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시조집 '흰 꽃, 몌별'
이토록 시조집 '흰 꽃, 몌별'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20.09.2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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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심층의 언어가 그려간 완미한 정형 미학

은유의 힘으로 써내려가는 시조단의 무서운 신인

이토록의 첫 시조집흰 꽃, 몌별!!

 

2017년 백수문학상 신인상과 2018년 천강 문학상 시조대상을 수상한, 시조단의 무서운 신인, 이토록 시인의 첫 시조집흰 꽃, 몌별이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4부로 나뉘어져 총 63편의 신작 시조를 수록한 이토록의 첫 시조집 흰 꽃, 몌별은 우리 시조단의 새로운 창신(創新)을 제안하는 적극적 참조항이자 매우 개성적 목소리를 담은, 주목할 만한 미학적 성과이다. 그의 시조는 견고한 정형 율격에 다양한 현대성을 도입해야 하는 현대시조의 형식적, 내용적 요청에 최대한 부응하는 정서적 모더니티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정형 미학의 고갱이를 첨예한 형식적 절제 의지로 표현해간 그의 시조집은 그 점에서 우리 시조가 맞닥뜨리고 있는 과제들에 대한 정공법적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언어는 그동안 현대시조가 의존해왔던 부드럽고 안정적인 화해 지향의 에토스를 넘어, 일상의 페이소스와 현실적 중압을 포괄하는 직핍(直逼)의 사유를 훤칠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일견 완미하고 일견 거침없는 언어와 형상을 통해 가장 낮아진 시선으로 세계의 심층을 들여다본다. 그가 시조단의 신인이라는 것을 잠시 잊게 할 정도이다.

 

처연한 결기에 가까운 깊이 모를 아득함

시조를 포함한 서정시는 인간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성찰을 지속적으로 수행해가는 양식적 본령을 거느린다. 이토록의 시조는 이러한 기원추구와 시간탐색의 과정을 일관된 서정의 원리에 의해 펼쳐간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의 시조에 사물의 세목을 재현하고 그 안에서 삶의 시간성을 덧입혀 가장 근원적인 삶의 이법(理法)을 노래해간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정서는 처연한 결기에 가까운 깊이 모를 아득함이다.

 

꽁꽁 언 저수지에 새 한 마리 박혀 있다

 

세상을 빠져나갈 출구인 줄 알았을까

저 새는

깨진 부리로 비명에 쩡, 금을 냈다

 

둑방길 억새들도 머리채 잡혀 떨고

목숨을 헹구어 낼 커다란 대야 하나

 

흰 눈이 회오리치며 찬 주검을 덮는다

 

계절이 막다른 곳 허공에 빗장 걸듯

한사코 막아서는 이 악문 표지 아래

 

한 줌인 새의 무게가 그 깊이를 더했다

― 「깊이를 더하다전문

 

이 작품의 문맥은 결빙된 겨울 저수지에 부리를 박고 죽은 새 한 마리에 대한 관찰의 결과이다. 그곳이 출구였을 리는 없었겠지만, 새는 부리를 깨뜨리면서 자신의 비명에 금을 내는 순간을 맞았을 것이다. 둑방길 억새들도 떨고 있고 커다란 대야처럼 놓인 저수지에 흰 눈이 새의 주검을 덮는다. 계절이 막다른허공에 한 줌 새의 무게가 깊이를 더하는 장면이야말로 가장 정적(靜的)인 계절 한복판에 가장 깊고 처연한 시인의 마음이 투사(投射)된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바깥으로 나가려다가 그것이 좌절되면서 비롯된 새의 결기이기도 할 것이지만, 깊이 모를 아득함으로 더해오는 시인 자신의 실존적 전율의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전율은 딱 한 줄 말줄임표로 숯이 되어 다문 입”(겨울이 일찍 오는 마을)이나 나무의 맨살을 뚫고 떠오르는 꽃 한 척”(노란 잠수함)처럼 견고한 고요함으로 일렁이는 처연한 존재자들을 선명하게 환기한다.

 

삶의 은유, 사랑과 이별의 제의를 통한 항존의 상관물

이처럼 우리가 이토록의 시조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운 언어적 권역은 2인칭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 있다.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 안에 웅크리고 있는 애틋한 기억을 찾아 나서면서 시인은 지금의 자신을 가능하게 했던 지점을 인생론적 성찰의 현장으로 옮겨간다.

