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Theme] 커피와 공간, 그리고 음악
[11월 Theme] 커피와 공간, 그리고 음악
  • 서영호(음악가)
  • 승인 2020.11.02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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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국 사회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불리는데 종종 쓰이는 말은 ‘카페’ 혹은 ‘커피숍’이다. 커피를 파는 가게로서의 ‘커피숍coffee shop’이란 말이야 더 궁금할게 없겠지만 커피라는 말과 어떤 유사성을 떠올리게 하는 ‘카페ca(fé)’는 불어로 곧 커피라는 뜻이다. 원래 카페는 가벼운 식사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간편한 레스토랑을 말하는데 영국에서는 17~18세기 런던을 중심으로 이미 3000여개의 커피숍이 생겨나 문인이나 정치인들의 사교장 구실을 하였다. 한국의 경우도 과거에는 서양풍의 고급스러운 커피숍이나 조그마한 바(bar) 형태의 술집을 카페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공간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쓰인다.


  한국에서 커피와 차를 마시는 공간의 대명사가 다방에서 카페로 바뀌게 된 것은 단지 명칭뿐만 아니라 커피와 그를 둘러싼 공간의 문화가 바뀌었음을 뜻한다. 2000년대 무렵부터 스타벅스 등 외국의 대형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국내 론칭을 시작으로 한국의 카페문화는 새로운 변화을 겪어 온 듯하다. 달달했던 다방 커피에서 아메리카노로 옮겨가며 휘몰아친 커피열풍이 가져온 카페문화의 변모와 부흥은 한국을 커피소비 세계 3위의 커피공화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변화속에서 카페라는 공간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는데 이제 카페는 단지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만이 아니다. 특히 눈여겨 볼 변화라면 혼자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시험공부를 하는 등 카페가 일종의 독서실과 작업공간으로 활용되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나태해지기 쉬운 자신만의 공간을 떨치고 나와 불특정 다수가 만들어 내는 화이트노이즈 속에서 오히려 집중력과 긴장감이 높아진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부류들에게는 어느 카페가 커피맛이 좋냐하는 것이 꼭 카페 위시리스트의 최상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느 카페가 너무 시끄럽지 않은지, 장시간 앉아있기에 의자는 편한지, 냉난방은 적절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와이파이가 잘 터지고 전기 사용 등 편의 시설이 잘 확보되어 있는지가 중요한 정보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있으니 바로 카페의 음악 환경이다.

 

