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탐방] 왕궁탑 앞에 다시 서다: 익산
[지역문화탐방] 왕궁탑 앞에 다시 서다: 익산
  • 진모영(영화감독)
  • 승인 2020.09.2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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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산문

  #1. 왕궁리 석탑

  30년 전, 해남 촌놈이 광주에 와 강의실보다는 아스팔트에서의 시간이 더 많았다. 화염병과 최루탄 냄새를 몸에 풀풀 묻히고 다니던 대학 시절, 남도불교 연구회(남불회)를 따라 익산 왕궁리 석탑에 답사여행을 온 적이 있다. 티셔츠에 청바지만 걸친 나는 신라에 나라를 뺏긴 백제 유민 같은 얼굴이었다. 그 탑은 의젓했지만 풀이 무성한 유적지는 폐허에 가까웠다. 긴긴 세월을 견딘 익산의 그 탑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해남 촌놈은 탑 앞에서 빌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땅의 민주주의와 함께 언제가 좋아하는 여인과 평화롭게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


  #2. 인심은 함열

  익산을 다시 온 것은 세월호가 수장되고 아이를 잃은 아빠 두 분이 자신의 몸 만한 십자가를 번갈아 메고 남으로 남으로 가는 어느 여름이었다. 2014년 장마가 오락가락할 무렵 서울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도보로 십자가 순례를 떠났을 때, 나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한창 편집 중이었다. 거기다 후속작인 <올드마린보이> 촬영에 들어가 동해와 서울을 동분서주하던 날들이었다. 마음만은 팽목항에 가 있던 나는 배낭 하나만 메고 호남선 열차에 올라탔다 . ‘인심은 함열’이라는 호남가(湖南歌)의 노랫말의 고장, 허균이 유배생활을 했다는 함열이 목적지였다.

  자그마한 함열역, 무궁화호 열차에서 내려섰다. 배에서 나오지 못한 학생들과 세상을 근심하는 익산의 많은 시민들이 자식을 잃은 아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김제 쪽으로 이어지는 23번 도로를 타고 일행에 합류하여 익산의 들판을 말없이 걸었다. 날씨는 덥고 습했고 이따금 폭우가 쏟아져 길가 처마에서 비를 긋고 가야만 하던 여름이었다 . 해가 저물 무렵, 일행은 만경강이 익산과 김제를 나누는 고가다리 아래서 내일을 기약하며 해산을 했다. 모두 현수막을 접고 자리를 떴다. 난감했다. 어딘지, 어디로 가야 여관이라도 찾을지조차 알 수 없었던 나는 잠시 어리둥절한 채로 길가에 서 있었다. 택시도 지나가지 않는 곳이었다. 모두 다 떠났을 즈음, 검은 SUV 한 대가 창문을 내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경찰은 아니었다. 그냥 선재동자라 해 두자. 나는 그의 차에 올랐다. 그는 비와 땀에 젖은 꾀죄죄한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으로 먹고사는가를 물었던 것 같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영화를 만들고 있기는 했지만 개봉한 적이 없어 감독이라고 하기도 거시기하고 이젠 TV 프로그램도 만들지 않으니 PD라고 하기도 거시기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다큐를 만든 감독이자 평론가라고 하였다. 우린 서로 더 깊게 파지는 않았다. 운이 좋게 <님아…>가 크게 흥행하고 나서 익산 시민강좌에 섰다. 상영회와 관객 대화를 하는 공간으로 익산에 오는 횟수가 많아졌다.

  #3. 눈을 멀리 두시라

  코로나 시즌. 완도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의 촬영을 마치고 편집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작가를 중심으로 한 ‘문학인과 함께 하는 백제역사 문화탐방’에 영화인인 나를 초청해 준 것이다. 이제 ‘인심은 함열’ 아니 ‘인심은 익산’이라고 고쳐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참에는 KTX로 내려왔다. 60분이 넘을까 말까한 시간이었다. 옛날에는 ‘이리’라 했다. 화약열차 폭발사고로 기억되는 시절도 있었다. 열차에 내려 익산역 서부통로를 지나 뒤편 구시가지의 골목을 걸었다. 모현동 ‘카페 키노’는 영화 내지는 영화관이라는 이름에 맞게 미장센이 좋은 카페였다. 카페에 들어섰을 때 선재동자는 정원 의자에 걸터앉아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소설가 황석영 선생이었다. 이런 인연이라니. 나는 선생께 조심스레 해남 촌놈임을 밝혔다.