마지막 눈송이가를 읽어보면 당신은 눈송이처럼 이마를 부딪치며 의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이라는 차폐물이 그 열망을 가로막고 있지만, “오래 전 닫아둔 마음이 금 가는 순간, 사랑의 열망은 눈썹 끝에 떨고 있는 보풀 같은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려준다. 떨어져 흔적도 없는 마지막 눈송이는 그렇게 소리만 소복소복 유리창에 남긴 채 허공을 떠돌 뿐이다. 이때 시인이 불러보는 당신눈감으니 몸 안에 향이”(향어) 나거나 발등에/향유를 쏟았던/네 안의 검은 언덕”(언덕 위의 십자가)처럼 온몸으로 맞아들이려는 절실한 대상으로 몸을 바꾼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의 불가능성만 확인하게 되고, 온기처럼 남은 기억을 통해 사랑의 흔적을 환하게 밟아갈 뿐이다. 따뜻하고 흔적 없는 기억들이 그 사랑을 한없이 돋을새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라서

색 없이 몸을 섞나

솔기 터진 소매 끝에 보풀처럼 소복한 꽃

꿈인가

이마를 짚자

미열이 또 일었다

 

놓칠 수가 없는 생

한 울음 끊어질 듯

훗승이여 괜찮다 타고난 몸 붉다 해도

그 심장 가슴에 묻고

흰 손 저리 흔들거니

 

꽃 다비 끝난 계절

행여 다시 놓칠세라

동살에 흰 불 이는 상고대 가지 꺾어

이승은

당신 붙드느라

색을 다, 놓친다

― 「흰 꽃, 몌별(袂別)전문

 

이제 시인은 소중한 2인칭과 몌별을 한다. ‘몌별(袂別)이란 소매를 잡고 헤어진다는 뜻으로 지극한 서운함을 담고 있는 말이다. 이번 시조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솔기 터진 소매 끝에 보풀처럼 소복한흰 꽃으로 상정된 당신을 향해 미열울음을 부여해간다. 물론 한 울음 끊어질 듯심장을 가슴에 묻고 손 흔드는 모습을 통해 시인은 이승과 훗승을 넘나들며 당신을 붙드느라 색을 다 놓쳐버린 상실감을 토로한다. 그러한 몌별 제의(祭儀)한세월/꽃만 더듬다/발자국을/다 놓친 발”(다시 쓰는 헌화가)처럼 안타까움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포괄하는 순간일 것이다. “어쩌다 빛깔을 얻어 사라지게 되었을”(사랑한다는 말) 순간들에 대한 지극한 애착과 그럼에도 심장을 가슴에 묻고 손을 흔드는 애착 너머의 사랑이 읽는 이들의 가슴을 울린다. 이처럼 시인은 사랑과 이별의 대상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보여주면서 그 기억의 과정이 곧 삶의 은유임을 설파해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2인칭에 대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기억과 이별의 심미성을 경험하게 되고, 시인은 사랑과 이별을 삶에 대한 해석의 상관물로 원용하면서 2인칭으로 하여금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시인의 삶에 항구적으로 연루되는 항존(恒存)의 상관물로 존재하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토록의 시선은 동시대의 타자(他者)를 향한다. 원래 서정적 발화는 개별 발화로서 근본적으로 독백적 성격의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서정시는 시인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되새기고 나아가 그 시간에 절대치에 가까운 의미를 부여하는 특성을 배타적으로 지닌다. 시간이 남긴 흔적이야말로 시인 자신의 삶을 암시하는 형식일 것이고 서정시를 이루어가는 중요한 내질(內質)이 되는 것이다.

