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9] '덕후'의 원조 '오빠 부대'는 언제 시작됐나?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9] '덕후'의 원조 '오빠 부대'는 언제 시작됐나?
  • 오광수(시인, 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20.10.2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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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룹 BTS(방탄소년단)의 노래 <다이너마이트>가 빌보드 싱글차트인 HOT 100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손꼽을 만한 사건이다. 불과 수년 전에는 꿈꿔보지도 못한 일들이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룹 BTS가 국경과 언어를 초월한 팬덤인 ‘아미(ARMY)’를 갖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아는 사실이다. 그들의 음악과 그들의 메시지에 열광하는 아미가 있었기에 오늘날 누구도 꿈꿀 수 없었던 빌보드 1위를 달성한 것이다. 이처럼 세계적인 팬클럽인 아미가 탄생한 배경에는 소셜미디어인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기반으로 꾸준한 홍보활동을 해온 소속사인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전략 덕분이다. 아미와 같은 팬덤문화를 다른 말로 ‘덕후’라고 부른다. 일본어 오타쿠(御宅)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로,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를 ‘덕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타쿠는 197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였다. 본래 ‘집’이나 ‘댁’이라는 뜻으로, 초기에는 집 안에만 틀어박혀서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을 지칭했다 .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덕후의 출발은 언제부터였을까? 이른바 팬클럽으로 부를만한 문화가 생긴 것은 80년대 ‘오빠 부대’의 탄생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스타의 집 앞에서 밤샘하며 기다리거나 행사장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열성 팬들을 그 시절에 ‘오빠 부대’라고 불렀다, 1970년대에도 남진과 나훈아를 추종하는 여성팬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조직화 된 팬덤은 아니었다. 다만 남진과 나훈아의 ‘리사이틀’(콘서트)장을 가득 메우면서 열광했던 열성적인 여성 팬들이 있었다. 한 시절에 남진과 나훈아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면서 팬들끼리의 신경전이 격화되기도 했다. 특히 그들의 출신지인 전라도(남진)와 경상도(나훈아)로 나누어져 지역감정이 격화되는 등 팬들사이에서도 위화감이 생겨났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린 남진은 반짝이 의상과 몸짓이 전매 특허였다. 잘생긴 외모와 리드미컬하게 다리를 떠는 섹시한 춤, 감미로운 목소리로 공연장은 여성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님과 함께>, <가슴 아프게>, <미워도 다시 한번>, <그대여 변치 마오>, <둥지> 등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가요계 정상에 우뚝 섰다. 그에 반해 나훈아는 남진과 라이벌을 이루었으나 그 당시에는 열성 팬을 끌고 다닐 정도의 파괴력은 다소 부족했다. 남진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나훈아는 매력적인 저음과 고음을 오가면서 특유의 ‘꺾기’로 그만의 창법을 완성 했다. 지금은 <고향역>, <그리운 고향>, <고향으로 가는 배>, <홍시>, <어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히트곡을 내놓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지만 그의 시작은 요란스럽지 않았다. 두 사람의 팬덤이 절정에 이른 사건은 나훈아 피습사건의 배후로 남진이 검찰 조사를 받은 사건이다. 나훈아가 술집에서 맥주병을 든 괴한으로부터 피습을 당하자 기자들은 피습 배후로 남진을 의심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검찰은 의혹이 커지자 남진을 소환했다. 하지만 남진은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해명한 바 있다. 여하튼 두 사람의 인기 배경에는 양 진영으로 나뉜 열성적인 팬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10대와 20대들의 여성 팬들이 팬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조직화하면서 오빠 부대를 형성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조용필에 열광하는 여성 팬들을 ‘오빠 부대’라고 불렀다. 80년대에 출현한 오빠 부대는 과거 공연장을 찾아다니면서 열광하던 팬들과는 사뭇 달랐다. 방송국을 찾아가 무작정 기다리다 사인을 요구하고, 집 앞에까지 몰려와서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등 보다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1980년대가 열리면서 컬러 방송이 시작됐고, 그 중심에 조용필이 있었다. 1968년 록그룹 애트킨즈로 데뷔한 그는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못 찾겠다 꾀꼬리>,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수많은 히트곡을 쏟아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한류의 원조로 꼽히면서 ‘슈퍼스타’, ‘국민가수’ 등의 찬사가 따라붙는 조용필에게 빠질 수없는 수식어가 ‘영원한 오빠’다. 그가 무대에서 “기도하는”이라고 노래할 때 객석의 팬들은 “오빠”를 외치면서 열광했다. 그 팬클럽들은 지금도 팬클럽 연합으로 존재하면서 조용필의 공연마다 맨 앞자리를 차지하며 그를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소녀 시절 조용필 집 앞을 지키면서 오빠를 기다렸고,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빠의 곁을 지키고 있다. 현재는 1997년 결성된 ‘이터널리’를 비롯해 1999년 출발한 ‘미지의 세계’, 2001년 출발한 ‘위대한 탄생’까지 3개 팬클럽이 ‘원조 오빠 부대’로서 위엄을 자랑한다.

  이제 조용필은 스스로를 ‘꼰대’라고 지칭하지만 여전히 유튜브에서 빅뱅, 엑소,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찾아 듣는 ‘젊은 오빠’이다. 조용필 이후 팬덤은 보다 본격화 됐다. 단순한 ‘오빠부대’를 넘어서서 우리시대의 문화를 소비하고 이끌어가는 ‘제3의 문화권력’으로 진화했다. 과거 팬클럽이 무분별하게 스타를 추종하는 충동적이고 자의식이 부족한 10대 여학생들의 모임 정도로 인식되었으나 이제는 대중문화를 주도해가는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최근 팬클럽들은 나름대로 의미와 새로운 문화를 생산하는 세력으로 진화했다. 맹목적으로 스타를 따르는 단순한 형태는 사라지고 스타를 진정으로 아끼는 애정을 바탕으로 사회봉사활동을 펼치는 등 제3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해 간다. 이들은 스타의 생일날 대형광고판에 광고하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스타와 팬클럽 이름으로 성금을 맡기고 자원봉사활동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팬덤문화가 이전과는 달리 건전하고 성숙하게 진보하고 있다. ‘오빠 부대’와 ‘덕후’ 사이에 큰 변화가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시대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는 계속 생산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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