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월평] 다시 한번, 우리 모두 "Born This Way!"
[연극 월평] 다시 한번, 우리 모두 "Born This Way!"
  • 장윤정(연극평론가)
  • 승인 2020.10.2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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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

  고대 그리스 원형극장에서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제의가 펼쳐졌다. 신을 향한 노래를 부르고 비극경연대회를 열었다. 그렇게 극장은 공동체의 공간이 되었고, 연극은 종교적 의례와 정치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제의와 연극과 정치가 극장 공간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축제가 최근 남산예술센터에서 다시 열렸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1962년 드라마센터(이하 남산예술센터)라는 이름으로 개관되었던 남산예술센터는 연극을 하기 위한 여러 제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극장이다. 그리스 원형극장을 연상시키는 반원형 무대와 프로시니엄 무대, 돌출 무대의 구조 모두를 갖추고 있으며, 승강무대 및 객석과 무대 사이를 은밀히 연결하는 통로까지 구축한, 국내 유일무이한 형태의 현대식 극장인 것이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는 이러한 극장의 특징을 적극 활용하여 오늘날의 제전을 열었다. 이미 2018년 12월,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삼일로창고극장 봉헌 예배>를 올린 바 있는 쿵짝프로젝트는 남산예술센터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봉헌예배가 대부흥성회로 볼륨이 커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공의 가치를 본래의 주인에게로 되돌려놓는 과정

  60년대 초반, 한국의 현대연극은 불모지상태였다. 동랑 유치진은 한국 연극발전을 위해 극장 개발의 필요성을 느꼈고, 현대식 공공극장을 설립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의도에 따라 허정 과도정부는 조선총독부가 있던 자리이자 이후 국립과학원으로 사용되었던 토지를 대부하였고, 그와 함께 미국 록펠러재단의 지원으로 지금의 남산예술센터가 건립되었다. 즉, 현 남산예술센터는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나라와 민간이 협력하여 만든 공공극장인 동시에 한국 연극 중흥을 위한 국내 최초의 현대식 극장인 것이다. 그러니 남산예술센터의 존재의의는 역사적으로도 뜻깊다고 해야겠다. 다만, 나라의 소유였던 극장 공간이 1978년을 기점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유치진의 사유재산으로 변모되었는지는 불명확하기에, 이 지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결국, 서울시는 지난 10년 동안 동랑예술원으로부터 임대하는 방식으로 극장을 사용해왔고, 올해로 모든 계약이 만료되고 말았다. 내년부터는 남산예술센터가 SM엔터테인먼트의 K-pop 글로벌 스타 양성 교육기관으로 변경되는 상황이다. 한국 연극사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극장의 귀추가 주목되는 순간이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는 이 공공극장의 이면에 존재하는 역사적인 맥락을 꼬집는다. 록펠러재단의 지원에는 당시 냉전 시대에 따른 친미반공주의의 정치적 이념이 개입하고 있었다. 작품은 그와 함께 얽혀 있는 군사독재정권과 보수적인 기독교 세력의 이해관계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어느덧 퇴색해버린 종교의 의의와 공공극장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대부흥성회를 연다. 예컨대, 여는 찬양, 희생제의, 죄의 고백과 참회의 시간, 성서 비극 등, 일련의 예배 양식으로 작품을 구성하여 극장을 종교제의의 성전으로 완성해낸 것이다. 차별과 멸시로써 광야로 내쫓겼던 이름 없는 이들은 극장으로 돌아와 이 성전의 주인이 된다. 작품은 기존의 기독교 형식을 그대로 수행함으로써, 기독교 스스로 자신 내부의 빈틈을 드러내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기독교로써 기독교를 넘어서는 행위인 동시에 새로운 기독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과정이 되었다. 변화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기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임을 작품은 말하고 있었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

  ‘사랑’, 그러므로 Born This Way!
  사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다름 아닌 “Born This Way”다. 작품은 드래그 퀸(Drag queen)인 퀴어 예수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아버지도 없이, 자리도, 명분도 없이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퀴어 예수는 순탄치 못한 성장기를 거치고 성인이 되어선 광야로 내몰린다. 그곳에서 그는 신을 향해 “왜 나를 버리”는가에 대한 의심의 한마디를 외친다. 신을 의심하는 신으로서 예수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가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동안 ‘완전함’이라는 환상에 갇힌 채 어떠한 가능성도 닫아버렸던 성경에 숨을 불어넣은 것이다. 작품은, 성경에서 조명되지 않았던 인물의 심리와 상황을 다시 읽어내고 그 속에 숨겨진 윤리를 발견하게 만든다. 예컨대, 마리아를 여성이자 개인으로서 이해하도록 구성한 점이 그러하다. 작품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잉태를 한다. 천사는 그것을 ‘선물’이라 칭하고, 마리아를 ‘처녀’ 아니면 ‘성녀’로서 정의한다. 게다가 마리아에게 골방에서 순종적으로 기도드리기를 종용하기까지 한다. 마리아는 분노하고 항거하지만, 상황을 되돌릴 순 없는 위치다. 개인에게 강행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순간이라고 해야겠다. <남산예술센터 대부 흥성회>는 이처럼 성경에선 들을 수 없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기존의 기독교 교리에서 간과되었던 윤리적인 지점을 사유하게 만든다.

