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안녕 부산, 안녕 나의 소녀시절!
[10월 Theme] 안녕 부산, 안녕 나의 소녀시절!
  • 김경희(방송작가 겸 소설가)
  • 승인 2020.09.28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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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역

  고백건대, 나는 일탈을 몇 번쯤 해봤다. 일탈이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어떤 조직이나 사상, 규범으로부터 빠져 벗어남 이라고 나온다. 덧붙여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청소년 비행 따위가 있다고도 적혀 있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내가 몇번 해본 그것들은 일탈이 틀림없다. 다만 나는 일탈이란 자기애에서 비롯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에서 나온 행동일수도 있다.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인생에서 몇 번쯤은 말이다.

  내 인생에서 꽤나 파격적이었던 일탈의 순간은 스무 살을 코앞에 둔 열아홉 살 끝자락이었다. 당시 내 일탈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실상 부산이 어디쯤 붙어있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당시 중년이던 아빠가 가끔 흥얼거리던 ‘울며 헤어진 부산항’이라는 흘러간 노래처럼 그곳은 도무지 나와 상관없는 아득히 먼 도시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부산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그 무렵 나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한 상태였다. 공부에 취미도 없는데 대학에 가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미용을 배우는 편이 낫겠다고 주장했고 (하물며 미용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부모님은 대학은 나와야 한다며 강경대응의 자세를 취하셨다. 결국 회초리를 든 아빠와 맞서던 나는 자의식의 발현으로 일탈만이 살길이라고 느꼈다. 집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가능하면 잡히지 않을 곳으로 가야한다는 절박함도 생겼다.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기에 정보가 변변치 않았던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서울역에서 출발한 기차의 종착지가 부산이라는 것 정도였다. 서울 외곽, <응답하라 1988>속 쌍문동의 옆 동네인 수유동에 살던 내가 집을 벗어나 끝까지 달려가고 싶던 곳은 그렇게 운명처럼 부산으로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스무 살을 코앞에 둔 열아홉의 몹시 추운 겨울밤, 출발 10분을 남기고 부산행 막차에 올라탔다. 한숨 돌리며 차창에 비친 얼굴을 쳐다보는데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기차는 밤새 달려 새벽 5시 무렵 부산역에 도착했다. 부산역 앞 긴 경사로에는 비둘기 떼가 무리지어 있었다. 누구나 과거를 떠올릴 때 결정적 순간으로 남은 몇 장면이 있을 텐데 내게는 그날의 기억이 그렇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실감하며 밤사이 수척해진 얼굴과 푸드덕 거리며 사방으로 날아가는 비둘기 떼, 그리고 시청률 몰이를 하던 드라마 <모래시계> 테마곡이 울려 퍼지는 비탈길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던 기억 같은 것들 말이다. 1995년 1월, 짙게 깔린 새벽안개를 가로지르며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부산이라는 도시에 발을 내딛었다. 대기에서는 상쾌한 바람과 비릿한 생선 냄새 같은 게 났다. 스무 살도 안 된 애송이였지만 나는 이런 혼란스러움이 말도 못하게 좋았다.

  # 부산 영화제

  사람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지금도 나는 출발 시간이 임박해서야 겨우 역에 도착하곤 한다. 방송작가 일을 17년 정도 해오면서 인터뷰나 자료 조사 일로 기차 탈 일이 많은 편인데 언제나 10분 정도를 남겨두고서야 역에 도착하는 일이 잦다. 2019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 취재차 다시 부산행 기차를 타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는 것, 그것만큼 설렘을 주는 일이 또 있을까? 게다가 목적지가 부산이라면 취향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게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뮤직 앱에 접속해 부산에 관한 노래를 몇 곡 검색했다. 최백호 아저씨가 피처링한 에코브릿지의 ‘부산에 가면’을 플레이 시켜놓고 창밖 풍경을 휴대폰 카메라에 몇 장 담았다.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으니까 허세 사진 몇 장을 업로드하는 순간 기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십오 년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구나. 어디로 가는지, 얼마만큼 왔는지도 모른 채 지금 타고 가는 부산행 기차처럼 그저 달려온 것뿐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동시에 잠시 후 기차가 부산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무심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짐을 챙긴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역 밖으로 밀려나왔다. 일단 허기를 달래기 위해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돼지국밥 대신 양산국밥 한 그릇을 비웠고 부산영화제의 메인 행사가 있는 영화의 전당으로 향했다. 역시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영화제라는 공간은 참 희한한 데가 있다. 한손에는 영화 팸플릿을 들고 또 다른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재밌는 건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도 왠지 동료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택시에 외국인 승객과 동승한 적이 있는데 그 찰나의 시간에도 영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잠시 후 야외무대 앞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고 뒤이어 무대 위로 배우들이 등장했다. 영화의 전당을 가득 채운 인파 속에서 ‘자, 이제 영화의 세계로 빠져 들어볼까?’ 라고 외치며 나는 급격히 에너지가 상승되는 것을 느꼈다. 욕망의 불나방이면 뭐 어떠랴. 여기는 부산 아이가?! 남들 보다 한발 앞서 화제작을 선점해 볼 수 있다는 쾌감, 마지막 상영이 끝나면 밤바다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며 영화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람들, 이 도시 대체 뭐지? 바다와 영화, 그리고 거품 가득한 맥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산은 뭔가 몽환적이다.

