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세상한테 지는 것"에서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으로: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 월평] "세상한테 지는 것"에서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으로: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0.09.2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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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한반도 최고의 비평가였던 임화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의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했다. 1930년대부터 최고의 소설가로 이름을 떨친 이태준은 1957년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문단에서 추방됐다. 이들의 존재는 한국문학사의 상처로 남아있다. 역사적 해석을 차치하고 둘의 삶만 비교해보자. 임화는 북한에서 권력투쟁에 패배한 직후 사형을 언도받았고 이태준은 인쇄공, 고철 수집 등으로 몇 십 년 더 살았다. 누구의 죽음이 더 불행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누구의 삶이 더 ‘비극적’이었는지를 묻는다면 답은 명확하다. 비극은 어떤 영웅이 성격적 결함이나 순간의 선택 때문에 한 번의 거대한 파국을 맞닥트린다는 구조의 서사이다. 그렇게 볼 때 임화의 삶은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서사시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태준은 몰락 이후에도 비참한 삶을 연명했다. 이것은 ‘비극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설적’인 이야기이다. 소설은 영웅이 될 용기나 기회가 없는 필부들이 온갖 세상의 부조리를 감내하면서 구차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우리에게 숭고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공감과 연민 내지는 통찰의 대상이 된다. 한국에서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혁명가들의 불꽃같은 삶을 다룬 평전 등이 꾸준히 나온 반면, 몰락 이후까지도 비참한 삶을 연명한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글은 드물었다. 그래서 김연수의 신작 『일곱 해의 마지막』(이하 『일곱 해』로 약칭)은, 역시 1930년대 최고의 문인 중 한 명이었지만 이태준과 유사하게 ‘소설적’인 삶을 살았던 시인 백석의 삶을 재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귀하고 반갑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백석은 당대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었고 현재 한국에서도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북한에서 얼마간 체제 옹호적인 시를 쓰기도 했고 소품에 가까운 동시들을 조금 발표하다가 사상비판을 받고 문필활동을 그만두었다. 지금까지도 북한의 문학사에서 백석의 이름은 누락되어 있다.

  『일곱 해』는 백석이 시를 쓰다가 중앙문단을 떠나게 된 시기(1957년부터 1963년까지)에 겪었을 법한 일들을 재구한다. 김연수의 역사소설이 항상 그랬듯, 이번 작품 또한 역사적 고증에 세심히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일곱 해』에 나온 이야기의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그러니까 부디 이 책의 내용 전부를 사실로 믿지는 마시길. 이 작품은 백석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기보다는 억압적 시대를 살다간 예술가의 내면풍경을 보여주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전체주의 시대의 예술가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곱해』는 『시대의 소음』(줄리언 반스)과 좋은 비교대상이 된다.(김연수는 반스의 소설을 많은 인터뷰와 추천사 등에서 극찬했다.) 『시대의 소음』은 스탈린 시대의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이야기이다. 그는 한번의 어처구니없는 우발적 사건으로 창작을 금지당한다. 작중에서 그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비판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반면 『일곱 해』의 백석은 억압적 시대 하에서 절필을 강요받았지만, 쇼스타코비치와 달리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지 않는다. 작중에서 그는 자신의 사회가 어떤 분위기인지를 잘 알지 못할 만큼 순진하거나 아예 그런 현실적 문제에 초연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중앙문단에서 추방될 때조차 자신이 쫓겨나는 이유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카프카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자신이 속한 세상을 불가해한 것으로 느낀다. 이런 인물들은 사회구조를 비판한다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처할 방안을 고민할 수 없다. 두 작품에서 묘사된 모습만 두고 비교해보자면, 쇼스타코비치가 억압적 상황을 인식하고 비판적 사유를 계속해나가지만 차마 저항적 행동을 할 수는 없는 유약한 지식인 타입이고, 백석은 너무나 순진무구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곱 해』의 작가는 백석을 그저 시대적 분위기에 휘말린 수동적 인물로만 그려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한 신문 인터뷰에서 김연수를, 자신의 소설 속 백석이 “체제에 순응하는 시 외엔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절필을 선택”(《동아일보》, 7월 8일)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진 않겠지만, 백석의 은둔과 절필을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의결과였음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일곱 해』를 보면, 백석은 절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더 많다. 가령 이 작품의 후반부에는, 백석이 북한문단의 유력자였던 한설야가 보낸 편지를 받고 자신의 복권을 제안한 것이 아닐지 기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백석이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창작으로 복귀하겠다는 순진한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요컨대 『일곱 해』는 백석의 절필이 정치체제에 의해 “강요”받은 사항이면서 동시에 자발적 “선택”이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혹자는 이런 태도가 자기기만 내지는 정신승리에 불과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치면 거의 모든 문학이 자기기만과 정신승리의 결과물이지 않을까. 근대문학은 사회적 구조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각자 존엄성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음을 느껴지게 만드는 제도이다. 백석은 언젠가 이런 시를 썼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짐작건대 여기에서 화자는 산골로 떠밀려간 상황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며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자위한다. 그런데 팍팍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만의 품위를 간직하고 살아가려는 그의 모습은 독자에게 처연한 감동을 안긴다. 『일곱 해』는 이와 유사한 구조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북한에서 백석은 “세상한테 지는 것”을 피하지 못한 패배자일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그가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을 택한 사람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마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추모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 《쿨투라》 2020년 9월호(통권 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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