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탐방] 인류의 새로운 고향으로 거듭날 자리, 익산
[지역문화탐방] 인류의 새로운 고향으로 거듭날 자리, 익산
  • 이광재(소설가)
  • 승인 2020.09.2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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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산문

  장소가 품은 꿈, 장소의 혼

  모든 장소에는 저마다 나름의 혼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도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죽어 묻힐 자리에도 신경을 쓴다. 심지어 왕가에서는 태를 묻을 곳마저 심사숙고하여 선택하였으니 실로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과하다 못해 병적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사람들은 명산으로 이름난 곳을 구경하기 위해 돈을 쓰고, 심지어는 외국의 기이하다는 풍경을 찾아가기도 하는데 이를 단순히 낯선 풍경에 대한 호기심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몽골의 거대한 민둥산이나 흰 눈을 화관처럼 머리에 인 백두산을 가까이서 바라본 자는 그 어떤 신령한 기운을 몸에 받아 안게 된다. 요동벌을 찾아가면 고구려의 강건함을 느끼게 되고 청산리 60리를 답사하면 국권회복을 위해 선혈을 뿌리던 사내들의 꿈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이 명산과 대천을 찾는 것은 건강을 챙기려는 목적 외에도 어떤압도적 존재에게 삶을 묻고 답을 듣기 위함이다. 그렇듯 장소에는 그곳만의 고유한 혼이 깃들어 있다. 장소에서 사람들은 꿈을 생각하고 혼을 받아들인다.

 

  익산의 혼, 미륵의 꿈

  익산 왕궁에 가면 백제 무왕이 축조한 왕궁과 제석사(帝釋寺) 터가 있다. 고대국가의 수도로 공인되기 위해서는 왕궁과 국가의 이념을 창조하고 전파하는 사찰, 왕궁을 둘러싼 성벽과 왕릉이 존재해야 한다. 현재 한반도 남쪽에서는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이 네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익산은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다. 바로 왕궁과 왕사인 제석사, 익산 왕궁의 성터와 왕릉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익산은 백제의 마지막 거처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익산 왕궁에는 어떤 혼이 깃들어 있을까. 백제의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후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였다. 그 옛날의 사비가 오늘날 부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가 다 그러한 연유를 바탕으로 한다. 이때의 부여는 저 만주 북쪽에 세력을 형성하여 한반도의 시원이 된 일대의 권역과 부족을 일컫는다.

  그 부여의 혈맥이 고구려에 닿았으니 고구려는 곧 후부여라 일컫게 되고, 따라서 백제가 남부여라면 이는 곧 후후부여이며 후고구려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시인 신동엽은 「진달래 산천」에서 빨치산이 죽어 넘어진 자리를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곳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왕의 법통을 이어받은 무왕이 다시 익산을 백제의 수도로 삼았다면 그곳은 마땅히 부여의 꿈을 실현코자 선택된 장소여야 한다. 그렇다면 부여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혹한의 계절을 뚫고 부여족이 찾으려 했던것은 밖으로부터 시달리지 않고, 다른 부족을 괴롭히지도 않으며,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그들이 그토록 좋아했다던 춤과 노래를 매일같이 추고 부를 세상이 아니었을까. 왕궁 인근의 제석사가 국가의 이념을 주관하는 왕사라면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미륵사(彌勒寺)는 백성의 소망을 품어 안은 백성의 공간이다. 무왕 부부의 미륵에 관한 깊은 염원이 미륵사 건립의 배경이라는 사실은 거기 얽힌 전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익산이라는 공간에 제석사와 미륵사가 지척에서 마주보고 있는 것은 둘의 꿈이 결코 다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백제의 꿈은 이웃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지배하거나 겉치장을 화려하게 하기보다는 사해가 미륵의 품에 드는 세상을 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소박하되 비루하지 않고 웅혼하되 잔인하지 않은 세계를 그들은 지향한다. 그런 꿈이 어느 순간 좌절될 때 그것은 장소의 혼으로 공간에 아로새겨진다. 성공은 성공으로 인해 실패를 잉태하지만 패배는 그 아픔으로 인해 꿈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미륵사에서 멀지 않은 금산사에 훗날 미륵불이 모셔진 것은 거리상의 근친성만으로 설명될 일이 아닌 것이다.

