 아이콘이었고, 또한 특정한 노래를 부르며 영상매체에 출현할 때에는 새로운 페르소나에 이입하기도 했다. 감독은 그런 면모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자 다중 캐스팅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그런 감독의 문제의식이 타당했음을 능히 입증해낼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어찌 딜런만 그러겠는가. 모든 인간은 얼마간 ‘다중인격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동일한 사람으로만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가족과 있을 때의 ‘나’와, 친구와 함께할 때의 ‘나’, 그리고 처음 만난 타인을 마주했을 때의 ‘나’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예술가들은 자신이 완결된 존재로서 일관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고찰을 감행하기도 했다.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자신의 내면에 너무도 많은 자아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새로운 자아로서의 목소리를 낼 때마다 이명異名 을 썼다. 가령 그는 “알베르투 카에이루”와 “리카르두 레이스”라는 이명을 자주 썼는데, 전자는 목가적인 전원시인이며 후자는 우아한 고전주의자라는 설정이었다. 페소아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전원시인으로서 발성할 때 ‘카에이루’라고 필명을 쓰고, 고전주의자로서 글을 쓸 때면 ‘레이스’라고 서명을 달았다. 이런 식으로 그가 쓴 이명은 무려 수 백 개에 달한다고 한다.

페소아의 대표작 『불안의 서』는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을 묘파한 에세이였다. 20세기 최고의 문학작품 중 하나로도 꼽히는 이 책은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이 대표작을 제외하면 페소아의 글들은 대부분이 번역되지 않은 상태였다. 올해 10월에 그의 시집 3권이 연달아 출간된 것은 뒤늦은 감이 있을지언정 반가운 일이다. 시집의 제목들은 각각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이다. 오래 기다려온 독자들이 많아서인지 세 권 모두가 출간되자마자 서점가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아쉽게도 나는 이 책들이 충실하게 번역되었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번역된 작품들 자체로만 보자면 페소아의 독특한 사유와 섬세한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최근 국내문학 관련 서적 중에서는 『작별』 (2018년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표제작인 「작별」은 인간이 무기물(비-생물)로 변신한다는 기괴한 설정을 담고 있다. 사실 한강은 이런 상상력을 『채식주의자』에서도 이미 선보였던 바 있다. 『채식주의자』가 비교적 단단하고 건조한 사변적 작품이라면, 「작별」은 좀 더 감성적이고 애틋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번 수상작은 한강의 소설을 다소 어렵게 느껴왔던 독자들에게도 부담없이 읽히고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이번 수상작품집은 함께 김유정 문학상을 받은 강화길, 권여선, 이승우, 정이현, 정지돈, 김혜진의 소설도 수록하고 있으니 한국문학의 현황을 일별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두루 추천할 만하다.

페소아가 ‘나’의 불안정성에 천착했다면 한강은 인간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을 고발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가 한 명의 인간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는 불안감은 오래 전부터 문학의 단골소재였다. 최근 한국의 문단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이 ‘퀴어’의 코드로 읽히곤 했다. 이 대목에서는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퀴어는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불안감이 퀴어적일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유는 퀴어라는 말 자체가 보편성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는 모든 사람이 ‘남성’이나 ‘여성’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유포되어 있다. 그래서 퀴어는 ‘보편적’이지 않은 이질적 존재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그 결과 오늘날 ‘퀴어’는 이런 식의 폭력적인 ‘상식’에 저항하려는 담론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퀴어에 관한 이야기는 또한 기존의 ‘보편적’인 서사문법을 벗어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최은영, 박상영, 김혜진, 윤이형, 황정은, 기준영, 이종산, 천희란, 박민정 등이 퀴어적인 소설을 썼는데, 이들의 작품은 기존의 서사적 규약을 다소 비틀면서 한 인간의 위태로운 정체성에 관한 통찰로 나아갈 때가 많았다.

올해에는 김봉곤과 박상영의 작품집이 연달아 출시되면서 퀴어문학의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 글은 월평이니 그 중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박상영)에 관해서만 이야기해보겠다. 이 책의 표제작에는 퀴어영화를 찍어서 칸 영화제에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게이 영화감독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거의 일기처럼 담은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평단의 반응은 시원치가 않다. 그의 영화는 남자가 술 먹고 클럽에 가서 만난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내용뿐이었기 때문이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에 사회비판의식이 없다며 힐난했고, 또 다른 평자는 감독이 “홍상수 짝퉁”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렸다. 비판의 요지는 그의 영화가 퀴어영화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지적들이 퀴어영화가 특정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어야만 한다는 선입견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선입견이야말로 너무나 ‘퀴어적’이지 않은 것이다. 상기했듯 ‘퀴어’라는 말에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지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서사적 규약을 벗어나서 그저 음주와 섹스에만 천착하는 동성애자의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 또한 ‘퀴어적’인 작품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유머러스하고도 도발적인 방식으로 그런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

그러나 박상영이 소설 속의 감독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솔직히 말하면 이 감독은 나태한 예술가에 불과하다. 그는 연인과의 섹스에 대한 생각만 하면서 대충대충 살아가는 자신과 같은 인물을 등장시키기만 하면 솔직한 퀴어영화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정말이지 무책임하고 안이한 생각의 극치이지 않은가.

한데 비단 성적 소수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청년세대들 중 다수가 그렇게 약간은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박상영의 소설은 희망과 절망 사이를 부유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존재들의 불안을 현시한다. 가령 「부산국제영화제」에 등장하는 여성은, 자신의 신체가 ‘껍데기’일 뿐이며 SNS에 올라온 게시물 속의 과대 포장된 자신의 모습이 ‘본질’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약간 극단적인 경우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그런 삶이 ‘힙’하다고 믿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람들이 명확한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가 힘들어진 시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문학의 미덕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곱씹게 만들어준다는 점에 있다.

전 철 희 문학평론가. 1986년 광주 출생.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한양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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