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영화 격월평] 이건 누구의 이야기인가요?: 찰리 카우프만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장르 영화 격월평] 이건 누구의 이야기인가요?: 찰리 카우프만 〈이제 그만 끝낼까 해〉
  • 양진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2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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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카우프만, 〈이제 그만 끝낼까 해 I'm thinking of ending things〉(2020)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어떤 만남은 우리를 아주 잠시라도 ‘전혀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준다. 블로그에 쓴 심심한 내 글에 흥미를 느낀 익명 유저의 댓글, 퇴근길에 열차 손잡이를 잡고 서서 졸고 있는 내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승객, 심지어 주말 아침 산책길에 뒤를 다정하게 따라오는 고양이까지……. 그들이 나를 바라봐준 덕분에 내 안에 숨어 있었던 시간들이 빛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것은 재빠르게 일상적인 시간을 대체한다. 새벽 2시에 댓글에 답하면서, 열차 창가에 스며든 이른 달빛을 베고 졸면서, 고양이 앞발에 내 뒤꿈치가 끌리는 걸 느끼면서 나는 “시간 속에서 앞으로 걸어나가지 않아도 돼요”라고 속삭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걸음이 너무 느려진다면 우리는 ‘현실’이라는 정거장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노바미디어
〈시네도키, 뉴욕〉ⓒ스폰지

  <이터널 선샤인>(2005, 각본), <시네도키, 뉴욕>(2007, 연출) 등으로 알려진 찰리 카우프만의 서사 속에서 남자 주인공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은 평론가 네이선 라빈이 정의한 캐릭터 유형인 ‘매닉 픽시 드림 걸’의 설정, 즉 “(젊은)남성들이 삶을 그 미스터리와 모험을 포함해 끌어안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싶어 하는 감수성 풍부한 작가-감독의 열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여성”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녀들은 과거가 불분명하고 주인공과의 만남에 있어 서사적인 인과 관계가 불확실하지만 독특한 철학이나 취향, 그리고 젊음(단순히 나이로 표현할 수 없는)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종종 잊거나 스스로에게 그것을 질문하는 것이다. 꿈과 현실이 뒤섞인 카우프만의 서사를 정돈하는 유일한 존재가 ‘그녀’인데, 그녀들은 예외 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을 맞는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들이, 다른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눈치채지 못한 어떤 비밀을 감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넷플릭스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첫 장면을 검은 바탕 위에 꽃무늬가 고풍스럽게 프린팅된 벽지들이 채운다. 그리고 한 여성이 나지막하게 읊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이런 생각은 한번 찾아오면 내 머리를 계속 지배한다”라는 독백이 그 위로 차분하게 포개진다. 환한 빛이 들어오지만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는 창, 벽지와 비슷한 패턴의 무늬가 수놓인 옷감들, 그 위를 배회하듯 깔리는 여성의 목소리…… 말하는 이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목소리는 벽지와 옷감을 만지고, 계단을 걷고,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도 없는 휠체어를 본다. 목소리는 남자친구 ‘제이크’를 언급하며 점점 안정된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처음이니까 흥분되고 기대돼야 마땅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고백하는데, 제이크와 헤어지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돌아오는 길’에 본 것들, 전부 똑같이 생긴 헛간들과 들판에 대해 이야기한다. 출발하기도 전에 돌아오는 길에 본 것들을 미리 얘기하는 것이다. “제이크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다. (중략) 정확히 알아야 겠어. 7주라고 해두자”라고, 그녀는 재빨리 엉킨 시간의 실타래를 풀며 확신에 찬 어조로 남자친구의 이름을 언급한다. 그때 목소리뿐이었던 그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제이크’라는 물과 햇빛을 머금자 빨간 코트, 노란 목도리, 황갈색 곱슬머리가 벽지 속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창밖의 풍경들을 모두 지워 버렸던 눈부신 빛과 같은 존재. 그 빛(제이크)의 “속을 알 수 없으니 그 기원으로 간다고 할까”라는 고백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라는 첫 대사를 시간 바깥으로 밀어낸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넷플릭스

