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탐방 2] 김해 사랑, 가야 여행
[지역문화 탐방 2] 김해 사랑, 가야 여행
  • 송춘복(경남 향토사학자)
  • 승인 2020.10.22 1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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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의 순우리말은 ‘금바다’이다. 뭔 금바다가 다있나 싶겠지만 각 지방 열읍들의 명칭에는 다 그럴싸한 이유가 존재한다. 필자도 어렸을 적에 뭐가 금바다야? 하는 생각에 김해평야의 끝없이 펼쳐진 가을인가? 생각도 했었고 젊은이가 되어 지리지를 배웠을 때는 김해평야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가끔 바닷물이 드나드는 갈대밭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갈대꽃이 십 리나 뻗어 그 장관이 금빛 같았나보다, 심지어는 김수로의 후손들인 김씨가 많아서 일까? 등 여러막연한 상상들을 했었다. 그 상상 속에 맴돌던 금바다는 어른이 되어서야 아! 그렇구나! 금관가야라는 정답을 얻었다. 김해는 금관가야의 고장이자 가락국의 중심이었다. 가락국은 가야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가장 먼저 창업한 전기가야의 맹주이자 금관가야라는 명칭이 보여주듯 철의 제국이었다. 지금은 금과 은이라는 금속이 화폐처럼 가치화되어 있지만, 통상 기원전후 무렵의 청동기부족사회는 청동기시대라는 고유명이 부여되었는데도 그 청동기도 워낙 생산량이 적고 화폐보다 귀해 대중화 내지 일반화 되지 못했다.

  그런 관계로 청동기는 부족장의 위세품 정도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희귀품에 불과했고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나무나 돌을 가공해 연장이나 도구로 사용하는 사회였다. 그 청동기시대를 고인돌사회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아직도 한반도에 산재한 고인돌이 무려 3만여 기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발굴과정에서 그 사회의 징표인 청동기가 발견되는 경우는 극히 일부다. 거의 마제석검이라 불리는 돌칼과 같은 석제품종류가 출토된다. 그래서 청동기는 부족사회 이상의 발전단계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한다. 가락국 이전의 김해는 아홉 마을씨족사회인 구간사회였다는 사실이 삼국유사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한다. 구간들이 서로 돕기도 하고 견제도하며 그 중 가장 강력한 수장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 김해에도 여럿 존재하는 고인돌이며 청동기사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그런 후진문화의 세계에,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하는 신지식인 김수로왕이 나타난다. 古典의 기록을 잠깐 보자. “김해도호부는 본디 가락국인데 후한 광무황제 18년에 가락의 우두머리 아도간, 여도간 등 아홉 사람이 삼월 삼짇날 백성들을 거느리고 목욕하고 음복을 하다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소리와 기운이 느껴져 가 보았더니 하늘에서 금합이 내려와 있고 그 속에 금색 알이 들었는데 둥글기가 햇덩이와 같았다.

