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월평] B급 병맛 그로테스크 블랙 코미디: 〈두뇌수술2020〉
[연극 월평] B급 병맛 그로테스크 블랙 코미디: 〈두뇌수술2020〉
  • 차성환(연극평론가)
  • 승인 2020.09.2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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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극장 앞에 이상한 풍경이 펼쳐진다. 극장은 곧 오영호 외과의원으로 설정된다. 소사(小使) 한 서방과 간호부 순자, 옥자가 정문 앞을 지키고 섰다. 배우들은 얼굴에 하얗게 분을 바른 분장과 커다란 인조 속눈썹, 식민지 시대의 신파극에서 볼법한 양식적이고 과장된 연기와 말투로 시선을 끈다. 배불뚝이 여인과 혹부리 남자, 절름발이 남자가 의원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이들을 막아서면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오 박사가 세계 최초의 두뇌 교환 수술을 하기 때문에 외래진료는 안 하니 환자들은 돌아가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지 않았나. 길 한복판에 선 관객들은 어느새 구경꾼이 되어 이 상황을 즐긴다. 흡사 마당극의 경우처럼 관객과 배우의 소통이 가깝게 느껴진다. 배불뚝이, 혹부리, 절름발이는 관객들 사이를 헤집으며 동조를 얻고 선동하며 부추겨 진입에 성공한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관객들은 졸지에 오영호 의원에 들어가려고 떼쓰는 ‘환자들’이 되었다. 자 모두들 들어갑시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착석하자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된다. ㄴ자 모양의 무대 안에 배치된 객석은 독특하다. 객석 자체가 ㄴ자를 따라 마주앉게 되어 있어 맞은 편 관객의 얼굴을 가까이 봐야 하는 묘한 불편함을 준다. ㄴ자 아래쪽에는 또 한 줄의 관객석이 있다. ㄴ자 안의 공간에는 반신 거울과 조롱(鳥籠), 긴 의자가 있어 병원의 대기실로 사용되고 ㄴ자 바깥의 ㄷ자 공간은 복도로 활용된다. ㄷ자 오른쪽 위는 수술실과 병실로 이어지고 ㄷ자 오른쪽 아래는 병원의 출입구이다. 이 무대 배치와 구획은 꽤 매력적이다. 배우들은 이중으로 분리된 무대의 공간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관객들은 마치 가상의 벽면이 된 격으로 스스로 무대장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ㄴ자의 각각의 끝부분에 앉은 관객은 반대쪽에 벌어지는 일을 귀에만 의존해야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연극적 체험을 선사해준다. 이 낯선 무대가 심상치 않다.

  오 박사는 반편으로 태어난 부잣집 자제 ‘상도’와 총명하지만 가난한 시골 청년 ‘무길’의 두뇌를 교환하는 수술을 한다. ‘무길’은 반편이가 되고 ‘상도’는 정체성에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무길’의 애인 ‘인순’은 ‘무길’의 상태를 보고 오열한다. ‘무길’과 ‘상도’의 가족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이를 취재하러 온 ‘신문기자’가 의원을 찾으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소동극이다. <두뇌수술2020>(윤한솔 연출, 극단 그린피그)은 2011년 초연 이후 6번째 재공연하는 작품으로, 1945년 해방 직후에 쓴 진우촌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당시 ‘두뇌수술’이라는 파격적이고 신선한 소재이지만 작가는 이 엄청난 사건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지막 3막에서 서둘러 사회, 계급, 민족의식을 염두에 둔 듯한 두루뭉술한 계몽조의 결말로 봉합한다. 작가 본인이 글을 쓰다가 길을 잃은 형국이다. 원작에는 극의 전개에 불필요해 보이는 신파조의 독백에 가까운 대사가 많고 미흡한 극작술과 어설픈 결말 등등의 단점이 노출되어 있지만, 연출은 그 지점에서 반(反)연극이자 포스트연극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작가가 열어놓은 틈을 주제의식으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더 극단적으로 비집고 들어가 양식화한다. 그 빈틈을 낯설고 이질적인 감각과 B급 키치적 유머로 채워 독특한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상도’의 어머니가 특이한 억양과 제스처로 “상도야, 상도야”하고 부를 때, 오 박사의 말에는 신경도 안 쓰고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는 간호부 옥자, 오 박사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코를 골며 자는 간호부 순자(옥자와 순자는 둘이 바뀌어도 모를, 쌍둥이같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그러다 순자의 코 고는 소리에 한 서방의 대사가 방해받는 상황, 순자와 옥자가 폭주하는 상도를 잡아다 엉덩이를 까고 주삿바늘을 꽂으려 할 때(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냥 웃어버리기에는 불편하고 무섭다고 하기에는 황당하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이 극을 즐기고 있는 내가 이상하다. 이쪽 방향의 하드한 버전으로 영화 <록키 호러 픽처 쇼>나 김기영 감독의 영화가 연상된다. 짧게 처리되었지만 ‘두뇌수술’이라는 현대의학과 전통신앙인 ‘굿’이 충돌하는 과정도 여러모로 흥미로울 수 있는 소재이다. 3막에서 배우들이 미리 녹음된 대사와 효과음에 따라 연기하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스피커 소리에 싱크로율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조금 늦거나 빠르게 반응하면서 의도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문기자’는 마치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처럼 극의 전개를 논평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이 극이 어떤 불일치와 균열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