가난은 쓸고 닦아도”(월동, 가천체로 쓰다) 지워지지 않지만 숱한 시절의 통점”(맹인 안마사)을 사랑의 힘으로 건너는 그들만의 도하(渡河)가 눈물겹게 그려진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렇듯 시인이 공들여 구상화하고 있는 음역(音域)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구체적 존재자들의 삶의 양상에 대한 섬세한 인식과 표현에서 발원한다. 그는 시조를 통해 한 시대의 심부(深部)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어법을 꾀하면서, 오랜 흔들림 끝에 가닿는 정신적 공감과 정서적 연대의 가능성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이처럼 동시대의 타자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연민하는 이토록 시인의 시선과 목소리는 우리 시조의 외관을 넓히는 중요한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은유의 힘으로 써내려가는 아름답고 깊은 잠언과 자의식

또한 우리는 이토록의 첫 시조집에서 시조에 대한 아름답고 깊은 잠언(箴言)과 자의식을 내밀하게 만나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장르적 메타 의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압축과 긴장의 미학을 옹호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물론 압축과 긴장의 미학은 서사나 정서가 들어차 있던 곳을 일정하게 비워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조를 읽는 이들은 그 비워진 터에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이입하여 행간에 숨은 것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 점에서 그의 시조는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의미를 함축하는 쪽에 서 있다.

 

어디서 흘러왔나 저 써늘한 문장들

얼음장 밑 물소리 이를 무는 치운 섣달

계절은 잠든 붓 깨워 눈보라로 일어선다

 

울음조차 굳어 버린 내 시의 행간에는

발목 빠진 침묵들만 흰 뼈를 두드릴까

써늘히 뒷목을 잡고 뜬 눈으로 지새운 밤

 

몸을 떨며 장을 넘긴 선생의 지부상소

곡기 끊은 조선 선비 옷고름 고쳐 맬 땐

날이 선 도끼 한 자루 옆구리를 스쳤다

― 「면암을 읽는 밤전문

 

면암(勉庵)은 최익현의 호다. 시인은 국권 회복에 힘쓴 그분의 써늘한 문장을 읽으면서 얼음장 밑 물소리와 함께 섣달 눈보라가 잠든 붓을 깨우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정작 자신의 작품은 울음도 굳어버리고 발목 빠진 침묵들만이 흰 뼈를 두드리고 있을 뿐인데, 그분이 올린 지부상소는 지금도 날선 도끼처럼 자신의 옆구리를 스치며 서늘한 충격과 깨달음을 준 것이다. 이때 지부상소(持斧上疏)시인 이토록의 궁극적 자기실현을 가능케 해주는 궁극적 지남(指南)으로 각인된다. 그렇게 면암을 읽는 밤은 시인에게 천 개의 물음들이 한 신음에 터질 듯”(독거에 들다)한 순간을 선사하고 있고, 나아가 불타는 얼음의 말 몸을 깨서 전하는 날”(우박에 관한 몇 개의 비유)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다.

시조를 향한 그의 자의식은 저변을 한없이 넓혀나간다. 한라산 구상나무를 대상으로 하여 서늘한 절필의 순간을 노래한 위의 작품도 그러한 자의식에 바쳐진다. 그렇게 고사목에 비추어 스스로를 사유한 시인은 뼈를 깎는 뉘우침으로 골각체를 만들어간다. “산세가 험할수록 더 쩡쩡한 산울림을 통해 필화가 되어 눈 퍼붓는 한라산에 선 것이다. 이때 간결하고 흰 뼈만 내리 꽂는 뻣센 반골의 획이야말로, 면암의 지부상소처럼, ‘시인 이토록을 예리하고 단호하게 만들어가는 은유적 힘일 것이다. 붉은 동백꽃이 낙관처럼 가슴에 찍히는 과정을 통해 시인은 내 안이 어두웠다 눈을 못 뜬 별빛 같은”(석류) 미학적 순간을 탐색하면서 묵음의 긴긴 편지 맨몸으로”(목간(木簡)) 받아들이는 자기 성숙의 순간을 발견해가는 것이다.

결국 이토록 시인은 시조에 대한 철저한 자의식 아래 그에 상응하는 쓰기의 은유를 빌려가는 궤적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삶의 보편성을 환기하는 장치를 상정한 후 거기에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투영하는 과정을 붙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존재론적 자기도취로 흘러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구체적 상황을 질료로 삼으면서도 그 안에 갇히지 않고 쓰기의 정신을 통해 삶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존재론적 충동을 토로해가는 것이다. 그 과정이 단연 묵중하고 또 진정성으로 넘친다.