  아홉 사람이 절을 하고 신령하게 여겨 아도간의 집에 받들어 안치하고 다음날 다시모여 열어보니 한 동자가 껍질을 벗고 나왔는데 나이는 열다섯 가량 되고 용모가 매우 뛰어났으므로 함께 절을 하고 하례의 예를 다하였다. 총명하고 잘 자라 십여 일에 키가 9척이나 되었다. 그달 보름날에 아홉 사람들이 받들어 마침내 임금을 삼으니 곧 수로왕이다. 나라이름을 가락, 또는 가야로 일컫다가 금관국이 되었다.” AD 42년경, 수로왕의 탄생설화지만 이 기록에서 구간사회 즉 청동기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여는 영웅의 탄생을 설명하고 있고 그 주인공이 아주 비범한 인물임을 부연하고 있다. 그 비범함은 다름 아닌 철광석의 확보와 제련기술이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하나는 왜? 수로왕이 창업한 가락, 가라, 가야가 어느새 전혀 다른 명칭인 금관국이 되었냐는 거다. 이는 바로 김해가 철을 바탕으로 한 중국, 일본과의 해상 중심국이었기 때문이다. 가야시대 김해의 회현동 패총에서는 화천이라는 동전 한 닢이 나왔는데 이는 서기 10〜20년경 중국의 신나라 왕망이 잠깐 동안 발행한 화폐로 이 동전은 서북한지역으로부터 일본 남부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출토되기 때문에 김해에 활발한 해외무역항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해의 봉황동유적과 관동리유적에서는 가야시대 목선과 무역항이 발견되었고 특히 대성동고분군과 양동고분군에서 출토되는 대표적 유물이 무더기로 부장된 덩이쇠인데 당시 덩이쇠는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화폐 이상의 국력을 보여주는 가치가 있었다. 학자들은 금관가야의 철광생산과 단조기술이 가장 뛰어나 옛 김해를 철의 왕국, 또는 해상왕국 가야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선진기술을 바탕으로 한 철기의 대량생산과 대량보급은 교류의 전진기지인 항구와 바다를 통해 동아시아를 주름잡았다는 것이다. 그 상징이 곧 철의 관청인 금관이며, 금관이 바다를 접해 쇠바다이며, 쇠바다가 즉 김해라는 금바다이다. 필자는 수년 전 가야의 철광산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현장을 찾아 나섰다. 서낙동강을 끼고 대동면 주동리의 남명선생 사당을 지나 신어산 동편 깊숙한 골에 들어서자 수십 개의 토굴들이 어지럽게 얽혀 방치 되고 있었다. 음산한 한 토굴에서 유난히 검어 보이는 돌들을 주워 자석에 갖다 대니 신기하게도 철석철석 달라붙었다. 토굴의 깊이를 알아볼 심산으로 들어가 봤는데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해상왕국의 화려함 저편에 변변찮은 연장으로 철광석을 캐던 가야 장인들의 노고가 눈에 선했다. 내려오는 길에 인근의 노인을 만나 왜 이렇게 분위기가 황량해 보이냐고 물었더니 보도연맹 때 여기, 여러 토굴에서 수천 명의 양민들이 이유도 모른 채 학살당했다고 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좀 그렇다 했더니 토굴의 영욕이 때에 따라 달라도 너무 다른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신어산을 돌아 반대편인 분산성 중턱에 송담서원 표충사가 있는데 이곳은 김해의 자랑 중에서도 빼먹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다. 바로 김해의 사충신이다. 임진왜란 때 선비 네 분이 자진 입성하여 부사도 도망한 성을 성민들과 함께 무려 4일간이나 지키고 저항하다 모두 동시에 전사한 사실상 임진사의 첫 의병장들이기 때문이다. 개전일인 4월 13일, 부산에서부터 선조가 도성을 비우고 몽진을 떠나기까지 딱 18일인 것을 감안하면 김해성의 4일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표충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지봉에 올랐다. 구지봉은 아홉 촌장들이 수로왕의 탄생을 기원하며 구지가를 부른 장소이자 수로왕비 허왕후의 무덤도 있고 옆 자락에 고인돌도 있다. 한 곳에 나란히 명멸하는 청동기시대와 부상하는 철기시대의 대표성이 공존하는 곳이다. 자못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여기서 남쪽으로 한 2킬로미터쯤 내려오면 대성동 고분군 아래 김수로 왕릉이 위엄과 편안함을 동시에 간직하고 방문객을 맞이한다. 경내는 삭망분향을 하는 날 새벽을 제외하고 늘 조용하고 깨끗하다. 신라 김유신의 생질 문무왕은 외가의 시조 수로왕의 무덤을 보수하고 제사하며 보살피도록 전답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수로왕도 한때는 편한 숙면도 못했었다. 임진왜란에 왜적들이 도굴을 했기 때문이다. 왜는 4세기 경, 철의 왕국 가야가 전수해준 철재 판갑 갑옷으로 고분시대 야마토정권을 기여했다한다. 수로왕시대 하찮게 여겼을 만한 왜적에게 잠자리가 파헤쳐졌으니 그 괘씸함이 오죽했을까? 수로왕의 후손 죽암 허경윤은 난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왕릉복원이었다고 하니 지금의 능원은 그의 공이 크다 하겠다. 서쪽으로 조금 나서면 청동기시대 구간의 촌장들이 목욕하고 음복을 했다는 해반천이 흐른다. 바로 인근에 봉황대가 있고 가야 왕궁터로 추정된다는 조선 숙종 때의 비가 있다. 주변에서는 또 거대한 가야봉황토성이 발굴되고 있다.

  머지않아 철의 왕국가야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부푼다. 김해의 초 중등학교의 교가는 금난새 선생의 아버지였던 작곡가 금수현 선생의 노래가 다수다. 본향이 옛김해였던 지금의 부산 강서구였기 때문인데 김수현에서 금수현으로 개명한 것 역시 금바다 때문은 아닐까? 억지 같은 상상을 해 본다.

 

 

* 《쿨투라》 2020년 10월호(통권 7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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