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9] 영화 중반부
[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9] 영화 중반부
  • 이무영(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 승인 2020.09.2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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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강렬하게, 더 흥미롭게
  - 서스펜스를 유발하라!

 

  어느 작가든 영화 중반부를 쓰는 게 가장 어렵다. 일단 가장 길다. 장편영화 대부분 중반부가 1시간 이상이다. 쓰다가 집중력을 잃거나 ‘절필감’(writer's block)에 빠져 헤매기 쉽다. 의욕 충만으로 일단 시작했지만 계속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내고, 또 주인공이 그것들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고민하며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게 쉽지 않다. 

  어찌 됐든 한 번 시작한 이상 스토리는 계속 앞을 향해 나가야 하고, 무엇이든 첨가되는 사항은 이미 구축된 드라마의 틀을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떻게든 드라마적으로 의미를 갖춰야 한다. 그냥 내키는 대로 아무 내용이나 쓸 수 없다. 시나리오의 성패는 여기서 결정된다. 만약 중반부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이야기가 생뚱맞게 전개되거나, 무언가를 막 뛰어넘거나 하면 영화는 종착지에 도달하기 전에 고꾸라져버릴 것이다. 중반부 시작 즈음부터 관객은 본격적으로 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인물들이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가를 집중해 지켜본다. 그러면서 그들은 즐겁길 원하고, 때론 나자빠질 정도로 놀라길 원한다. 그런데 만약 중반부의 전개가 앞서 드라마적으로 제기된 문제와 따로 놀거나 너무 어수선하면 관객은 곧 흥미를 잃고 딴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재미없는 영화, 언제 끝나지?”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지금 남편은 뭘 하고 있을까?” 관객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영화의 운명은 패망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관객은 전혀 인내심이 없다. 자신이 지불한 티켓값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영화를 볼 때 그들의 분노게이지는 한없이 상승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까다로운 관객의 관심을 어떻게 계속 영화에 묶어둘 수 있을까? 뛰어난 작가는 영화 중반부 다양한 영화적 도구들을 능수능란하게 활용, 관객이 절대 한눈 팔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이를 서스펜스라고 한다. 서스펜스는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숨죽이며 기대케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그들은 특별한 기대감을 갖고 주인공이 자신 앞에 놓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며, 방해꾼들과 맞서나가는지를 지켜본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계속 관객들로 하여금 다음과같이 고민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내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의 궁극적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궁금증이 서스펜스를 유발한다. 관객은 너무도 궁금했던 사실에 관해 놀랄만한 방식으로 해답을 얻는 순간 경탄해 마지않는다. 가끔 관객이 알고 있는 중요한 정보를 주인공이 알지 못한 채 헤맬 때 관객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른다. 예를 들어 한 남자 주인공이 어느 여성을 지고지 순하게 사랑한다 치자! 그런데 관객은 그녀가 주인공의 친구와 놀아나는 바람둥이임을 안다. 관객은 언제 주인공이 그 사실을 알게 될까,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등을 생각하며 계속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이처럼 관객이 아는 사실을 주인공이 모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과거 사대부집 며느리가 불씨를 꺼트리면 큰일 난다는 얘길 다 알 것이다. 물론 이건 당연히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악습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절대 서스펜스의 불씨를 꺼뜨리면 안 된다. 그건 죄악이다. 서스펜스의 불씨는 무조건 계속 불타올라야만 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다음과 같은 도구들을 활용, 계속해서 관객을 서스펜스의 감옥으로부터 탈출치 못하도록 잡아두어야 한다.

 

 

  “다른 캐릭터를 활용하라!”

  1) 안타고니스트
  전반부가 마무리되면 주인공의 목표가 명확해지고, 그는 당연히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럴 경우 필연코 어떤 장애물이 그를 막아선다. 이런 장애물 중 으뜸이 바로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다. 안타고니스트의 주된 역할은 주인공과 대립하거나 갈등을 빚는 일이다. 안타고니스트는 하나일 수도, 아니면 여럿일 수도 있다. 어째든 그는, 또는 그들은 무슨 연유이든지 주인공의 목표 달성에 방해꾼으로 작용해야 한다. 안타고니스트가 강하면 강할수록 영화의 긴장과 서스펜스도 따라서 강해진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안타고니스트와 운명적으로 맞서는 주인공의 처지는 비장감을 자아낸다. 물론 주인공의 내면적, 정신적 고통이 안타고니스트 대체물로 쓰일 수 있다.