  잿빛 눈보라 속으로 그들의 자동차가 서서히 들어간다. 제이크는 여자친구의 이름을 ‘루시’로 기억하고 있다. 루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어린 시절 추억의 불멸성이 남긴 자취에 대한 송가」라는 시를 쓴 워즈워스의 뮤즈이다. 제이크는 워즈워스가 루시라는 여자에 관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하면서, 아름답고 이상적인 여성인데 젊어서 죽는다고 했다. 여자친구에게는 ‘그녀와 너의 공통점은 이름뿐’이라고 했지만, 그녀가 대화를 통해 드러낸 직관력, 무엇인가를 다르게 보려는 태도에서는 워즈워스의 유토피아인 ‘유년의 빛’이 떠오른다. 제이크에게 고향 집은 기억의 시·공간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어두컴컴하고, 목적지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거기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여자친구뿐이다. 그런 그녀가 제이크의 요청으로 자작시를 읊는다. 「본도그」라는 제목의 시에서, 화자는 ‘넌 계속해서 늙어 가지/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지만 네 몸속 소금의 물결만 출렁인다’고 권태로운 일상에 대해 고백한다. ‘초원의 빛’을 이야기하던 그녀의 입에서 ‘완전한 망각’의 세계에 대한 증언이 흘러나온다면, 이것은 제이크의 입장에서는 악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 지쳐 가는 제이크의 진심을 꿰뚫어 보고 쓴 시라면, 그녀는 제이크를 잠시 ‘죽은 시간’으로부터 빼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방향으로든 그녀의 눈빛은 번뜩이고 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제이크를 바라볼 때도, 창밖의 공허를 노려보며 ‘네 눈은 갈망하고 있다’고 선언할 때도. 둘은 순조롭게 제이크의 기원과 가까워져 간다. 그들의 서사 속에 계속 늙은 청소부가 플래시백처럼 끼어들고, 불길하게도 그가 보고 듣는 것들이 제이크의 지식이나 기억과 병치되고 있었지만.

  제이크의 부모는 아들과 여자친구를 반갑게 맞는다. 곧 식탁이 차려지고, 시골집의 허름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음식들이 놓인다. 네 사람이 앉은 위치는 흥미롭다. 제이크와 아버지가, 여자친구와 제이크의 어머니가 서로를 마주 보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부모가 앉아 있는 곳의 배경은 환한데, 여자친구와 제이크의 배경은 캄캄하다. 여자친구보다 제이크 쪽이 더 그런데, 키에슬로프스키의 <더 데칼로그 IV>(1989)에서 서로를 너무 사랑한 아버지와 딸이 혼돈 속에서 마주하고 있을 때 그들을 감싸던 방 안의 어둠을 모사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 부녀가 그랬던 것처럼 제이크도 그 풍경 속에서 선명한 무엇인가로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식탁에서 정확하게 ‘아들’ 역할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에게 ‘다른 세계’를 가져왔다.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지만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낡아 가는 부모에게 여자친구라는 전령의 입을 빌려 유토피아를 소개하기 위해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이다. 제이크는 두 세계 사이에 놓여 있다. 마치 화가가 그림 속과 그림 바깥이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 사이에 놓인 것처럼. 그러나 화가의 발은 땅을 딛고 있고, 그림 속 세계는 허공에 있다.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두 세계에 발을 하나씩 걸치고 있거나, 혹은 어느 한 세계 속에 있으면서 다른 세계를 잠시 잊는 것뿐이다. 제이크는 전자를 택했고, 그래서 낡아 가는 이들의 ‘아들’이면서 영원히 생기를 잃지 않을 뮤즈의 ‘남자친구’로 그 식탁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유령 같은 상태의 불편함에 대해 그를 대신해 여자친구가 제이크의 부모에게 고백한다.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그녀에 대한 세부 설정-이름과 전공과 직업-은 이 영화에서 계속 바뀐다) 그녀에게 제이크의 아버지가 “그림 속에서 그 풍경을 보고 감상에 젖는 관찰자가 없다면 그림의 감정을 우리가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라고 묻자 그녀는 “관람자가 자신을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되죠. 만약에 그림 안에 그 풍경을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가 그림 안에 있으면서 자기 발을 내려다보지 않고 앞을 본다면 풍경을 보고 뭔가 느낄 거예요. 환경이 불러오는 감정은 본인의 것이지 환경의 것이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꿈과 현실의 시차. 그것 때문에 멀미를 느끼면서도 현실의 시간에 자신을 ‘적응’ 시키지 않는 자. 그가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게 아니라면 그는 얼마든지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제이크와 여자친구의 만남도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유토피아 안에서 제이크와 여자친구는 같은 소실점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제 그만 끝낼까 해〉ⓒ넷플릭스

  둘이 탄 차는 다시 잿빛 도로 위를 지나간다. 어둠과 눈보라가 덧칠되어 있어, 그들은 식탁 앞에서보다 흐릿해져 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존 카사베츠 감독의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권태로운 에세이들,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같은 텍스트들이 둘 사이의 대화에서 명멸한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여자친구는 잠시 ‘이본’이라는 캐릭터로 변한다. 이본은 플래시백처럼 계속 끼어들던 그 청소부 노인이 보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다. 그녀는 햄버거 가게에서 서빙을 하고, 남자친구가 찾아와 그녀의 일을 방해하면서까지 사랑 고백을 한다. 둘은 행복한 결말을 맞고, 청소부 노인은 엔딩 크레딧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TV 속에 있던 이본이 제이크의 여자친구가 앉아 있던 조수석에 앉아 말한다. “드보르가 말했어. 스펙터클을 단순히 매스미디어 기술이 만들어낸 시각적 속임수로 이해해선 안 된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구현된 세계관이다.”

