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Theme] 나도 이런 카페의 단골이고 싶다
[11월 Theme] 나도 이런 카페의 단골이고 싶다
  • 손세실리아(시인, 책방카페 <시인의집> 대표)
  • 승인 2020.11.02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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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리다, 이 말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매수자를 만나지 못해 몇 년째 인터넷에 떠돌던 마을의 천덕꾸러기 폐가를 구입한 일이며,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카페를 겁 없이 시작한 일 말이다. 만일 그 방면에 해박했다거나 오래 준비했다면 가능했을까? 아니다. 겁이 나서 뒤로 물러섰거나, 남들처럼 막연히 꿈만 꾸다가, 꿈에서 그치고 말았겠지.

 

  몇 천만 원에 불과한 집값조차 지인의 도움을 받았을 만큼 어려운 처지였던지라 커피 관련 수입 기계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언감생심이었다. 다만 의자와 커피잔엔 나름 거금을 투자해 오래 앉아있어도 편안한 천연 세무 의자와 온도가 오래 유지되는 묵직한 수입 도자기를 장만했다. 그 이외엔 진심이 느껴지고 오래 기억될 공간 연출에 심혈을 기울였고.
  시와 커피, 고요가 바로 그것이다.
  재산 목록 1호인 친필사인본으로 벽면을 채웠다. 그것도 시집으로만. 시를 손에서 놓아버린 지 오래된 이들이 몇 편이라도 읽었으면 싶은 바람에 그리했던 것인데 간혹 시집을 펼치기도 했지만, 작품으로만 알고 있던 시인의 육필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더 많았다.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커피, 그건 프랑스 M사의 하드포드와 원두로 결정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내 미각을 오랫동안 충족시켜줬으므로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거다. 지금이야 상황이 호전됐지만, 9년 전엔 카페 고수들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를 만큼 입지조건치곤 최악이다시피 한 바닷가 시골마을, 후미진 골목에 생초보가 카페를 오픈했다. 일체의 홍보도 없이 그야말로 도둑처럼, 슬그머니.

 

  첫 손님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이렇게 물었을까.
  “여기 뭐 하는 곳이에요? 커피도 마실 수 있나요?”
  바다 뷰가 펼쳐지고, 친필사인본 시집이 꽂혀 있는 내부를 둘러보며, 오페라 몇 곡을 심취해 커피를 마시고 자리를 뜬 중년의 여성분은 이후 지금까지 줄곧 단골이시다. 첫날은 한 잔, 이틀째 되던 날은 석 잔, 일곱 잔, 다시 한 잔……, 별 기대 없이 주문한 커피에 만족한 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늘까지 왔다.
  에스프레소 맛에 빠져 주말마다 방문하는 청년이 있었다. 하루는 가로수며 신호등조차 뽑히고 쓰러질 정도인 태풍 속을 운전해 서귀포에서 조천까지 왔다기에 걱정스러워 한마디 했다. 처음 나눈 대화다.
  “커피 한 잔 마시자고 궂은 이 날씨에 여기까지 오는 건 좀 무모하지 않나요? 앞으로도 이곳을 자주 방문할 것 같으니 커피만큼, 아니 커피보다 더 귀한 가치를 알려줄게요.”
  카페 주인이라기보다 인생의 선배라는 마음으로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고, 원하면 시집을 추천해주겠노라 했다. 생이 풍요로워지고 심미안이 생길 거라는 말에 머쓱하게 웃던, 밥벌이로 각박하게 살다보니 교과서에 나왔던 시도 오래돼서 다 까먹었다는, 책만 보면 졸음이 쏟아진다던 J. 이후 J는 추천해 주는 시집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분야에도 눈을 떠 인문학적 소양이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문학, 예술, 종교, 철학, 물리, 역사… 기타 등등까지. 시가 한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게 발전시키는 벅찬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이라니.

 

  2012년 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읽기를 원했으나 사진촬영용에서 그치고 마는 벽면의 서가를 치웠다. 그 자리엔 소장하고 있는 그림을 전시해 감상할 수 있게끔 갤러리로 꾸몄고, 가장 좋은 자리엔 시집이 90퍼센트를 넘는 책방 코너를 신설했다. 다음 독서로 이어질 마중물이 되겠다 싶은 책을 엄선해 저자에게 친필 사인을 부탁드린 다음, 그것만으로 꾸려가는, 친필사인본 책방&카페를 탄생시킨 것이다. 다만 공간의 고요를 지키기 위해 카페손님전용 책방이라 못박았다. 당연히 덜 팔릴 걸 각오한 행보였는데…, 이런 취지를 존중하는 마니아, 아니 개 업초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어지는 인연과 인연 덕에 책의 흐름이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으니 보람이 크다.
  커피도 달라졌다. 커피에 심취해 오랜 기간 공부하고 연구해온 카톨릭바리스타협회 이경훈 신부님의 도움으로 이전과 다른 커피를 선보였는데 같은 듯 다른 매혹으로 미각을 사로잡아 만족도가 높다. 신선하고 맛있는 최고 등급의 생두를 선별해 각각의 특성에 맞게 로스팅한 다음, 잔열로 뜸들인 후, 숨 쉬는 항아리에 담아 18에서 20도의 온도가 유지되게 숙성시킨 커피. 그 수익금이 카톨릭 선교와 이웃사랑 실천에 사용된다니 커피 한 잔의 선한영향력에 뿌듯하고 으쓱하기까지.

 

  처음엔 백 년 된 바닷가 폐가에 홀렸다 생각했다.
  리모델링을 마치고 나서는 수상가옥 같은 아름다움에 심취해 내 선택의 탁월함에 무릎을 쳤다. 인생의 로또 당첨이라고까지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였는지 안다. 내가 집에 홀리고, 선택한 게 아니라, 집이 나를 선택했고, 기적처럼 선물처럼 이 모든 걸 가능케 했음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바다는 만조다. 이런 땐 선상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시를 읽고, 누군가는 드로잉을 하고, 누군가는 차를 마시고, 누군가는 담소를 나누고, 누군가는 토막잠에 취해 있다. 여긴 그 누군가가 주인이다. 내 사는 방식을 부러워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들에게 난 이렇게 답하고.
  “부러워요. 저도 이렇게 살고 싶어요.”
  “부럽긴요. 나는 이런 카페의 단골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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