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Theme] 떠나간 시간의 음(音)
[10월 Theme] 떠나간 시간의 음(音)
  • 백이원(소설가)
  • 승인 2020.09.28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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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은 물론이고 큰집에 놀러 와본 건 처음이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술 냄새와 온갖 음식 냄새, 열한 평짜리 주공아파트가 소화하기엔 다소 많이 들어차 있는 인간들의 온도로 집 안의 공기는 내내 텁텁했다. 몇 시쯤이나 됐을까. 저녁 밥상이 술상으로 바뀔 즈음부터 잠을 청했는데 술상 자리가 어른들이 누울 이부자리가 되고 뒷정리를 끝낸 큰어머니가 거실 불을 끌 때까지 열두 살의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내일이면 부산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 그전에 그것을 한 번만 만져보자 싶은 것이다.

  형제가 십 년 만에 모일 장소는 부산이어야만 했다. 겸사겸사로 최적의 도시였다. 이 도시에 형제의 맏형인 큰아버지가 살고 있었고 인천에 터를 잡은 내 아버지는 부산에 와본 적이 없으니 여행 삼아 오기 좋았다. 무엇보다 부산이라면 이들의 막내 형제가 단 하루만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고 하니 부산이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보내온 여느 밤과 다를 것 없이 이곳의 밤도 고요했다. 태종대와 해운대, 자갈치 시장 등지를 다녀오긴 했으나 잠깐의 눈요기였을 뿐 어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 머물며 상봉의 술잔을 나눴다. 나는 어른들의 술자리로 집에 갇혀 있던 대부분의 시간을 그것을 탐하는 데 썼다. 온몸의 신경을 집중시켜 강렬하게 욕망했다. 그것의 등장은 별다를 것 없던 부산의 풍경에 커다란 문을 하나 새로이 그려놨다. 나는 그 문밖으로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에 재주가 있던 막내삼촌은 일본에 있었다. 만화를 그려보고자 갔지만 현실은 후쿠오카의 모 호텔에 근무하는 접시닦이였다. 나라 밖을 벗어난다는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았던 열두 살의 나에게 삼촌의 도항과 귀항은 삼촌이 그린 것보다 훨씬 더 만화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부산은 그게 가능했던 도시였다. 그렇게 만화의 한 장면처럼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배편을 타고 삼촌은 도착했다. 엄청난 물건을 품에 안고 말이다. 파나소닉(Panasonic)에서 만든 붐박스였다.

  철물점에 가서 도란스를 사 오너라. 나와 사촌 한 명이 뛰어나갔다. 도란스가 무언지도 모른 채 헐레벌떡. 파나소닉의 붐박스를 작동시키려면 변압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도란스의 진동음과 함께 과연 붐박스의 전원이 켜졌고, 딸려 온 조막만 한 리모콘을 누르자 둥글넓적한 타원형의 머리가 가로로 갈라지며 뚜껑이 스르륵 올라가더란 말이다. 그 속에 숨겨진 두 개의 카세트테이프 데크와 연노란 빛을 뿜어대던 액정, 허리춤에 박힌 파나소닉 심볼 밑으로 혀 내밀 듯 뱉어내던 시디 투입구, 리모컨으로 돌리면 맞춰지는 라디오 주파수, 곳곳에 쓰여 있는 일본어까지.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부산 나올 땐 붐박스 정도는 짐이 안 된다며 삼촌은 멋쩍게 웃었다. 삼촌은 그것을 내년이면 중학생이 될 조카에게 선물했다. 나와 한 살 터울이 지는 사촌이었다. 주인이 정해짐과 동시에 타인이 그것에 접근하는 일이 전면 봉쇄됐다. 물론 주인의 짓이다. 애가 닳았다. 조르고 졸라 내가 맡은 역할은 도란스의 전원을 켜는 일이었고 리모컨 조작과 테이프 투입 등 고급조작은 사촌이 했다. 더럽고 치사한 기분에 돌아섰다가도 어느새 나는 도란스 옆에 앉아 마침맞게 전원을 탁탁 올리고 내려주었다. 나와 아닌 연애라도 지켜주고 싶은, 붐박스를 향한 지독한 짝사랑의 현장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이 물건의 출발과 도착의 여정을 상상하면 심장이 울렁거렸다. 부산바다가 수평선 너머의 땅으로 뻗쳐있다 생각하니 그저 아연한데, 그 아득함을 건너온 물건은 언젠간 나도 그 항해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해외(海外)는 말은 말 그대로 해외, 바다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고 부산 바다에서 시작된 길을 따라 사람과 기술과 경험, 아마 사랑까지도 오갈 수 있겠다는 것을 지각한 것이다. 내가 알기 전부터 세계는 이미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고 1905년부터 부산과 일본을 잇는 부관연락선이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참 뒤 고등교육을 받으며 알게 되었지만, 나에게 있어 국경이 허물어진 순간은 붐박스와의 조우였고, 세계관을 확장시킨 깨달음은 학습이 아니라 도란스의 진동음을 느끼던 손가락에서 왔던 것이다.

  몇 시쯤이나 됐을까. 모두가 잠든 부산의 마지막 밤, 깨금발로 문턱을 넘고 등허리로 벽을 쓸어가며 붐박스를 찾아 나섰다. 이것과 독대하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나는 조심스럽게 도란스의 전원부터 올렸다. 전류가 흘렀고 진동하는 도란스에 붐박스의 110볼트 코드를 꽂았다. 그리고 드디어, 드디어 뭐라도 눌러보면 되는데 아무것도 누를 수가 없었다. 정작 조작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도란스 이마에 손가락을 올렸다 떼었다 하며 음- 음- 하고 진동하는 소리를 오래도록 들었다.

  그 밤 이후로 이십여 년이 훌쩍 흐른 지난해, 부산여객터미널을 이용해 일본에 가야 하는 일거리가 생겼다. 해외로 나가는 여정으로 부산출발은 처음이었다. 문득, 그 밤이 떠올랐고 나는 어쩐지 유효기간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여권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나라의 사증이 찍혀있었다. 머릿속에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각국을 선으로 연결했다. 곡선이 아닌 직선으로. 공중이 아닌 바닷길로.

출항 5분 전,
승객을 태운 고속선이 엔진을 데우느라 작게 진동했다 .
음-
음-
하며.

 

 

* 《쿨투라》 2020년 10월호(통권 7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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