  <두뇌수술2020>은 낯섦과 불일치, 키치적 상상력으로 무장해 뚝심 있게 달려 나간다. 관객의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나갈 기세다. 원작의 흐름과 설정을 따라, 무엇보다 오버하지 않으면서 묘한 긴장을 유지시킨다. 지나치지 않는 게 미덕인 셈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복장을 한 ‘인순’의 총질과, ‘무길’의 정신을 가진 ‘상도’의 슈퍼맨 변신이라는 결말을 단순히 허무맹랑하다고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인순’은 자신의 사랑하는 애인 ‘무길’을 두뇌 수술시켜 죽음으로 몬, 백의(白衣)의 악당들을 향해 가열차게 총알을 날린다. 극은 원작에서 묻혀버렸던 ‘인순’의 감정선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황당하지만 전혀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무길’이 또한 ‘종달새’처럼 높은 하늘 황천으로 갔기에 ‘슈퍼맨’이 되어 돌아온다. 다짜고짜 고삐 풀린 상상력이 아니라 극의 내적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특히 조롱에 갇힌 ‘종달새’는 복선과 암시라고 하기에는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종달새’는 원작에서 ‘고향/정신’이라는 애매한 상징으로 쓰이고 연출도 이를 따라가는 모양새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천연덕스럽게 그건 아무 의미 없다고 오리발을 내민다. ‘종달새’가 무슨 의미일까, 집착했던 관객은 ‘슈퍼맨’ 앞에 당도해서 비로소 피식 웃게 된다. ‘종달새’는 관객을 헤매게 하는 미끼와 같다. 당신은 낚였다! 극 중 상도의 대사, “나는 미치는 것 같소. 나는 알아야겟소. 누구요. 내가 누구요”는 바로 관객이 뇌까려야 할 말이다. 젠장, 두뇌수술은 우리가 당했다! 두뇌 수술을 빗대어 하는 말일 테지만 “콩밭에 팥이 열리냐, 콩이 열리냐”며 팥, 콩을 주워 삼키는 한 서방의 대사는 도대체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대사는 의미 전달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자폐적 말놀이에 가깝다. 숫자를 세면서 손가락을 엉뚱하게 접는 ‘한 서방’이나 혼자 연극을 논평하기에 바쁜 ‘신문기자’ 또한 스스로의 놀이에 몰입되어 있다. 극 초반 간호부의 사랑 타령, 한서방의 신세 한탄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러한 대사가 길게 진행된다면 지루하겠지만 ‘두뇌수술’이라는 소동극 사이에 삽입되면서 낯설고 이상한 극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두뇌수술2020>은 의미가 아니라 형식이 전부인 연극이다. ‘컬트 연극’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기존 연극에 반하는 전복적 힘과 과잉된 퍼포먼스가 돋보인다. 극 속의 인물을 흉내 내고 따라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기이하고 불편하고 매혹적이다. 말놀이와 넋두리, 과장된 제스쳐, 코믹하면서 기이한 분장, 합창과 율동, 전체적으로 덜 다듬은 듯한 모양새 그 자체가 이 연극의 진정성이다. 극이 3막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우리의 두뇌는 조금씩 개폐되고 달뜬 얼굴로 실실 쪼개는 관객들이 생긴다. 또는 부작용인지 눈에 초점을 잃은 채 침을 흘리는 관객들이 속출한다. 텅 빈 무대에 ‘슈퍼맨’을 혼자 두고 집에 돌아간다면 당신은 둘 중 하나다. 식음을 전폐하거나 식욕이 좋아질 것이다. 나는 후자였다. 우리는 그동안 강박적으로 어떤 의미에 사로잡혀 연극을 본 것은 아닐까. 살아있는 연극을 박제시켜놓고 늘 익숙한 독법으로만 대한 건 아닌지 되묻게 한다. <두뇌수술2020>은 그 해방의 쾌감과 불안감 사이에서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연극은 놀이이다. 자유는 구하고 찾는 자가 얻을 것이다.

 

 

* 《쿨투라》 2020년 9월호(통권 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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