이처럼 이토록 시인은 자신의 사유와 감각을 응축하고 비본질적인 맥락을 가능한 한 배제하는 시조 미학을 완성해가고 있다. 최근 변격이나 일탈 형식이 채택되곤 하는 경향에 비추어 이러한 그의 시조 미학은 우리 시조단에 중요한 감계(鑑戒)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초월과 암시를 주음(主音)으로 삼으면서 응축의 미학을 구현해가는 그만의 완결성은 앞으로도 귀중한 미적 권역으로 그 중요성을 지켜갈 것이다. 일상의 페이소스와 현실적 중압을 포괄하는 직핍의 사유를 담아낸 그의 시조는 이처럼 존재론적 심층의 언어를 통해 정형 미학의 한 축도(縮圖)를 빼어나게 그려냈다. 이는 그의 첫 시조집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뒤따르기를 바라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은유의 힘으로 써내려간 시조단의 무서운 신인, 이토록 시인의 첫 시조집흰 꽃, 몌별의 행간을 읽으며, 그의 낯설고 서늘한 메타포와 한번 대면해보자.

 

<추천사>

시조는 현대시이되, 선험의 형식을 따른다. 그렇다고 그 형식에 얽매여서는 정형미학의 새로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조가 추구하는 미학의 진실은 새롭되 자연스러움을 이루는 데 있다. 이토록은 감성과 감각의 견고한 결속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시인이다.

흰 꽃, 몌별은 온통 몸의 말’, ‘몸의 정서. 몸은 목숨의 다른 이름이요, 드러난 마음의 표정이다. 거의 전편에 등장하는 몸 이미지는 발바닥/발등에서 무릎-엉덩이-가슴/늑골-/어깨, 손과 목울대를 거쳐 얼굴에 이른다. 얼굴에서도 귀와 입-혀와 잇몸-눈썹과 이마를 샅샅이 훑는다. 그의 사유는 몸의 안팎을 무시로 넘나들며, 맨몸-맨살-맨발-맨손으로 분화한다. 이는 존재에 대한 성찰인 동시에, 생존의 고뇌를 직시하는 일이다.

이토록은 깨진 부리로 비명에 쩡, 금을낸 한 마리 새의 주검을 통해 출구 없는 생의 비극을 관통한다. 유명의 경계에 한 줌인 새의 무게가 그 깊이를 더했다는 것은 놀라운 발상이다. 이 같은 인식은 놓칠 수가 없는 생”, 그러나 당신 붙드느라/색을 다, 놓친하릴없는 몌별의 정서나, “말랑한/혀조차 굳는/어둑한/생의 저녁”, 냉장고 문짝의 포스트잇에서 당신이/차려 놓고 간/사무치는/시 한 편을 읽는 의외의 반전으로 이어진다.

남몰래 아이를 지운/마리아가 우는 밤”, “집은 또/산목숨 잡는/한 채의 통발일 뿐”, “나무의 맨살을 뚫고 떠오르는 꽃 한 척등은 통념을 깨트린 사유의 낯섦이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의 생존에 밀착한다. 그러면서 시절의 통점들을 짚고, 관념이 아닌 촉수로 세상을 읽는다. 타자 혹은 이웃의 삶을 좇는 이 대목은 흰 꽃, 몌별의 분명한 착목점이다. 일테면 맹인 안마사’, 접골원 앞에 꼬부라진 노인’, 지하셋방 날품팔이’, 편의점 알바’, ‘비정규직’, 게다가 불러 줄 이름도 없이, 어이 거기 인턴들!”까지. 그는 그렇게 뭇 발자국 다 받다가 움푹물웅덩이가 되는 것이다.

이토록의 시조는 혀끝에/붉게 달군 말이요, “한 소끔 끓어 목울대가 뜨끈생각이다. “책갈피/다 뜯어낸 채/엎어놓은 백서들인가 하면, “몸밖으로 쏟아진 한 자루의 비명들이기도 하다. 현대시조가 그의 자질과 역량에 거는 기댓값이 크다. “세상이 캄캄해지우주의 먼 별이 오리니!

