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성장하는 ‘어른이’를 찾아서
[드라마 월평] 성장하는 ‘어른이’를 찾아서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0.10.2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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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 탄 왕자님이든 성에 갇힌 공주님이든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매력적인 신스틸러든 드라마의 등장인물은 거의 다 비장애인이다. 다리가 불편하거나 눈이 안 보이는 장애인은 브라운관 안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우리가 사는 세계에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만 쏙 빼놓고 비장애인만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 바로 한국 드라마월드다 . ‘일상성’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고려해봤을 때 드라마에서 장애인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함께 사는 구성원으로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척박하다는 방증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코지만 괜찮아>(2020)는 한국사회와 한국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될 것이다. 아니, 꼭 그런 작품으로 남길 바란다. 한류스타 김수현의 부활이나 배우 서예지의 발견으로만 기억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드라마다.자폐 장애인을 연기한 배우 오정세의 레전드 등극이라면 또 모를까.


 

  이상한 나라의 착한 장애인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장애인을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금 있긴 있었는데 소수의 장애인에게 주어진 역할이 너무나 비슷해서 그것이 오히려 장애인에 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만들어낸다는 게 문제였다. 그들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고 어떤 외모와 어떤사연을 갖는지는 다 다르다. 그런데 똑같은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처럼 그들은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왜 그렇게 장애인들은 모두 다 착하고 예의 바르고 조용하고 얌전한 것일까. 배우 조정석과 박보영의 알콩달콩 로맨스로 큰 인기를 끌었던 <오 나의 귀신님>(2015). 드라마의 주된 배경은 남자주인공 강선우 쉐프가 운영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그리고 그곳의 홀 매니저이자 쉐프의 여동생이 ‘강은희’다. 발레리나가 꿈이었던 그녀는 뺑소니 교통사고로 평생 휠체어를 타게 된다. 언제나 평온한 얼굴인 그녀는 나중에 남편이 연쇄살인범이자 자신을 사고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라는 걸 알게 되지만, 자해로 기억을 잃은 남편을 옆에서 간호하면서 당신은 착한 사람이라고 위로해준다. 세상에 이런 천사가 어디 있을까.

  노년의 삶을 입체적으로 다룬 <디어 마이 프렌즈>(2016)에도 후천적 장애인이 나온다. 프러포즈 당일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남자 ‘서연하’. 그는 연인이 떠나고 삼 년 동안 혼자 남겨지는데, 아무런 원망 없이 연인을 기다리는 순정적인 남자로 그려진다. 시트콤<논스톱> 이후 오랜만에 보는 배우 조인성의 서정적인 사랑 연기가 반갑긴 하지만 그 역할이 사랑받길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장애인이란 게 좀 아쉽다. 범죄 수사로 장르를 옮기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장애인은 대체로 착하고 어리숙해서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그 사례가 너무 많아 일일이 나열하는 것조차 버겁다. <진심이 닿다>(2019)는 로맨스 드라마지만 남자 주인공 직업이 변호사이기 때문에 범죄사건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그런데 이때 장애인은 형의 죄를 뒤집어 쓴 착한 동생으로 등장한다. 이쯤 되면 ‘장애인은 착하다’가 아니라 ‘착하면 장애인이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당신이 비장애인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트 장애인의 ‘따로 또 같이’

  <라이프>(2018)의 ‘예선우’는 장애인의 전형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물로 화제를 모았다. 동정과 연민의 대상, 그래서 ‘선함’을 강요받은 대상이 아닌 의사라는 전문직 엘리트로서 장애인의 스펙트럼을 넓힌 것이다. 어릴 적 사고로 인해 휠체어 장애인이 된 그는 정형외과 전문의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심사위원으로 일한다. 전문직 장애인으로서 그의 삶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기보다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그려진다. 집안 내부가 장애인이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그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편하게 설거지를 하고 레버를 잡아당겨 싱크대 찬장에서도 혼자 물건을 꺼낸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장애인에게 강요된 장애극복의 획일화된 이미지일까. “널 보며 꿈을 키우는 사람들이 있어. 넌 그 사람들한텐 희망이야”라고 말하는 비장애인형 예진우의 말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왜 내 삶이 누군가한테 용기를 줘야 하는데? 난 그냥 사는 거야. 이 삶이 난 그렇게 기쁘거나 좋지 않아.”라고 예선우는 답한다. 그는 장애 모티프의 단골 소재인 ‘자기 극복과 성장 서사’를 거부함으로써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삶을 강조한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똑같다. 그냥 사는 거다. 음음, 그렇고말고 .


