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시간성'을 탐사하는 예술가 놀란이 미래에서 보낸 절박한 편지
[영화 월평] '시간성'을 탐사하는 예술가 놀란이 미래에서 보낸 절박한 편지
  • 김시균(매일경제 기자)
  • 승인 2020.10.2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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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행〉에서 〈메멘토〉〈인셉션〉〈인터스텔라〉〈덩케르크〉를 거쳐 〈테넷〉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에서 ‘시간’이 핵심 제재라는 데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영화를 진지하게 보는 관객에게든 가벼운 킬링타임용으로 대하려는 관객한테든 매한가지다. 놀란의 영화에서 ‘시간’은 굳이 노력 안 해도 의식된다. 그러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여기, 2차원 평면의 스크린이 있다. 영화 한 편이 흘러간다. 일련의 배경이 제시되고 사건은 펼쳐지며 인물들은 움직인다. 어떤 경우 시간이 직접적 제재로 채택되고, 어떤 경우엔 매개를 거쳐 지각케 된다. 데뷔작 <미행>(1998)을 보자. 이야기는 간단하다. 작가 지망생이라는 한 청년이 있다. 단칸방에 사는 그는 무직이다. 동네를 이리저리 떠돌며 누군가를 미행하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다. 어느날 청년은 한 신사를 미행하다 그의 기이한 도둑질 행위에 가담하고, 점점 짜릿한 재미를 느낀다. 그러다 무단침입한 집에 사는 여인에게 묘한 감정까지 품게 된다. 하지만 청년은 시종일관 무지하다. 신사가 범죄조직 일원이고, 최근에 살인을 저질렀으며 이에 대한 혐의를 자기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것임을 그는 모른다. 신사가 자신과 함께 무단 침입한 집의 여인과 아는 사이라는 사실도 그는 알지 못한다. 청년의 시간은 끝까지 신사에게 조종된다. 영화 막바지, 그가 수사관에게 할 수 있는 말이란 내가 한 짓이 아니라는 무기력한 토로 뿐이다.

  놀란은 이 단순한 이야기를 일부러 뒤섞었다. 사건의 연대기적 흐름을 교란한 것이다. 즉, 최초의 관람자에겐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가지런히 정련하기가 쉽지 않다. 청년이 장발에 가족 재킷을 입고 다니는 시간과 번듯한 정장 차림일 때의 시간을 교차시키며 평행선을 이루듯 배열한 탓이다. 때문에 영화의 초중반까진 관객은 다소 혼돈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연히 신과 신의 전후 관계를 따져야 하고, 그럴 수록 시간을 더 의식케 된다. <미행>이 시간의 전후를 분명히 표지하지 않고 단순히 섞음으로써 관객의 이해를 방해한다면, <메멘토>(2000)는 전진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을 교차시킨다. 전자를 흑백 화면, 후자를 칼라 화면으로 구성해 난해함을 한층 더 배가한 것이다. 또한 영화는 ‘기억’이라는 제재를 하나 더 추가하고 있다. <메멘토>의 주인공은 겨우 10분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의 기억은 아내가 살해당하기 직전으로 고착돼 있다. 이후의 시간은 10분 이상 기억해낼 수 없다. 그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다. 그런 그가 테디라는 안경 쓴 사내를 총살하는 첫 신에 이어 영화는 시간을 앞으로 몇 걸음 당긴다. 이후부터 남자는 반복되는 기억상실증에 맞서 아내를 죽인 상대를 찾아 복수하려 한다. 방법은 사진과 종잇장에 적은 메모와 몸 곳곳에 새긴 문신 기록에 의존하는 것. 남겨진 기록(기억)들에 근거해 남자는 사건의 출발점으로 서서히 역행해간다. 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아니 마주할 뻔한 것은 어떤 끔찍한 실재로서의 진실이었고, 남자는 끝내 그 진실을 대면하길 거부한다.

 

  이쯤에서 잠시 우회하자. 사실, “인간이 시간을 인식한다”라는 말은 성립불가능하다. 3차원의 존재는 3차원 이상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가 사물을 인지할 때는 자신보다 낮은 차원의 것만 완전히 인지할 수 있다.”(유현준 <공간이 만든 공간>) 3차원의 존재가 외부 세계를 인식할 때는 2차원 이하의 평면적 이미지만을 정보로 얻을 수 있다. 그래도 인간은 독특한능력으로 3.5차원 정도의 존재는 될 수 있는데, 그 비결은 ‘기억력’에 있다. “인간의 지능은 단기 기억력 덕분에 좀 전의 과거와 조금 더 먼 과거의 2차원 장면을 기억할 수 있다…기억력과 네 번째 차원인 ‘시간’의 도움으로 망막에 잡힌 그림을 연산해서 이어 붙여 3차원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같은 책)

 