  동서고금이 융합하는 곳, 익산

  거기 미륵사지를 굽어보는 자리에 미륵산이 있다. 미륵산은 웅장하지 않지만 기상만은 백두대간의 여느 산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미륵사지에서 이마에 손을 얹으면 미륵산 팔부능선쯤에 들어앉은 사자암(獅子庵)이 아스라이 올려다 보인다. 사자암은 미륵산과 더불어 백제의 꿈이 왕궁과 제석사, 미륵사로 영글어가는 모습을 한 눈에 내려다보았거니와 훗날 해월 최시형(崔時亨)이 찾아와 수련을 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최시형이 누구인가. 수운 최제우(崔濟愚)의 법통을 이어받은 동학의 두 번째 교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씨앗을 뿌린 사람 아닌가.

  최제우의 죽음 이후 갖은 박해를 뚫고 충청도 보은에 기틀을 마련한 최시형은 마침내 그 뜻을 호남에 두고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기 꼭 10년 전인 1884년 사자암을 찾아 40일을 기거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지상의 만물이 저마다 하늘같은 존재(事人如天)라고 설파했던 그의 꿈이 광제창생(光霽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경세지략으로 싹트기 시작한 곳이 바로 사자암인 것이다. 그가 하필 그 심원한 꿈을 펼치기 위해 미륵산 중턱의 사자암을 선택한 것은 또한 장소의혼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런가 하면 미륵사지에서 차로 이십 분 거리에 들판을 굽어보며 서 있는 나바위 성당은 국내 최초의 천주교 신부 김대건(金大建)과 깊은 연원을 가지고 있다. 송시열(宋時烈)이 아름다운 산이라고 해서 화산(華山)이라 지었다는 곳에 건립된 나바위 성당은 1845년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금강을 거슬러 처음 발을 디딘 곳이다. 신분제를 비롯해 온갖 억압에 신음하던 조선 백성에게 평등의 복음을 들고 그가 첫발을 내딛은 곳이 미륵의 꿈이 깃든 곳이란 사실은 또 다른 장소의 혼을 깨닫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김대건은 박해와 감시 속에서도 평등의 세계관을 조선인의 가슴에 화인처럼 새겨 놓았으니 그것이 어찌 미륵이나 동학과 다르겠는가.

 

인류의 새로운 고향, 익산

  익산역이 호남선과 전라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라면 익산은 동서와 고금이 어우러져 용솟음하는 장소의 혼을 빚어낸다. 익산이 품은 장소의 혼은 개인의 구복과는 차원이 다른 인류의 거대한 꿈을 천둥소리처럼 환기시킨다. 금산사를 품에 안은 모악산이 모든 토착사상의 근거지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익산의 꿈이 영글어 이루어낸 사업이다. 한국사상의 정점에 서 있는 원불교가 익산에 본부를 두고 있는 것도 장소의 혼과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익산은 이 혼탁한 물질문명의 세계 속에서 밀알처럼 미래를 싹틔우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동서와 고금이 합작하여 융합하는 곳. 이미 익산은 인류의 새로운 고향이 될 거대한 꿈을 그 안에서 길러내고 있다. 그러니 태깔 좋은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도 좋지만 익산을 찾아 인류의 새로운 꿈을 몸으로 느껴보는 것은 어떠한가.

이광재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989년 무크지 《녹두꽃 2》에 단편 「아버지와 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 장편소설 『수요일에 하자』를 출간하였으며, 2015년 장편소설 『나라 없는 나라』로 제5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쿨투라》 2020년 9월호(통권 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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