영화의 화자인 제이크의 여자친구가 설정이 계속 바뀌는 것도 모자라 잠깐 엉뚱한 캐릭터로 변했다가 돌아오기까지 할 때, 우리는 이 영화가 대체 ‘누구의 이야기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기 드보르의 얘기처럼,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스크린 앞의 우리를 완전히 잊는다. 그리고 그 영화가 로맨스 서사인 경우, 주인공이 남자라면 그의 여자친구가 우리의 여정을 안내한다. 그런데 그녀가 길을 잃거나, 자신의 설정을 헛갈리거나, 주인공에게 ‘내가 왜 너를 사랑해야 하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서사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제이크의 여자친구는 명확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대신, 제이크가 우리를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이끈다. 그들은 제이크가 다녔다고 ‘주장하는’ 한 고등학교에 도착하고, 제이크는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여자친구를 차 안에 남겨두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초조함과 두려움 때문에 여자친구는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서사에 간헐적으로 끼어들던 그 청소부 노인과 만난다. 그녀는 “제 남자친구가 여기 들어왔는데, 혹시 그를 보셨나요?”라고 묻고, 노인은 “남자친구가 어떻게 생겼죠?”라고 그녀에게 되묻는다. 하지만 그녀는 제이크에 대해 잘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왜 (그에 대해) 기억하겠어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라는 말까지 한다. 그런 그녀에게 노인은 답한다. “아무도 못 봤어요.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보여요”라고. 그리고 둘은 거기서 작별한다. 마치 이것이 정말 이 영화의 제목에 들어 있는 ‘엔딩’이라는 단어를 설명해준다는 듯이.

〈이제 그만 끝낼까 해〉ⓒ넷플릭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넷플릭스

  이 영화에서 그녀를 있는 그대로 봐 준 것은 그 노인뿐이다. 그전까지 그녀는 제이크를 통해서만 재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설정을 바꾸면 그녀는 그것을 의아해하면서도 받아들였고, 그가 없으면 그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분명 제이크에게 유토피아의 전령 같은 존재였는데도, 그녀는 서사 안에서 줄곧 소외되고 있었다. 만약 노인이 제이크와 여자친구의 로맨스라는 영화의 관객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엔딩’은 관객의 ‘그녀(혹은 그녀들)’에 대한 사과일까? 혹은 ‘그녀’를 통해서만 열 수 있는 꿈의 허구성을 인정하는 환멸의 태도일까?

  마지막 두 시퀀스에서 제이크와 여자친구는 사라진다. 한 시퀀스에서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음악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한 쌍의 발레리나가, 다른 시퀀스에서는 그들과 외모는 같지만 ‘유토피아’의 반대편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늙어버린 제이크와 여자친구가 등장해 ‘현재 시점’의 그들을 대체한다. 카우프만 감독은 청소부 노인에게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멘타인도, <아노말리사>(2016)의 리사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시네도키, 뉴욕>에서 죽어 가는 케이든의 머리를 무릎에 놓고 그를 다독이던 ‘엄마 역할’의 배우조차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러나 환한 빛 속에서 연인의 ‘처음 순간’을 재현하는 발레리나의 몸동작과 미소는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 작은 숨결 하나만 닿아도 부서질 것 같은 투명함을 보여준다. 그 순수한 세계는 영화 속에만 있을까? 아니면 영화 속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영화가 순수에 도달하는 유일한 통로는 아니지만, 극장이 하는 일은 현실과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시간과 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쉽게 사랑에 빠지고 예정된 결말에 도달하는 연인을 만날 수도 있고, 혼돈의 세계에까지 도달한 연인을 만날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영화에서든 우리 내부에서든 그들의 ‘순수’는 완벽하게 가리거나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클레멘타인과 리사는 ‘술주정’이나 ‘이를 딱딱거리는 습관’ 같은 현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 그대로 주인공 혹은 세계를 사랑하려고 한다. 영화는 그런 그녀들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를 만났을 때 우리는 그녀에게 뮤즈가 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단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전까지 그녀의 얘기를, 그녀를 따라온 풍경들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면 될 뿐이다.

 

 

* 《쿨투라》 2020년 10월호(통권 7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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