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8] 총을 든 권력, 대중문화를 검열하다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8] 총을 든 권력, 대중문화를 검열하다
  • 오광수(시인, 경향신문 부국장)
  • 승인 2020.09.2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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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는 피었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 정권은 총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부의 총질로 견고하게 보였던 절대권력이 무너졌다. 박정희 시대에 문화는 늘 검열의 대상이었다. 자유로운 사고 속에서 창의적으로 태어나야할 문화와 예술이 늘 가위질을 당했다. 가위질뿐만 아니라 그 문화와 예술의 방향성도 권력의 통제 아래서 좌지우지됐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에는 검열이 일상적이었다. 원고검열, 기사검열, 영화검열 등은 물론이고 교련검열이나 대학교수들의 강의록도 검열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문화예술 분야의 검열은 영화와 가요, 드라마 등 전방위적으로 시행됐다. 영화에 대한 검열은 1973년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노골화됐다. 영화진흥공사를 신설하여 검열을 강화했다. 1975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시나리오 심의가 문공부에 사전 보고되도록 했으며, 1976년에는 공연윤리위원회가 만들어져 검열이 일상화 됐다.

  유신정권이 소위 국책영화를 장려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한국영화 3편을 제작하면 해외영화 1편의 수입권을 주면서 반공 영화나 정부 시책에 이바지하는 영화를 제작하도록 유도했다. 임권택 감독이 젊은 감독 시절 반공 영화나 새마을운동 소재 영화를 부지기수로 찍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임 감독이 연출한 새마을 영화 <아내들의 행진>(1974)의 마지막장면에는 느닷없이 무장공비가 등장한다. 이는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 윤주영의 압력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성웅 이순신>, <난중일기>, <세종대왕>, <율곡과 신사임당>, <호국팔만대장경> 등은 정부가 제작비를 지원했거나 외화수입 쿼터를 따기 위해 영화사가 제작한 작품들이다.

〈증언〉

  임권택 감독의 <증언>과 이만희 감독의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1억 원이 넘는 예산을 국방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파할 영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만희는 반공이 아닌 반전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의 편집권을 포기하면서 권력에맞섰으나 이후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그 당시 영화감독 하길종은 국가의 과도한 검열에 맞서서 영화에 검열의 흔적을 새겨뒀다. 그의 영화 <병태와 영자> 등에는 냉소적인 풍자가 곳곳에 숨어있어 영화를 보는 젊은 관객들이 대리만족을 느꼈다. 한 마디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으니 예술가들도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게 그 당시 정권의 논리였다. 1970년대 영화나 대중음악 등에 가해진 가혹한 검열과는 달리 한편으로는 선정성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대중들의 관심과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한편으로는 과도한 노동에 지친 국민에게 얄팍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하자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삼천만의 주간지로 불린 《선데이 서울》은 지금까지도 선정적대중잡지의 대명사로 통한다.

  선정적이고 외설적인 《선데이 서울》은 1968년 7월 각 신문사가 맺었던 주간지 발행 금지협약이 깨지면서 등장했다. 《주간중앙》 《주간경향》 《주간여성》이 잇달아 선보였다. 눈요깃거리가 된 여성 스타들의 비키니 화보가 등장하는가 하면 온갖 불륜과 엽기적인 사건을 다룬 기사들로 채워진 주간지가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대에 이데올로기적인 담론을 담은 시사지나 문학 잡지들은 어김없이 검열이나 탄압의 대상이 됐다. 섹스와 스크린, 스포츠로 상징되는 ‘3S정책’은 5공화국의 전유물 같지만, 실은 1970년대 《선데이 서울》에서도 충분히 적용됐다. 연예계 이면의 스캔들을 다룬 기사들이 도배되는 동안 대중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이수들로부터 관심이 멀어졌다. 그렇다면 검열의 총본산인 공연윤리위원회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공윤은 공연법 제25조 3항에 근거해 76년 설립됐다. 

 문화체육부가 위촉하는 위원장을 중심으로 임기 3년의 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했다.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화체육부 혹은 문화공보부의 충실한 집행기관이었다. 영화와 비디오 심의외에도 가요·음반 심의도 도맡아 했다. 특히 공윤은 많은 노래들을 금지곡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놓았다. 월북한 작곡가나 작사가들이 만든 노래들은 당연히 금지곡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금지곡 기준은 공안적 인 측면과 풍속적인 측면으로 나뉜다. 정치 권력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노래는 물론이고 퇴폐, 음란 등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노래들이 금지곡의 대상이었다.

〈병태와 영자〉

  대중음악인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신중현, 김민기, 이미자, 이장희 등이었다.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신중현의 노래는 통째로 금지됐다. 대표곡 <미인> <님은 먼 곳에> <빗속의 여인> <커피 한 잔> 등이 모두 대상 곡이었다. 그 이면에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하수인들이 정권을 찬양하는 노래를 주문했으나 거절한 데서 비롯됐다. 듣다 보면 건전하기까지 한 ‘아름다운 강산’도 그 대상이었다. 김민기도 피해자였다, 그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를 비롯하여 <아침이슬> 등 대부분의 노래가 금지곡으로 묶여서 방송을 타지 못했다. 당연히 레코드 매장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부산 출신 포크 가수 한대수의 노래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행복의 나라로>는 “지금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냐”며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음반까지 압수당했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는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섬마을 선생님>은 몇 구절이 일본 노래와 비슷하다며 금지됐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박춘석이 작곡한 <섬마을 선생님>은 일본 노래보다 앞서 만들어졌다. 이장희가 만든 <불 꺼진 창>과 <한 잔의 추억>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그건 너>는 반항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신중현이 만들고 김정미가 부른<바람>은 신음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창법이 저속하다고 금지곡으로 묶었다. 80년대 들어서도 검열에 걸려 금지곡으로 묶인 노래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심수봉의 <무궁화>는 국민을 선동할 수 있다면서 방송 하루 만에 금지곡으로 묶였다. 심수봉의 <순자의 가을>은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 이름을 노래로 부를 수 없다며 금지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 등 학생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은 대부분 방송을 탈 수 없었다. 왜 이토록 많은 노래가 금지곡으로 묶여야 했을까? 그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기준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심의 기준은 ▲국가안보와 총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 ▲외래 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 자학, 비탄 ▲선정적, 퇴폐적인 것 등이었다.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여있던 노래들이 햇빛을 본 건 90년대 들어서였다. 가수 정태춘은 음반 사전심의제도가 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1996년 마침내 음반 사전심의가 없어졌다. 그해 6월 대중음악인들의 법개정운동으로 ‘사전심의를 받아야 한다’에서 ‘받을 수 있다’로 바뀌었다. 어쨌든 금지된 것들이 사랑받던 시대는 결코 행복한 시대는 아니었다.

 

 

* 《쿨투라》 2020년 9월호(통권 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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