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10] 5공화국과 3S정책이 만든 스타들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10] 5공화국과 3S정책이 만든 스타들
  • 오광수(시인, 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20.11.26 09: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0년 5월 광주에서 피의 역사를 쓴 끝에 전두환 정권이 우민화 정책으로 불리는 3S(스포츠, 스크린, 섹스)정책을 전개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통금을 해제하고, 프로야구를 출범시켰으며, 스크린 등에 가해지던 검열을 완화했다. 권력을 잡은 이들이 대놓고 3S를 표방한 건 아니지만 국민들의 저항을 의식해서 적극적으로 정책을 추진한 흔적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3S정책은 우리 대중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당대를 살았던 이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청와대 정무1비서관 허문도는 공영방송인 KBS에 대학생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대규모 축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년의 열과 의지와 힘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여의도광장과 둔치 마당에서 5일간의 축제가 진행됐다. ‘국풍 81’이 그것이었다. 행사 기간 동안 야간통행금지도 일시 해제됐고, 전국 198개 대학의 6천여 명의 학생과 일반인 7천여 명이 참가하여 민속 문화를 중심으로 한 각종 공연·대회·축제·장터 등이 진행됐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은 연 16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이 행사에 돈을 받고 동원된 대학생들을 독재정권의 협력자라고 성토했다.

  이 행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행사의 하나로 열린 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가수 이용과 옥슨 81이었다. 이용은 <바람이려오>를 불러서 깜짝 스타가 됐다. 좀 과장하자면 서슬 퍼런 독재정권이 키우는 가수가 된 것이다. 생방송으로 가요제가 중계된 것은 물론이고 KBS와 MBC가 합세하여 연일 그를 출연시켰다. 옥슨 81이 <날개>라는 노래로 은상을 차지했지만 이용의 거센 바람에 묻혔다. 3S 정책으로 인해 80년대 에로영화가 봇물을 이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로마시대 독재자들이 원형경기장을 만들어서 시민들에게 검투사의 경기를 즐기도록 만든 것처럼, 전두환정권은 섹스를 앞세운 영화로 국민들을 현혹시켰다. 1982년 31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애마부인>(감독 정인엽)은 가장 큰 정책의 수혜자였다. 통금 해제된 거리로 몰려나온 청년들이 앞다퉈서 영화관을 찾았다. 1대 애마부인 안소영은 에로영화계의 뮤즈로 떠올랐다. 또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1981, 감독 김호선),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1, 감독 정진우)를 통해서 장미희와 정윤희가 섹스 심벌로 떠올랐다. 통계에 의하면 1982년 개봉된 영화 56편 중 35편이 에로 영화였다. 에로영화의 계보는 80년대 내내 이어진다.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이보희는 육감적인 몸매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미숙의 인상적인 연기를 엿볼 수 있는 <뽕>(1985, 이두용)도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에로영화였다.

  이후 에로영화는 갈수록 수위를 높이면서 영화관을 살색으로 물들였다. 김수형 감독의 <산딸기>, 박호태 감독의 <빨간 앵두>등이 경쟁적으로 충무로에 내걸렸다. 엄종선 감독의 <변강쇠>와 유진선 감독의 <매춘>등 대부분의 영화들은 한 편으로 그치지 않고 시리즈로 이어졌다. 70년대 액션배우였던 이대근은 80년대 이후 남자배우를 대표하는 ‘힘의 상징’이 됐다. 여기에 80년대 비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불법 섹스비디오 복제물들이 일본과 미국과 유럽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규제완화’를 틈타서 흘러들어온 북제물들이 안방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이 같은 정책이 우리네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80년대는 금지됐던 욕망들이 대폭발한 시기였다. 대중문화에서 성이 넘쳐 나면서 현실 시장에서도 성이 상품화됐다. 오늘날 고급 유흥가로 자리 잡은 테헤란로와 강남 지역에는 아파트가 들어서는 속도로 유흥거리가 자리 잡았다. 수많은 숙박업소와 ‘여자’와 관계되는 술집들이 들어서면서 다양한 형태의 매춘은 일상화됐다. 1970년대 권력자 박정희가 밀실에서 명을 다하고, 일본에서 몰려온 일본인들이 요정을 출입했지만80년대 들어서는 밤문화가 보편화한 것이다. 흔히 닭장으로 통했던 디스코 나이트클럽을 비롯하여 중년들의 무도장인 카바레, 각종 야한 쇼를 보여주던 나이트클럽, 스탠드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스탠드바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형태의 밤업소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그런 문화 속에서 스타들도 밤무대를 중심으로 수익을 올렸다. 우리가 익히 아는 나훈아와 조용필은 밤무대에서 특급대접을 받는 가수였다. 그들이 출연한다는 이유만으로 도시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또 이주일 등 코미디언도 매일 밤 밤무대에서 개그와 노래로 취객들을 유혹했다. 또 한편에서는 록음악을 주로하는 밴드들과 DJ들이 밤무대를 누비면서 수익을 챙겼다. 시나위와 부활, 백두산 등 지금은 전설이 된 밴드들이 나이트클럽 무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손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디스코텍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것만으로도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DJ들도 많았다. 어떤 DJ가 출연하느냐에 따라 매상이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처럼 밤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각종 규제를 풀고 경기를 활성화하겠다는 정권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말하자면 3S 정책이 88년도에 와서 완성형이 된 셈이다. 이 같은 정부의 정책들은 당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어찌 보면 물질만능의 풍조가 숭배를 받게 된 배경에는 80년대 밤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억눌려있던 욕망들을 마음껏 분출하면서 개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오광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저서로는 시집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시해설집 『시는 아름답다』, 대중문화에세이집 『낭만광대전성시대』 등이 있다. 현재 대중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 《쿨투라》 2020년 11월호(통권 77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