  황선생님은 『장길산』을 연재할 당시의 해남 생활을 이야기하셨다. 요즘 치아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눈빛이며 말씨가 여전히 청년이었다. 선생은 익산에 머물면서 완성한 최근작 『철도원 삼대』를 이야기했다. 당신은 소설 속 ‘삼포 가는 길’의 마지막 장면의 정거장이 옛 이리역(현 익산역)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전라선과 호남선이 만나고 갈라지는 교통요지 이리(익산)라는 말씀을 들은 후, 우리는 원광대 곁 보건소 주위에 있는 식당에서 만두와 함께 냉면을 먹었다. 답사 일정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익산 숙소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잠이 잘 왔다. 새벽녘 유스호스텔의 창문을 열자 텃밭을 가꾸는 농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고개를 들어 멀리 보니 익산의 드넓은 벌판이 드러났다.

  그래, 이렇게 시원시원한 평야와 벌판의 선이 있는 고장이 익산이구나 생각했고 탐방하면서 굳어졌다. 내 영화의 팬이 있다면, 익산에 가시거들랑 부디 가끔은 ‘눈을 멀리 두시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영화 시작지점에서 롱테이크로 잡는 넓은 벌판처럼, 시원한 눈맛이 있는 동네라고. 북쪽으로는 미륵산이 터억 받쳐주고 남쪽으로는 만경강이 흐르니 편히 주무시고 가시라고.

  #4. 미륵사지와 다시 왕궁탑

  박남준, 유용주, 복효근 시인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모였다. 나도 말석에 끼었다. 탐방은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선선한 날씨와 소나기 속에 진행되었다. 비구름 속에 드러난 나바위성당은 로마네스크식첨탑에 한옥으로 서까래를 한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한국 천주교 수난의 역사를 증명하는 지형에 놓인 성당을 보며, 내가 상업영화 감독이라면, 여기 라이징 남녀 스타를 세우고 키스 신과 기도 신을 잡을 텐데, 라는 교만한 생각이 스쳐 갔다. 젊은 김대건신부의 고독과 치명(致命)의 거룩함을 떠올리며 미륵사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국보 11호 미륵사지 동탑 님은 단정했다. 쓰러져가는 탑에 일제가 시멘트를 부어 버티던 석탑 정도로만 기억되었는데, 간신히 몸을 추스리던 탑의 해체복원과정에 학계도 깜짝 놀랄만한 유물들이 쏟아졌다고. 미륵사의 장대한 규모를 상상할 수 있도록 서탑과 동탑이 균형감 있게 정비 조성되고 당간지주 앞에는 아름답게 연지(蓮池)가 놓였다. 조명경관을 두른 밤의 연지에는 두 개의 탑이 들어앉아 백제의 왕도였던 익산의 영화를 가늠하게 했다.눈에 띈 건 미처 조립하지 못한 채 박물관 뜰에 보존하고 있는 탑의 부재들 또한 영감을 주기에 충분한 풍경이었다. 듣는 이야기로, 이 동네 부잣집의 정원과 장독대 그리고 신작로를 만들 때 미륵사지 돌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니 참 서글픈 역사였다. 올해 오픈한 미륵사지 좌측에 새로 마련된 ‘국립익산박물관’은 그동안의 익산과 미륵사지에 대한 기억을 모두 바꿀 만큼 풍성하고 규모 있는 전시가 진행중이었다.

  #5. 다시 왕궁탑

  다시 30년 만에 왕궁탑 앞에 섰다. 정의를 외치던 청년은 이제 머리가 듬성듬성 빠지고 새로운 작품편집과 세상사에 머릿속이 복잡했었는데, 단숨에 개운해졌다. 백제왕궁 터를 순서대로 돌아보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저 멀리 전주 쪽 모악산을 바라보았다. 30년 전 폐허이던, 이곳이 2015년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한다. 왕궁탑이 자리한 백제의 정원에서 색소폰 연주에 이어 해금 소리가 연기처럼 풀어 헤쳐지는 저녁 공연을 감상하였다. 매주 토요일 상설로 열린다 했다. 백제야행 야간공연에는 (실내 영화관을 들르지 못하는)저녁을 일찍 드시고 산책하듯 들른 시민들의 모습이 편하게 다가왔다. 쓸쓸했던 30년 전 기억의 익산은 역사와 유적으로 품격있는 도시로 바뀌고 있었다. 성곽이 드러난 왕궁의 후원이 복원 중이었고 잔디밭이 깔끔했다. 무엇보다 함부로 짓지 않은 비어있음이 좋았다. 소나무는 단정했고, 미륵산이 굽어보고 있는 백제 정림사지탑을 닮은 왕궁탑 앞에는 배롱나무가 붉은 꽃술을 터뜨리고 있었다. 탑 앞에 섰다. 미륵님께 새 영화를 편집하고 있다고 고(告)했다. 미륵님! 부디 저 강을 건너지 마시고, 탑 앞에 선 화염병 던지던 해남 촌놈과 촌놈이 편집하는 영화를 왕궁탑 같이 굽어살펴 주소서.

 

 

* 《쿨투라》 2020년 9월호(통권 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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