  # 해운대, 서면, 육교 앞 레코드 가게

  부산 음식들이 입맛에 꼭 맞는다기보다는 여행지에선 이상하게 과식을 하게 된다. 이번 일정에는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아무 곳에나 들어가 백반 같은 걸 먹기도 했고, 밀면에 흠뻑 빠져 흡입하듯 먹어치우기도 했다. 특히 영화의 전당 근처에서 맛본 밀면은 택시기사님이 알려준 곳인데 역시나 현지인 추천은 믿을 만하다. 돌아섰는데도 자꾸만 생각이 나서 다음 날 일부로 찾아가서 한 번 더 먹었다.

  부산 영화제 3일차, 늦은 오후 해운대로 향했다.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몇 명의 아이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십대 후반의 여학생들 같았다. 중년이 되면 볼 빨간 아이들이 그렇게나 부러워진다더니 내가 꼭 그 꼴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 동네, 서면이 떠올랐다. 이십오 년 전 일탈을 감행한 열아홉 살의 소녀가 부산에 발을 디디고 처음 찾은 동네가 서면이었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집되기 마련인지라 내가 왜 서면이란 곳을 찾아갔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내가 서면에서 무려 2주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 오롯이 혼자라는 판단을 하고 달 방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먹고살까 고민하다가 서면의 한 레코드 가게에 취직했다는 것 정도다. 나는 문득 그 레코드 가게에 가보고 싶어졌다. 당시 일탈이 다소 치욕스럽게 끝나버린 실패한 쿠데타(?)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가능한 떠올리지 않으려 했고, 부산에 오더라도 가능하면 서면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당장 그곳에 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처럼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스를 잡아타고 서면으로 향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산동네에 자리한 집들이 풍경처럼 지나갔다. <다큐3일>같은 프로그램에 나올법한 동네였다. 그런 풍경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왜 그런지 오래전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막상 도착한 서면은 내가 알던, 아니 기억하던 서면이 아니었다. 대로변 근처에 커다란 육교가 있었고 그 아래 위치한 작은 레코드 가게였는데 현실에는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 그곳에서 드라마 <모래시계> 테마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팔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육교와 레코드 가게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 몇 명에게 육교와 레코드 가게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갈 길을 갔다. 아무도 이십오 년 전의 나를 증명해 줄 수 없었다. 부산도 변하고 서면도 변하고 나도 변한 지 오래였다. 영국밴드 eKane의 노래 <Everybody’s Changing>이 떠올랐다. 모두가 변해가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그래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니까.


  # 다시 부산역

  누구나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돌아갈 곳이 있으면 길은 얼마든지 잃어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일탈이란 무엇인가? 어떤 조직이나 사상, 규범으로부터 빠져 나오거나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청소년 비행 따위라고 사람들은 쉽게 정의 내린다. 그런 면에서 내가 해온 것들은 일탈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일탈이란 자기애에서 비롯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항로에서 크게 벗어나 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인생에서 몇 번쯤은 말이다.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기차 시간이 삼십분 정도 남아서 부산역 앞에 지어진 거대한 어묵 가게에서 기름진 어묵 서너 개를 집어 들고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샀다. 기차가 부산역을 출발하면 맥주와 어묵을 먹을 요량이었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어묵과 맥주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부산#어묵#맥주#부산에가면#너를만날수있을까
짙게 깔린 새벽안개와 비장함이 감도는 모래시계 테마곡 ,
푸드득 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지던 비둘기 떼와 상쾌하고 비릿한 생선 냄새 ...
이제는 그것들에 안녕을 고한다.
안녕 부산! 안녕 나의 소녀시절

 

 

* 《쿨투라》 2020년 10월호(통권 7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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