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틀로부터의 해방, ‘평등세상’을 온라인 화폭에 펼치다
[INTERVIEW] 틀로부터의 해방, ‘평등세상’을 온라인 화폭에 펼치다
  • 손정순(시인, 본지 발행인)
  • 승인 2020.10.08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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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의 파노라마 4080 온라인展〉을 개최하는 정경연 작가

  홍익대학교에서 길고도 짧은 40년, 80학기의 대학교수 생활을 마무리하며, 정경연 작가가 <틀로부터의 해방 - 장갑의 파노라마 4080展>(2020년 8월 26일~9월 2일)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모든 오프라인 일정이 취소되어, 유튜브와 SNS를 이용한 온라인 전시(2020년 9월 18일~12월 31일)로 전환하였다는 소식을 접하며, 홍익대학교 홍문관 5층에 자리한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겹겹이 쌓아놓은 화집과 논문들 등 이사준비로 분주한 그의 연구실은 작가이자 교수로 살아온 40년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었다.

  유학 시절 어린 딸이 타국에서 고생하며 공부하는게 애처로워 어머니가 보내주었다는 면장갑 한 상자에서 시작된 ‘장갑작가’ 정경연 교수의 영감은 자유로운 일탈과 변주로 이어졌다. 그는 특정 장르의 틀에얽매이지 않았다. 장갑은 ‘세상을 보는 창’이며 ‘창작의 원천’이었다. 그는 장갑이란 한 가지 소재로 섬유·회화·조각·판화·비디오·설치 등 현대미술의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 탁월한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면장갑 안으로 손이 들어가면 사람들은 모두 평등한 대상이 되듯이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고 평등하게 만들었다. 모노톤 작업을 비롯한 종교와 세대 간의 화합을 기원한 설치와 비디오 작업, 그리고 다양한 색채와 재료로 일상적 소품을 입체화한 근작까지 작가는 집요함과 흔들리지 않는 작가정신을 투사했다. 그리하여 세상이 하나가 되는 ‘일상적인 오브제의 조형화’에 성공한 정경연 작가를 만나 그의 작품세계와 은퇴 후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전업 작가로서의 계획을 들어보았다.

Untitled 90-D, 200X290cm, Dyed on Cotton Gloves, 1990

  면장갑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자 작품의 뿌리

  손정순(이하 손) 안녕하세요? 교수님, 40년 정든 연구실을 떠나시기 전에 이곳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코로나19 시대에 온라인 전시로 전환한 것은, 참으로 앞서가는 기획이며 선례로, 매우 유익한 전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 제목이 <장갑의 파노라마 4080전>인 것을 보면 교수님께 ‘장갑’이라는 소재가 무척 특별한 의미로 느껴지는데요. 장갑이라는 모티브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정경연(이하 정) 네 그렇습니다. 저는 홍익대학교 미술 대학 재학 시절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한 후 197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타지에서 유학과 결혼생활을 하던 1975년, 서울에서 저의 어머니께서 정성을 담아 보내주신 한 뭉텅이의 면장갑이 소포로 왔어요.

  낯선 타지 생활과 고된 작업으로 딸의 손이 상할까 걱정스러워 보내주신 면장갑을 하나 끼워보며,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습니다. 그 장갑 속이, 이것이 얘기하던 정말 평등이구나. 어려운 사람이나 많이 가진 자나 결국 그 목장갑 속에 들어가면, 모두가 평등해지는… 그 평등이라는 사상을 배웠어요. 동시에 장갑 한 켤레에 모든 부모의 기도하는 손과 구멍 난 장갑에 어린 노고와 뜨거운 가족사랑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어떻게 이렇게 수많은 의미와 감정을 한 켤레의 장갑이 담아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의 다양한 애환과 노고가 담긴 그 ‘손’과 ‘장갑’에 단숨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제 머릿속에서 많은 깨달음을 안겨준 이 ‘장갑’의 모티브는 떠나지 않았고 작품으로 이어졌습니다.

어울림 07-73(Oullim 07-73), 72.7X60.6cm, Mixed Materials & Techniques on Canvas, 2007

  손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인 창작배경의 스토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섬유 미술을 접하게 되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동양화와 서양화를 모두 작업했습니다. 대학은 응용미술과로 입학하였지만, 조각과 회화, 순수미술 등을 고민하던 미국 유학 중 많은 조형작업들을 접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섬유라는 것에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섬유미술 장르의 영역을 허무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섬유미술 범주에 얽매이지 않고, 조각과 설치, 영상, 판화, 회화까지 나아갈 수 있었고, 제 작품에서 미술의 모든 장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손 작품의 제작과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는지요?

  작품 제작은 기본적으로 한 개의 면장갑을 4~5개 영역으로 나눠 각각 염색 또는 채색해 여러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후 이루어집니다. 저의 작업은 나의 화두이자 도반이며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참뜻을 따르듯 작업합니다. 창작은 수행의 일환이며 종종 <반야심경>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작업을 진행하다보면 다른 작업의 모티브나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작업을 멈추지 않아야 영감도 계속 떠오르죠, 저는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작업에 몰두하며 지속된 영감을 얻습니다.

Untitled P04, Installation, Mixed Media on Korean Paper, 2004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다

  손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표현 기법을 사용하시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섬유 예술을 전공하였지만 소프트한 질감을 제대로 알려면 하드한 질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조각을 부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전공 파괴, 경계 파괴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이 왕성한 탓일까요? ‘장갑작가’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저는 그동안 수많은 재료로 다양한 실험 작품을 해왔어요. 장갑 뿐 아니라 종이 작업과 판화, 공예, 설치 미술, 조형, 디자인 동·서양화로 작업해왔습니다.