  여기서 음악은 다분히 기능적인 요소로 전락한다. 물론 과거에 종종 있었던 ‘음악다방’ 같이 특화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인 카페라는 공간의 주 목적이 음악감상이었던 적은 없었고 음악은 여기서 언제나 적당히 공간을 채우는 배경으로 쓰여왔다. 그런데 오늘날 카페를 일종의 독서공간 혹은 문서작업을 비롯한 각종 작업공간으로 활용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이른바 ‘카페음악’에도 섬세하게, 특정한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그것은 곧 이용자들의 공간에 대한 욕구(want) 에 더 예민하고 철저하게 부합하려는 음악들만이 카페의 플레이리스트로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담소를 나누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워킹족들에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정확히는 ‘흘러 나왔으면 하는’ 음악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원하는 만큼의 존재감만을 요하는 대상이 되었다. 즉 여기서 음악은 다른 이들과 나 사이에 청각적 가림막이 되어 주어야 하고 내 사고의 흐름을 방해하지는 않되 몰입의 고삐를 잠시 놓았을 때는 또 온화하고 은은하게 음악 본연의 힐링을 제공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카페음악에 대한 조건은 먼저 다른 이들의 대화가 내 귀까지 도달하는 것을 막아줄 정도의 적당한 음량이다. 카페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공간은 커피의 향은 물론 음악으로 메꿔져야 한다. 이 향과 음악의 공간은 그들과 내가 서로의 존재에 의해 과하게 침범당하기 않기 위한 후각적, 청각적 완충지대이다. 그리고 이 음악은 기본적으로 내 사고의 흐름 자체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 적당한 볼륨은 물론이고 감정의 기복을 뒤흔들어 놓을 다이나믹은 없는 음악이 좋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이야기나 메시지가 귀를 빼앗는 가요보다는 그 내용이 잘 안들리는(?) 팝이 적절하다. 그리고 아예 음들의 기하학적 배치만으로 다가오는 연주음악이 더 적격이겠다. 바로크 음악이 공부할 때 좋은 음악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런데 클래식 음악은 소리가 작은 부분과 큰 부분의 기복이 큰 경우가 많아서 존재감의 일관성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카페음악의 주요 레퍼토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결국 재즈와 뉴에이지 장르이다. 이 두 장르를 필두로 가볍게 들을 수 있는 팝음악이 카페음악의 단골 목록이 되었다. 이 음악들은 감정의 다이나믹이 적다. 감정의 깊은 몰입과 공감을 동원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다. 감정적으로 애절한 만남을 갖지 않고 적당히 만나고 적당히 헤어지고 떠나보낼 수 있는 음악들이다. 이 음악들은 공간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다분히 기능적이고 부차적인 역할에만 성실히 복무할 수 있는 음악들이어야 한다. 들리되 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불가청성의 원리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팝 음악중에서도 이러한 성격에 잘 부합하는 것들이 카페를 중심으로 많이 소비되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일부 창작자들을 이런 음악의 창작에 몰두하도록 유혹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카페음악을 위한 선곡에서는 음악의 세세한 완성도와 짜임새보다는 적당한 분위기 연출을 위한 사운드와 심상위주의 적합도로만 적격여부가 판별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음악 환경의 디지털화와 더불어 가증되었다.

 

  음악이 음반이라는 물질적 제한에서 풀려나 디지털 음원으로 콘텐츠화 되면서 이제 음반 단위에서 개별 곡 단위로 유통되게 되었다. 그리고 음원의 디지털화는 특정한 주제 아래에 해당음악들을 선별해서 불러모으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제 멜론 등은 물론 유튜브 등 사용자 참여가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는 플랫폼들에서 각종 쓰임에 맞는 선곡모음 콘텐츠는 일반 유저들에 의해서도 다양하게 생산되고 소비된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수요가 맣은 것이 ‘카페음악’ 모음, 혹은 ‘공부할 때 좋은 음악’ 부류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곡모음 구성 곡들을 자세히 들어보면 사람이 연주한 음악이 아닌 컴퓨터에 연주 정보를 입력해서 실연시킨, 다소 부자연스러운 음악들도 종종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컴퓨터에 의해 쉽게 연주와 창작이 가능하고 편집과 조합을 통해 유사한 음악을 무수히, 빨리 ‘찍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음악들에서 발견되는 완성도의 질이나 미적 조악함은 독립적인 예술작품으로서의 음악이라기엔 자격미달인 경우가 많으나 카페의 소음에 숨겨지고 카페음악이라는 목적성에 의해 묵인 혹은 간과되고 있다. 특히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중소규모의 카페들에서는 유튜브 검색 등으로 손쉽게 찾아 틀 수 있는 이런 ‘카페음악 선곡모음’ 부류에 많이 기대고 있으며 이러한 리스트에 위와 같은 음악들이 스멀스멀 끼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가담하는 창작자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까다로운 청자는 어느 카페브랜드의 음악이 기능은 물론 미적 즐거움까지도 충실히 충족시켜주는지 주목한다. 이제 우리는 스타벅스의 매장음악이나 이디야 매장음악의 성격이 각각 어떤지까지 구분하는 정도가 되었다. 실제로 글로벌 커피프랜차이즈의 경우 별도의 전문가에 의해 매장음악이 관리되고 있으며 이는 브랜드 이미지와 가치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점점 더 기능과 편의 위주의 목적지향적인 음악들이 카페음악의 리스트를 잠식함으로써 생산과 소비 모두에서 ‘카페를 위한’ 음악의 성향은 더 형식주의와 기능주의로 향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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