  이처럼 3차원의 공간을 기억력에 의존해 구축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다. 시간은 4차원을 구성하는 변수여서다. 인간이 하루를 24시간, 1년을 365일로 분절해 인위적으로 정돈하려는 것은 3.5차원의 인간이 4차원의 시공간을 살아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다. 시공간은 중력에 의해 휘어지며,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일반 상대성이론은 인간이 감각해 낼 수 있는 범주가 아닌 것이다. 결국, 시간을 다루려는 놀란의 작업은 신기루를 좆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시간에 대한 그의 탐사는 외려 꾸준히 확장되고 있다. 시간을 직접적으로 감각하기가 어렵다면 그는 영화라는 매개를 거쳐서라도 ‘시간의 선형성’이라는 것을, ‘시간은 나아간다’라는 고정된 관념의 사슬을 벗고 다르게 사유해볼 것을 권한다. 그런 그가 <인셉션>(2010)을 찍었던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이 영화는 그에게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시간’에 대한 그의 탐사가 ‘시-공간’에 대한 탐사로 넓어지고 있어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영감을 받은 듯, 그는 이제 ‘시간’에 ‘공간’을 결합한 ‘시공간’을 다루길 본격화한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은 하나가 된다. 영화 속 꿈이라는 ‘무의식’의 시공간에서 시간의 속도는 꿈 공간의 층위마다 달라진다. 꿈에서 꿈으로 꿈의 꿈에서 꿈으로 인물들은 나아간다. 꿈의 단계가 깊어질 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각 꿈의 단계는 각 인물들에게로 영향을 미친다.

 

  <인터스텔라>(2014)에 이르면 아예 놀란의 세계는 현실과 무의식의 시공 너머 우주의 시공으로 무한히 뻗친다. 이제 그에게 다룰 수 없는 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로 뻗어가던 그는 시공간의 왜곡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의 만남이란 기적을 연출하더니, <덩케르크>(2017)에선 배경을 한 세기 전으로 당겨 하나의 시간 축을 더한 세 가지 시간 축을 나란히 전진시킨다. 병사의 일주일과 선장의 하루, 파일럿의 한 시간이교차하더니 서서히 하나의 시간선으로 수렴해간다. 놀란처럼 시공간 자체를 탐사하는 감독이 또 있을까. 작고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정도가 떠오른다. 어쩌면 그는 타르코프스키라는 위대한 시간의 조각가를 제나름 뛰어넘어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솔라리스>(1972)와 <잠입자>(1979) 등이 구현해낸 시간의 물질성이 전해진다면 과언이겠으나, 놀란의 영화들엔 그러기 위한 어떠한 안간힘 또는 집착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는 어떻게든 시간을, 시공간을 이미지화하려 한다. 그러려고 발악한다.

 

  그 발악은 <테넷>(2020)에서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시간을 뒤로 감고 당기고 늘리고 섞고 병치하며 때때로 멈춤으로써, 이미지라는 2차원 평면에 그는 시간을 아예 가두려 한다. 테크니션 놀란이 빚어낸 '봉인된 시간'.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아가던 선형적 시간들은, 접히고 엉키고 구부려 짐으로써 서서히 난해한 띠 하나를 이루어 간다. 이 모두를 구현해낸 화면 속 운동성이야 말로 ‘테넷’의 백미일 것이다. 놀란은 이번엔 ‘인버전’이라는 상상의 기술을 고안해 냈다. 쇳덩이로 된 사물을 반전시켜 시간을 역행한다는 개념이다. 아이디어의 기원은 <메멘토>의 오프닝 신에서 찾을 수 있다. ‘메멘토’의 첫 신, 때는 주인공이 막 테디를 총살한 직후다. 영화는 화면을 빠르게 되감아 총살 직전의 순간으로 잠시 되돌아가는데, 이는 발사된 탄환을 탄창으로 되돌리는 <테넷>의 인버전 사격 신을 예기해준다. 전작들이 숏과 숏의 분할과 배치로 하여 서로 다른 시간들을 배열한다면 <테넷>의 방식은 보다 대범해진다. 아예 한 숏 내에 서로 다른 시간을 공존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역행하는 시간과 순행하는 시간이 한 화면에 동시에 구현되고 있다. 도래하는 미래와 오지 않은 과거가 지금이라는 다리에서 만나 교호한다. 과거-현재-미래로의 시간 선은 완전히 구부러진다. 코스모스적 질서관은 붕괴되고, 카오스적 혼돈이 영화 속을 내내 줄달음한다. 이 모든 실험은 영화 말미에서 정점에 이른다.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인버전으로 세상을 끝내겠다는 무기판매상 사토르 세력, 미래에서 온 테넷 요원들이 펼치는 전투신 얘기다.

 

  놀란은 영화가 편집의 예술이자 시간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적잖은 작위성을 무릅써야만 하는 테크니션으로서의 방식이다. 카메라를 거꾸로 돌리고역순으로 배우들을 이동시키며, 역순의 연기와 시간순의 연기를 뒤섞어 편집한 다음 한 화면에 담아냄으로써 그는 ‘시간성’ 자체 (그리고 영화 자체를)를 새롭게 사유해보게 해준다. 그리하여우리가 마주하는 저것은 영화이고, 영화라는 예술임을 또한 상기시킨다. <테넷>을 영화의 영화로도 읽을 수 있는 이유다. 한편으로 필자는 이 모두가 놀란이 미래에서 보내 온 편지는 아닌가,하는 상념에도 젖게 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몰고온 이 슬픈 영화의 시대에 “영화의 존재를 잊지 말라”는, “영화의 죽음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달라”는 절박한 한 통의 편지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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