  순수예술을 함과 동시에 패션운영위원회장과 텍스타일디자인협회장도 맡고 있듯이 저에게 ‘장갑’이라는 것은 동양화가에게 화선지, 서양화가에게 캔버스, 조각가에게 있어서 브론즈와 돌과 같이 작업 표현의 도구입니다. 앞으로도 특정 장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에 맞는 혼합재료와 혼합 기법을 쓰며 정해진 개념의 틀과 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손 특정 장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정해진 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아티스트의 길이 아닐는지요? 교수님의 변주와 일탈을 응원하겠습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님으로서 작품활동의 병행이 힘들진 않으셨는지요?

  제 삶을 작품과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교수로서는 교육이라는 것이 기능이나 테크닉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작품에 더욱 열심히 매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잠 밖에 줄일 게 없었습니다. 스물여섯 살에 처음 교수가 되어 교단에 섰는데, 교수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출입을 거절당했던 첫 출근길이 기억납니다. 벌써 40년의 세월이 지났다니 ‘인생은 유수流水와 같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어울림 2019-15(Oullim 2019-15), 146.0X113.0cm,
Mixed Technique & Mixed Media & Dyed Cotton Gloves on Canvas, 2019

  손 대학에서 40년간 80학기를 교수로 역임하셨는데요, 제자들에게 특별히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유행을 뒤쫓아 가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파는 작가가 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하다보면 언젠가 좋은 결과가 찾아올 거라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인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유행을 따르지 않고 내가 하고 있는작품에 진실하고 순수하게 다가서야 합니다.

  손 40년의 교수생활을 돌아보면 아쉬운 점은 없나요?

  아뇨,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되돌아보니 감사한 사람들과 감사한 시간들뿐입니다. 40년 80학기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모든 분들의 덕분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작업으로 도움을 받기도, DP작업 또한 제자들과 함께 한 시간을 돌이켜보면 함께 해주신 분들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받은 감사를 어떻게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지가 저의 앞으로의 화두입니다.

Untitled 81-6, 55X240cm, Dyed on Cotton Gloves, 1981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과 앞으로의 계획

  손 코로나19로 인해 예정된 오프라인 전시가 취소되어 온라인 전시로 전환하셨는데 교수님의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예기치 못한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제 생애 첫 온라인전시를 열게 되었습니다. 처음이어서 부족한 점도 많고, 많은 작품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쉽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유튜브 시대인 만큼 오히려 젊은 청소년들과 세계의 많은 독자들도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전시 작품을 보는 관람가(독자) 중 어떤 이는 저의 작품을 보고 악수를 건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헤어진 사람과의 안녕을 느낄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모두 관람가의 몫입니다. 다만 저의 작품에서 많은 이들이 안식과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라는 언택트 시대에도 따스함과 작은 희망의 빛을 느낄 수 있다면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손 은퇴 후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요?

  작가는 끊임없이 변신과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동안 대학교수를 병행하며 작품에 할애할 시간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제 정말 자유롭게, 늘 변신을 꿈꾸며 작품 활동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이제 새로운 인생의 막을 준비하며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에 대한 설렘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기법으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장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저에겐 더욱 기대가 됩니다. 제일 기쁜 것은 작품하는 시간을 이제 많이 제가 할애할 수 있고 나를 위해서 스케줄을 만들고 그런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라는 기본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틀로부터의 해방, ‘평등세상’을 화폭에 펼치는, 예술의 경계를 넘어 상상의 한계를 띄어 넘는, 새로운 작품으로 독자 여러분을 만나겠습니다.

블랙홀 09-03(Black Hole 09-03), 159.5X136.8cm, 블랙홀 09-04(Black Hole 09-4), 159.5X182.7cm,블랙홀 09-04A(Black Hole 09-04A), 159.5X136.8cm, Mixed Media & Techniques on Canvas, 2009
블랙홀 09-03(Black Hole 09-03), 159.5X136.8cm,
블랙홀 09-04(Black Hole 09-4), 159.5X182.7cm,
블랙홀 09-04A(Black Hole 09-04A),
159.5X136.8cm, Mixed Media & Techniques on Canvas, 2009

  한평생 아티스트이자 교육자로 살아온 정경연 교수의 40년이 오롯이 느껴지는 인터뷰였다. 스위스 태생의 조각가이자 화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조각은 오브제가 아니고 물음을 던지는 것이며, 대답하는 것이다. 조각은 끝내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완벽한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어쩌면 정경연 교수는 힘든 시절 어머니가 소포로 보내온 장갑으로 세상에 해답 없는 질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손은 사람들의 땀과 삶의 애환을 장갑의 온기로 따뜻하게 감싸주며 그 희로애락을 현대적인 조형미로 풀어낸 것은 아닐는지.

  지난 6월 정경연 작가의 장갑 설치 작품 ‘코로나 19 극복! 희망 장갑 널기’ 프로젝트가 작가의 인류애를 보여주었듯이 9월 18일부터 진행되는 정경연 교수의 <틀로부터의 해방 - 장갑의 파노라마 4080> 온라인전(http://chungkyoungyeon.com, https://youtu.be/DzkE93UHIBk)도 많은 작가들에게 틀을 깨는 새로운 개인전의 선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쿨투라》 2020년 9월호(통권 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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