  <라이프>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다면 <스토브리그>(2020)는 형과 동생의 브로맨스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상생을 보여준다. 백영수는 한때는 촉망받는 야구선수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야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세이버 메트릭스 전문가로 변신한다. 그는 과학적 분석을 통해 야구계의 적폐와 관행을 타파하는 형 백승수 단장의 개혁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그리고 단장의 동생이나 장애인으로서 특혜가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조직에서 인정받고 구단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한다. 그렇게 백영수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수혜의 대상에서 도움을 주고받는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난다.


  ‘성장하는 어른이’와 함께라면

  <사이코지만 괜찮아>(2020)는 참 신기한 드라마다. 등장인물 중에서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비장애인인지 구별이 잘 안 된다. 누가 착하고 누가 위선인지, 누가 악하고 누가 위악인지도 애매하다. 드라마에서 중요한것은 선악도 시비도 장애 유무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외로운 사람들일 뿐이다. “자아를 잃어버린 소년”(문강태), “감정 없는 깡통공주”(고문영), “박스에 갇혀 사는 아저씨”(문상태). 세 주인공은 마음에 상처나 위로를 받았을 때 갑자기 어린이로 몸이 변한다. 이때 “우리 안에 이쁨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산다”는 대사가 떠오르면서 드라마가 아니라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운 오리새끼, 양치기 소녀, 장화홍련, 의좋은 형제들… 드라마는 매회 동화에서 타이틀을 빌려와 ‘어쩌다 어른’이 된사람들에게 “영원히 자라는 어른”이 되기 위한 따듯한 조언을 건넨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른다섯 살 ‘문상태’가 있다. 문상태는 발달장애 3급의 고기능 자폐로 동생 문강태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생활한다. 하지만 우연히 월남전 참전 트라우마를 겪는 아저씨를 도와주게 되면서 스스로 성장하는 캐릭터로 거듭난다. 엄마의 살인사건을 목격한 트라우마로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안에 갇혀 있었지만, 과거에 갇히면 안 된다는 아저씨의 조언을 듣고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극 중 문상태는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인물로서 다른 인물들의 내적 성장을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엄마를 살해한 여자의 딸을 사랑하는 문강태와 엄마가 살해한 여자의 아들을 사랑하는 고문영.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고민에 빠진 그들에게 문상태는 간단하게 해결책을 제시한다. “가족인데 같이 살아야지.”

  만약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하냐는 동생의 질문에 그는 다시 한번 솔로몬의 지혜를 보여준다. “배째. 그러면 다 이겨.” 문상태는 자신이 즐겨보던 만화 <둘리>의 고길동처럼 외로운 사람들을 가족으로 품으며 “영원히 자라는 어른”의 아이콘이 된다. 극 중 문상태의 장애는 단순히 자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는 마음속 장애물의 총칭이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모두 다 영혼이 아픈 사람들, 그래서 서로 기대고 도와야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드라마들이 비장애인의 세계에 한 명의 신체 장애인을 예외적으로 끼워 넣은 형태라면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문강태를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 심지어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까지 영혼이 아픈 사람이란 자각과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의 “진짜 얼굴”과 “진짜 행복”을 찾아 모험을 떠나도록 인도한다. 엥? 가만히 있어도 힘든데 무슨 모험이냐고? 아, 몰라 몰라. 배째.

 

 

* 《쿨투라》 2020년 10월호(통권 7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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