  오늘날까지 묵살당했던 목소리는 비단 마리아뿐만이 아닐 것이다. 작품은 광야로 쫓겨난 퀴어 예수를 비롯하여 핍박받고 소외당했던 모든 목소리를 극장으로 다시 환대한다. 그리고 퀴어 예수의 이름으로 ‘사랑’의 복음을 전한다. 그것은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바로 그 ‘사랑’이자 ‘구원’이며, ‘Born This Way’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에서 퀴어 예수는 쫓겨났던 광야에 신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으로 돌아온다. 귀환한 그가 전파한 사랑은 다름 아닌 가수 Lady Gaga의 노래 <Born This Way>. 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인 동시에 그렇게 완성되어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이해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작품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행위임을 말하고 있었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

  작품이 통찰하고 있는 기독교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2003년 4월 26일, 이제 겨우 스무 살인 청년이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았다. 육우당(六友堂), 윤현석이다. 그는 청소년 인권 운동가이자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동성애자인권연대에 가입하여 상근직원으로 활동했다. 시와 시조, 가사를 쓰며 동성애자 해방과 시조 부흥, 가사 부활을 꿈꿨다, 그러나 “몰지각한 편견과 사회”,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은 날 선 언어와 폭력적인 행동으로 끝내 그를 생의 끝으로 내몰았다. 그럼에도 육우당 윤현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동성애자인권 연대에 기부하며, 남은 성 소수자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는 극 전반에 걸쳐 육우당 윤현석의 시조와 가사를 관객과 함께 읊고 노래한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감각하게 만든다. 반면 작품 속, 기독교인들의 성 소수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제 혐오 발언에서는 과연 기성의 기독교가 부르짖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반문하게끔 한다. 본래 ‘사랑’이란 ‘순수’의 불가능성을 의미할 것이다. 사랑은 경계를 와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내 안에 품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오염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사랑’은 서로를 환대하는 행위이며, 종교는 그 환대의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기독교 교리로써, 자신들의 특정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멸시하는 행위가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그것은 순수함이라는 환상에 속아 그 순수함이 오염되지 않기 위해 방어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태도에 가깝다. 작품은 이 역설적인 현실과 육우당 윤현석 및 퀴어 예수를 통해 ‘사랑’에 대하여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성경에서 예수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불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기꺼이 신이자 불완전한 신, 오염된 존재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 예수로부터 얻은 구원은, 오염된 존재로부터 구원이 가능한 것임을 사유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육우당 윤현석과 퀴어 예수의 존재는 광야에서 돌아온 예수, 이웃으로 존재하는 예수,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핍박당하는 예수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은 다시 ‘Born This Way’로 맥락이 닿는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

  배제된 모든 존재의 대부흥을 위하여 세족식은 예수가 마지막 만찬이 있던 밤 열두제자의 발을 씻겨주었던 것에서 기원한다. 작품 속에서 썸머와 저기의 세족식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로 표현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그 일상적인 행위를 아름답게 기억하게끔 만든다. 관객은 이들을 통하여 보편적인 순간들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적인 고민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관객과 인물들이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간접적으로나마 관계 맺음을 이룬다는 점이다. 세족식의 의미는 그 지점에 있었다.

  쿵짝프로젝트는 진중한 이야기도 유쾌하게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었다. 우선, 공공극장에서 드랙퀸의 퍼포먼스를 만날 수 있게끔 한 것부터가 통쾌함을 선사한다.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사회 모순을 통렬하게 풍자해내는 점들 또한 그러하다. 그 외에 배우와 관객이 연극을 하나의 놀이로 즐기게끔 하는 구성도 탁월하다.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에서는 성가대 가운을 걸친 14명의 코러스가 객석 뒤편에 등장한다. 덕분에 실제로 극장 공간을 찬양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일루전이 일어났다. 극중 성찬식의 과정에선 관객과 음식을 나눠 먹을 예정이기도 했다. 성가에서는 무대 위 스크린에 42명 합창단원의 영상이 상영되었는데, 무대 밖 인물들이 극장 안에 등장하자 연극의 가상성이 무너지고 시민과 시민의 연대로서 인식이 확장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작품은 서사뿐 아니라 형식에서까지도 경계의 와해를 체험하게 만든 것이다. 아쉬운 지점은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공연이 결국 단 하루 온라인 공연으로 대체된 점이다. 이 작품을 온전히 즐기려면 분명 극장 공간에서 배우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성찬식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전체 무대를 한눈에 보지 못하고 카메라의 방향에 따라 정해진 장면을 보아야 하는 점 또한 아쉽다. 다소 세련된 영상미를 보여주긴 하였지만, 아무래도 렌즈의 화각이 제한하는 범위만큼만 감상할 수 있기에 본래 작품의 모습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삼일로창고극장 봉헌예배>가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로 변주되었듯이, 언젠가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 또한 다른 형태로 극장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광야에 내몰렸던 이들의 귀환으로 극장이 축제의 장이 되었던 순간처럼. 다시 한번 ‘Born This Way!’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

 

 

 

* 《쿨투라》 2020년 10월호(통권 7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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