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 길을 걸으면 길이 다시 시작된다: 박노해 사진전 〈길〉展
[Gallery] 길을 걸으면 길이 다시 시작된다: 박노해 사진전 〈길〉展
  • 이정훈(객원 기자)
  • 승인 2020.10.08 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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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면Gondar, Ethiopia, 2008.

에티오피아 고원에 바람이 불어오면
아이들은 어디로든, 어디로든 달려 나간다.
초원을 달리고 흙길을 달리고 밀밭을 달린다.
허기를 채우려는지 온기를 찾는 것인지
소년은 소녀를 만나고, 친구는 친구를 부른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내 영혼은 달려 나간다.
어디로든, 어디로든, 그리운 네가 있는 쪽으로.

  2020년 오늘, 세계가 재난 상황이라 한다. 재난disaster의 어원은 ‘떨어지다’라는 뜻의 dis와 ‘별’이라는 뜻의 astro가 합쳐진 ‘별이 떨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더는 나아갈 길이 없고 희망이 없는 처지가 바로 재난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역사상 처음으로 78억 지구 인간이 동시에 공포에 휩싸인 강렬한 체험. 실시간으로 목도한 세상 끝의 풍경. 사람이 사람에게 공포가 된 ‘불가촉 세계’의 날들. 세상이 일제히 멈추고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人間의 길’이 끊긴 지금, 그럼에도 우리는 길을 걸어야만 한다. 더 속 깊은 만남으로 나누고 모이고 얼굴을 마주 보며 생생히 살아야 한다.

  자기 시대의 진실을 보기 원한다면 멀리서, 거슬러 올라가 봐야한다. 현재로부터의 거리가 확보될 때, 오늘의 세계가 가는 방향이 보인다.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길을 찾아 걸어온 나의 유랑길은 실상 ‘길을 잃는 일’이었다. 나는 기꺼이 길을 잃어버렸고 비틀거리며 헤맸다. 길을 잃어버리자 길이 내게로 걸어왔다.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계획이 아니다. 내 삶의 목적지다. ‘나 어떻게 살아서는 안되는가’에 대한 확고한 원칙이다. 그 첫마음의 불빛은 생의 최종 목적지에 놓여 나를 비추고 있고, 내가 가야만 할 길을 가리키고 있다. 나머지는 다 ‘여정의 놀라움’과 ‘인연의 신비’에 맡겨두기로 하자. ‘계획의 틈새’와 ‘비움의 여백’ 사이로 걸어올 나만의 다른 길을 위해.

  - 박노해 사진에세이 03 『길』 서문 중에서

  시인 사진작가 박노해의 사진전 〈길〉展이 서울 자하문로 ‘라 카페 갤러리’에서 9월 1일부터 열린다.

“무엇이 이토록 지친 나를 걷게 하는가. 사랑만이 나를 다시 걷게 한다. 나는 사랑 안에서 나를 잃어버린다.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그러면 사랑이 어디론가 나를 데려다주리라. 나를 향해 마주 걸어오고 있는 너에게로, 아직 내가 모르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로. 나만의 빛나는 길은 잘못 내디딘 발자국들로 인하여 비로소 찾아지고 길이 되는 것이니.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는 박노해 시인은 지난 20여 년간 지구 시대의 유랑자로지도에도 없는 길을 걸어왔다. 이번 〈길〉 사진전에는, 다양한 길 위의 풍경과 삶이 담긴 37점의 흑백사진과 이야기가 펼쳐지며 우리를 저마다의 ‘다른 길’로 안내한다.

  저 높은 안데스 고원길과 인류 최초의 문명길인 차마고도, 눈 덮인 만년설산과 끝없는 사막길, 정겨운골목길과 아름드리 나무숲길, 노동자들의 설레는 귀향길과 할머니의 마지막 순례길,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이 먼 길을 걸어 모여든 ‘길 위의 학교’, 길마저 끊긴 분쟁의 땅과 눈물 흐르는 지구의 골목길까지….

