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내가 가난하지 않은데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어찌 알까?: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10월 Theme] 내가 가난하지 않은데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어찌 알까?: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 최창근(작가, 연출가, 배우)
  • 승인 2020.09.2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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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추억과 인류의 미래

  그때 우리는 젊었다. 젊음 하나로 온 세상을 녹일 수도 있었겠지만 장차 앞으로 무엇이 될지 모르는 불안한 청춘이기도 했다. 우리는 1990년대 초에 ‘전국 대학방송 국제작자 연합회’라는 대학방송국의 전국 조직에서 만났다. 아니, 전국의 대학방송국PD들이 모여 방학마다 언론 선전학교를 열고 미래의 예비 언론인들을 키워나갔다. 물론 공정하고 올바른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각자의 마음에 품고서.

  세상은 1980년대부터 이어지던 학생운동의 끝 무렵이었지만 여전히 엉망이었다. 노동운동을 독려한다는 영화상영(그 영화는 <파업전야>와 <전함 포템킨>이었다)을 막기 위해 교정 안으로 전경들이 치고 올라와 최루탄을 쏘아대고 그에 맞대응해서 화염병을 날리던 시대였다. 80년대가 아니라 90년대였는데도 학생들은 집회나 시위에 나가 전경들의 과잉진압으로 죽거나 부상을 당하기 일쑤였고 노동자와 농민들은 자신의 한 몸을 불살라 꽃처럼 분신하던 시절이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아주 먼 옛날의 일이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길로 흩어졌지만 문학을 전공했던 나와는 달리 친구들은 대부분 방송이나 영화 쪽을 지망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언론 쪽에는 별 관심이없었다. 교내 방송국에 들어갔던 것도 신문사나 방송국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음악이 좋아서였으니까. 대학시절의 전부가 방송국 생활이었기 때문에 학과보다는 방송국에 죽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시절은 또 영화의 시대였다. 전공 분야는 달랐지만 모두들 영화에 관심이 있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감독의 이름 한두 사람 정도는 기본으로 꿰고 있었다. 어쩌면 1990년대 자체가 폭발적으로 넘쳐나는 대중문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예술영화 상영관이 생기고 일반인들이 보기 힘든 영화들이 시네마테크를 통해 상영되기도 했었다. 영화전문지인 <키노>나 <씨네21> 같은 잡지부터 <상상>이나 <리뷰>, <이매진> 같은 문화잡지도 등장했고 <서브>나 <아트록> 같은 음악 전문지도 생겨났다.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열혈 문화청년으로 하릴없이 떠돌던 무렵 우리들(신문방송학을 전공했던 기철과 영호 그리고 나)은 남쪽에 있는 우리들이 좋아하던 항구 도시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전해 들었다. 아니, 풍문으로 접했다기보다는 영화제 자체가 이미 우리 사이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때 이미 우리는 삼성 영상사업단에서 주최했던 서울 단편영화제에서 임순례와 문승욱 같은 이름을 듣고 있었다. 게스트로 초대된 정성일이나 유지나, 김홍준, 변영주 같은 당대의 영화광들이자 영화인들을 눈앞에서 마주치기도 했었다.

  영화제가 열리던 첫 해인 1996년 가을 우리는 배낭을 꾸려 무작정 그 남쪽 도시로 떠났다. 말 그대로 삼인행(三人行), 가슴속에 열정만 간직한 순수한 청년들이었다. 청량리역에서 부전역까지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를 타고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저녁 무렵 도착했지만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영화제가 열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음은 기대와 흥분으로 설렜고, 구름을 탄 것처럼 붕 떠 있었다. 즐거운 캠핑에 빠질 수 없는 도구, 바닷가에서 잘 생각으로 텐트를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해운대역에 내려 개막식이 열린다는 요트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던 수영만으로 갔더니 이미 개막식은 중간쯤 진행되고 있었다. 티켓도 이미 매진됐기 때문에 야외상영관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를 뱅뱅 돌며 극장에서 들려오는 사회자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개막식에 이어 개막작인 마이크 리의 <비밀과 거짓말>이 상영되는데 우리 중의 누군가가 바로 바닷가로 내려가 텐트를 치자고 했다. 머리가 총명하고 유쾌한 유머를 구사했지만 반항아 기질에 아웃사이더적인 감성이 다분했던 기철이었다.

  해변으로 내려갔더니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을 포함해서 운이 없게도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가을 저녁의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면서 9월을 즐기는 낭만파들이었다. 우리가 텐트를 다 칠 즈음 갑자기 밤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모두들 입을 딱 벌리고 하늘에서 터지는 푹죽과 수십 만발의 불꽃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개막작을 보지 못하는 서운함이 눈 녹듯 스르르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정말 내려오길 잘했다는 흐뭇함과 뿌듯함이 밀려왔다.