- 박기섭(시인)

 

<책 속으로>

여기 수 많은 상자들이 있다

나는 천천히 상자를 열어보고 있는 중이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모르긴 해도 그곳에한 세계가 들어있을 거라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 많은 상자 중 하나에는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시인의 말부분, 5

 

당신이 내 안으로 들어오려 했던 걸까

이마를 부딪치는 창밖의 눈송이들

오래 전 닫아둔 마음 사방천지 금이 간다

 

소름을 쓸어내도 떨칠 수는 없었구나

눈썹 끝에 떨고 있는 보풀 같은 기억들

다시는 추운 겨울로 돌아가지 않으련다

 

몸 없이도 아팠을까 떨어져 흔적 없는

소리만 소복소복 유리창에 내려 앉아

벗어 둔 한 벌 허공이 내복처럼 따뜻하다

― 「마지막 눈송이가전문, 본문 40

 

마을버스 언제 오나

길은 다시 출렁이고

식구들 입이 먼저 일터로 향하는데

의자에 나뭇잎 한 장

공후처럼 앉았다

 

아이 업은 아내는 고삐가 매여 있고 막일로 돈 벌러 갈 인력시장 사내들은 오늘도 허우적대며 어디로든 건너간다

 

반지하 들창 너머

기웃대던 길고양이

허기를 퉁겨내듯 바짝 마른 젖을 켜면

계단이 바닥을 밟고

반음계로 떠오른다

― 「다시 쓰는 도하가전문, 본문 84

 

끝끝내 저 나무는 색에 들지 않는다

바람에 끝을 벼린 바늘잎 세필로는

격문은 쓰지 않겠다 붓을 꺾은 고사목

 

뼈를 깎는 뉘우침이 골각체를 만든다

산세가 험할수록 더 쩡쩡한 산울림이

오히려 필화가 되어 눈 퍼붓는 한라산

 

세상에 맞서려면 저렇게 간결하라

살점은 다 버리고 흰 뼈만 내리 꽂은

저 뻣센 반골의 획이 가슴팍에 박힌다

― 「절필 - 한라산 구상나무에 바침전문, 본문 63

 

시누대 마당비를 독필처럼 움켜쥐면

손가락 깨물어 쓸 필생의 결구 하나

세한의 저 소나무가 신열처럼 뜨겁다

 

군말을 뽑아내고 수사도 쓸어내어

백지로 드러나는 저작의 흙마당에

몽당비 돌부리 밀듯 턱턱 차는 숨소리

 

억새풀 서걱대는 비백 같은 울타리 밖

갈필의 바람소리 온 몸에 필사할 즈음

마당가 붉은 동백꽃 낙관처럼 찍힌다

― 「마당을 쓸다 - 추사 적거지에서전문, 본문 64

흰 꽃, 몌별 차례

 

시인의 말

 

1부 세상이 캄캄해져야만 우주의 먼 별이 온다

깊이를 더하다 13

맹인 안마사 14

플라스틱 트리 15

양철지붕에 내리는 싸락눈 16

황사 17

겨울이 일찍 오는 마을 18

수화 20

노란 잠수함 21

휴머노이드 22

헛제삿밥 23

노을 속으로 24

비의 약전 25

독수리를 찾아서 26

목간 27

우박에 관한 몇 개의 비유 28

물웅덩이 29

 

2부 당신이 내 안으로 들어오려 했던 걸까

쭉정이 33

지금은 간신히 34

언덕 위의 십자가 35

어제의 일 36

사랑한다는 말 38

마지막 눈송이가 40

소리도 없이 울겠지만 41

석류 42

드라이플라워 43

골목과 미명이 만나는 시간 44

향어 45

넝쿨장미 46

하구에 이르다 47

상강의 이별 48

한통속 49

치유 50

 

3부 어디서 흘러왔나 저 써늘한 문장들

53

다시 쓰는 헌화가 55

누정의 꽃 56

읍성에서 한 시절 58

면암을 읽는 밤 59

흰 꽃, 몌별 60

늙은 뱀 62

절필 63

마당을 쓸다 64

, 제련 65

월동, 가전체로 쓰다 67

겨울, 산가서 68

독거에 들다 69

느티나무집 71

싸리나무약사 72

 

4부 생각이 한소끔 끓어 목울대가 뜨끈하다

쇠뿔 75

혼백처럼 눈발이 77

국수를 기다리다 78

심야버스를 타는 하루살이 79

0시의 편의점 80

화분을 갈며 81

집에 대하여 82

다시 쓰는 도하가 84

냉장고 문짝에 노란색 포스트잇 85

칸나 86

포니를 타고 가다 87

발굴 88

로드킬 90

휘발유 91

물가에 놓인 신발 92

낙화유수 94

 

해설 / 존재론적 심층의 언어가 그려간 완미한 정형 미학_ 유성호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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