  박노해 시인의 흑백사진 속 ‘세계의 길’을 함께 거닐며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져보자.

하늘까지 이어진 밭On the way to Pisac village, Andes Mts., Peru, 2010.

‘하늘까지 이어진 밭’이라 불리는 ‘안데스’ 고원.
만년설산의 흰 기침이 선득 이마에 닿는 아침,
눈바람 사이로 눈부신 태양이 길을 비춘다.
지구의 저 높고 험준한 고원에서 차빈Chavin 문명과
나스카Nazca 문명 그리고 잉카Inca 문명을 일군 사람들.
수천 년 된 안데스의 고원 길을 걸어갈 때
맨발로 이 길을 내어온 발자국 소리가 울린다.
지상의 무거운 중력을 이고 지고 걸어 오르는
안데스 농부들의 하늘 걸음이 울려온다.

혼자 남은 할머니가Jhansi, Uttar Pradesh, India, 2013.

긴긴 세월 부부가 함께 끌어온 수레바퀴.
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 혼자서는 바퀴를 굴릴 힘이 없지만
그래도 도와주는 손길이 있다.
슬픈 얼굴로 바라보는 내게 할머니는
오렌지 세 알을 쥐어주며 등을 토닥인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아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선하고 의롭게 살아온 이에겐
세상 끝에서도 친구가 기다리니.
자신을 잃지 말고, 믿음을 잃지 말고
그대의 길을 걸어가라.’

키 큰 나무 사이로Cusco, Peru, 2010.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울었다.
내가 너무 작아서, 내가 너무 약해서,
키 큰 나무 숲은 깊고 험한 길이어서.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웃었다.
내 안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하고 고귀한 내가 있었기에.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며 나는 알았다.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어온 사람이
키 큰 나무 숲을 이루어간다는 걸.
‘키 큰 나무 사이를 걸으니 내 키가 커졌다.’

  ‘얼굴없는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노해 작가는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다.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부 가까이 발간된 『노동의 새벽』은 한국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옥중 시집 『참된 시작』(1993년),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1997년)를 출간했다.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되었으며,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2000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의 길을 뒤로하고 생명 평화 나눔을 위한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www.nanum.com )를 설립했다.

베두인 소녀On the way from Kassala to Al Qadarif, Sudan, 2008.

아프리카 북부 사막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은
핏속에 바람이 들어있어 바람이 부는 곳으로
태양과 별의 지도를 따라 한평생 유랑하며 살아간다.
보아주는 이도 없는 모래먼지 날리는 사막에서
고운 옷차림으로 일을 하던 소녀는
“베두인 여자의 아름다움은요
낙타의 강인함과 풀잎의 온유함이에요.”
사막의 초생달 같은 가슴 서늘한 눈빛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어디에 살든지, 무엇을 하든지,
강건함과 총명함과 다정함이 인간의 기품이 아니겠는가.

  2003년 이라크 전쟁터에 뛰어들면서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 등 가난과 분쟁 현장에서 평화활동을 이어왔다. 2010년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로 기록해온 사진을 모아 첫 사진전 〈라 광야〉展과 〈나 거기에 그들처럼〉展(세종문화회관)을 열었다. 304편의 시를 엮어 12년 만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다. 2012년부터 나눔문화가 운영하는 좋은 삶의 문화 공간 ‘라 카페 갤러리’에서 글로벌 평화나눔 사진전을 상설 개최하고 있다. 2014년 아시아 사진전 〈다른 길〉展(세종문화회관) 개최와 사진집 『다른 길』을 출간했다. 2019년 〈박노해 사진에세이〉 시리즈의 첫 작품인 『하루』를, 2020 〈박노해 사진에세이〉 02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03 『길』을 펴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자급자립하는 삶의 공동체인 ‘나눔농부마을’을 세우며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있다.

 

 

* 《쿨투라》 2020년 9월호(통권 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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