  주인공이 참전 후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또는 ‘신내림’으로 고통당할 수 있다. 때론 엄청난 자연의 힘이나 재앙이 주인공을 파멸의 위험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폭풍우 속, 뗏목 하나에 의지한 채 거대한 파도에 맞서며 오로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인공을 상상해 보라! 아니면 산사태로 눈 속에 고립된 주인공을 떠올려 보라! 이럴 경우엔 주인공이 맞서는 자연환경이 안타고니스트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처럼 주인공이 어떤 다른 악조건과 맞서며 고통받는 방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될 수 있다. 하지만 강력한 반대편 인물이 존재할 때 스토리가 명확해지고, 강렬해진다. 왜냐하면 안타고니스트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주인공과 맞서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상업영화에선 안타고니스트가 악당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꼭 그래야만 하는 공식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안타고니스트가 주인공의 목표달성에 있어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복수는 나의 것>의 가장 큰 매력은 주요 인물인류와 동진 모두 원래 꽤 착하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사람이란 점이다. 그런 두 사람이 영화 중반부부터 치열하게 서로를 죽이고자 달려든다. 관객은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수심에 불타는 둘의 싸움을 지켜본다. 그런 의미에서 류와 동진은 둘 다 주인공임과 동시에 서로에게 훌륭한 안타고니스트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가 맞서는 안타고니스트는 누구일까? 아들 준을 유괴, 살해한 웅변학원장 도섭일까? 물론 준이 살아 있을 동안 잠깐 도섭이 그 역할을 한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준이 죽음으로 영원히 신애 앞에 돌아올 수 없는 게 결정되는 순간 도섭은 바로 안타고니스트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준의 죽음을 몰고 온 그이지만,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드라마적으로 더 이상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진정한 <밀양>의 안타고니스트는 누구인가? 놀랍게도 신(神)이다. 중반부 이후 계속해서 신애를 고통으로 밀어 넣는 존재는 신애가 처음에 안 믿는다고 했다가, 나중에 믿게 됐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이다. 물론 신이 직접 신애를 막아서는 건 아니다. 무정한 신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그녀 스스로 상상하는 것이다. 신애는 준을 잃고 나서 신의 품에 귀의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랐다고 착각한다.

  교도소 면회소에서 만난 도섭에게 신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를 용서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도섭은 이미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지껄여댄다. 신애는 분노한다. 자신보다 먼저 도섭을 용서한 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녀는 원수를 용서할 자신의 카드를 박탈한 신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영화를 본 사람 중 누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에게 용서 받았다’는 말로 신애의 오장육부를 뒤집어놓은 도섭이 안타고니스트인 것 같다고 말이다. 아니다. 둘은 이 만남을 계기로 다신 부딪치지 않는다. 이후 그녀가 맞서는 대상은 신이지, 도섭이 아니다. 흥미로운 건 왜 신애가 신에게 화를 내냐는 것이다. 도섭을 자신보다 먼저 용서한 게 사실인지 신에게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다 물. 론 그럴 수도 없다. 또한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기로 결심했다면, 신이 그를 먼저 용서했느냐는 건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이런 신애를 보며 인간이 참으로 하찮은 존재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마더>에서는 아들의 결백을 입증해야 할 엄마의 난감한 환경이 안타고니스트 역할을 한다. 그녀가 잠시 범인으로 생각했던 도준의 친구 진태나, 아들의 범죄를 목격한 고물상 사내가 잠시 엄마의 길을 막아서긴 하지만 중반부 내내 지속되는 건 아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따로 확실한 안타고니스트를 두지 않은 채 엄마에게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나쁜 환경적 요인만으로 뛰어난 서스펜스를 뿜어낸다는 점이다. 확실한 안타고니스트 설정 없이도 꾸준히 클라이맥스까지 긴장 만점의 내러터브를 구축한 부분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훌륭한 안타고니스트 캐릭터는 관객으로부터 주인공만큼의 관심을 받는다. 그럼으로 작가는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안타고니스트의 목표와 내적 욕망이나 결핍,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깊이 연구해야 한다. 관객은 주인공과 맞서는 안타고니스트가 단면적 캐릭터에 그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플롯 생성을 위한 도구로만 쓰이는 안타고니스트는 영화 속에서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2) 주인공의 동지
  동지는 꼭 베스트프렌드가 아니어도 괜찮다. 누구여도 상관없으나 주로 주인공의 가까운 벗이거나 가족, 연인, 선후배, 사제지간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 인물 앞에서 주인공은 결코 다른 데서 드러내지 않을 자신의 가감 없는 모습을 드러낸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갈듯 강직한 주인공이 동지 앞에서는 눈물을 흘린다.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않을 진실을 말하기도 한다. 왜냐? 믿기 때문이다. 동지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약점과 두려움 등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밀양>의 종찬은 신애에게 언제나 힘이 돼준다. 그녀가 구박을 해도 그의 태도엔 변함이 없다. 아마도 영화 역사상 최고 ‘주인공의 동지’ 캐릭터 중 하나일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는 연인 영미로부터 커다란 위안을 얻는다. 사실 그녀 때문에 인생을 망치게 되는데도 말이다. 장기밀매 가족 세 명을 야구방망이로 때려죽이고 그들의 콩팥을 씹어 먹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류이지만, 그녀가 자신을 때릴 때 아무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얻어맞는다. 그리고 그토록 의지했던 영미가 죽었을 때 그는 삶에 관한 모든 애착을 잃어버린다.

 

  3) 사건 유발자
주인공의 운명을 바꿔놓는 원인 제공자다.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 때문에 주인공은 어떤 힘겨운 마찰과 대립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하고, 이후 그가 취하는 모든 선택은 플롯 생성의 도구가 된다. <밀양>에서 도섭은 신애의 아들 준을 유괴해 살해한다. 이 사건으로 신애는 헤어날 수 없는 불행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영미는 ‘주인공의 동지’요, 동시에 ‘사건 유발자’다. 그녀가 유괴를 제안하지 않았다면 류의 누나도 유선도 죽지 않았다. 더 나아가 류와 동진의 운명도 불행으로 마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더>의 도준도 마찬가지다. 그는 엄마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다. 하지만 그가 여학생 아정을 살해하는 바람에 엄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한 전투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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