  개막작이 끝나고 개막식에 참석한 관객들과 영화인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해변으로 쏟아져 나오기까지 우리는 무슨 말들을 그렇게 했던 걸까. 근처 슈퍼에서 사온 삼각 김밥과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영화와 사회 그리고 세상을 떠도는 금기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나. 그날이 마침 금요일이었고 13일이었기 때문에 ‘13일의 금요일’에 관한 징크스에 대해서 침을 튀기며 열을 올렸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물론 13일의 금요일과 연관된 세상의 각종 영화가 불려 나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밤 10시가 넘어서 뒤늦게 바닷가로 나온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새벽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그날 해운대 바닷가에 모여든 것 같았다. 우리는 캔 맥주 몇 개를 마시고 피곤한 탓이었는지 자정이 넘어 새벽 한시쯤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때까지도 초저녁처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다음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난다.

  다음날 아침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떠 텐트 밖으로 나왔더니, 세상에, 그 넓은 바닷가에 텐트를 친 사람들은 우리뿐이었다. 다들 근처에 미리 숙소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책 없기로 유명한 세 사람은 숙소를 잡을 생각을 아예 하지도 못했던 것. 공용세면장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텐트를 접고 나오는데 우리 옆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킥킥거리며 주고받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야, 걔들 누구야? 간밤에 바닷가에 텐트치고 잔 사람들.” 이어지는 명랑 쾌활한 악동들의 웃음소리. 비웃음이 아니었기에 얼굴은 화끈거렸지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점잔을 빼며 해운대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개막일의 화제는 그 유명한 영화감독도, 배우도 아닌 우리였다. 그 넓은 바닷가에 유일하게 텐트를 치고 잔. <씨네21>에서 매일 발행하는 영화제 소식지(BIFF)에 첫날 우리가 친 텐트의 사진이 실렸던 것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해운대를 떠나 영화관이 몰려있던 남포동으로 가서 무대 인사를 하고 있는 안성기와 강수연, 심은하 같은 배우들의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근처 자갈치 시장에서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우리 또래의 젊은이들이 부산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영화제에 호기심을 갖고 영화제 내내 극장과 광장을 오가며 맘껏 청춘의 특권을 누렸다. 말 그대로 자유와 해방 그 자체였다.

  방송국 PD가 되려했던 기철은 그 후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 찍은 단편영화로 2000년에 처음 생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더니 지금은 아주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하고 있고, 영호도 부산영화제에서 최우수단편영화에 주어지는‘선 재상’을 받고 나서 여전히 무시무시한 독립예술영화를 꾸준하게 찍고 있다. 이제 다들 그 분야에서 경력이 쌓인 중견이 된 셈이다. 문학으로 시작했다가 어쩌다 우연히 연극판에 뛰어들어 몇 편의 희곡을 쓰고 연출을 했던 나는 최근에서야 디아스포라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을 찍고 있고 단편영화 몇 편도 감독하고 있다. 가까운 친구들과 후배들의 영화에 한 씬 배우나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세상의 모든 일은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을 품고 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는 듯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그 일을 즐기면서 맘껏 누리는 태도나 자세가 인생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문학과 연극을 돌아 뒤늦게 영화에 재미가 들려 한 편 두 편 찍고 있는 지금의 나의 생활은 지천명의 물리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피 끓는 청춘이다. 문학 십 년, 연극판에 이십 년 몸을 담았으니 앞으로 남은 삼십 년은 영화를 꾸준하게 찍어볼 작정을 하고 있다. 물론 마음의 고향이 문학이니 연극을 해도 문학적인 연극, 영화를 해도 문학적인 영화가 될 게 자명하지만.

  부산엔 친구도 많고 여러 인연으로 자주 가게 되는 편이지만 이상하게도 부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부산국제영화제인 것은 첫 번째로 열렸던 영화제에 대한 추억 때문일터. 그동안 부산영화제도 나이가 들면서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었고 나 역시 매년 꼬박꼬박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그 후로도 몇 번 일로 혹은 휴가차 부산영화제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약속을 안 해도 이제는 동료가 된 영화감독들과 배우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게 되니 어느새 시간이 참 많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때문에 영화제가 축소되고 야외행사는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해외영화인들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겠지만 올해도 부산에서는 25회째, 사반세기를 맞는 영화제가 열리고 사람들은 축제를 보러 갈 것이다. 내가 가난하지 않으면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는 말처럼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문화는 분명 달라질 테지만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살 듯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나, 되돌아보게 되는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는 계속되고 인류의 삶도 지속될 터이다. ‘부산’이라는 고유명사와 함께 그렇게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세계의 시민으로 거듭나고 있다.

 

 

* 《쿨투라》 2020년 10월호(통권 7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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