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탐방 3] 강릉, 시를 걷다: 강릉 문화
[지역문화탐방 3] 강릉, 시를 걷다: 강릉 문화
  • 박용재(시인, 가톨릭관동대 교수)
  • 승인 2020.11.2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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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맑은 날 대관령 정상에서 강릉을 내려다보면 ‘아 저곳은 신의 정원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멀리 바다가 삶의 시원처럼 펼쳐지고 호수가 맑은 눈동자를 빛내고 엷은 안개가 허리를 두른 산 아래 풍경들이 마치 하나의 정원처럼 보인다 . 신라시대부터 현대까지 그토록 많은 시인들이 강릉을 노래한 이유로 읽힌다. 산, 호수, 바다가 삼합(三合)을 이룬 ‘신이 선물한 정원’을 시로 쓰고 읽고 노래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 강릉문화는 강릉지역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정이 넘치는 삶을 시인들이 자신의 마음거울(心鏡)에 비춰 빚어낸 시문학이 근간을 이룬다. 여기에 천년축제인 단오부터 서정적인 가사의 농악과 민요, 영화와 커피까지 4계절 부채살처럼 펼쳐진다. 강릉문화는 대관령과 바다로부터 이야기가 모여 들어 호수에서 하나가 된다. 산의 양(陽)과 바다의 음(陰)이 경호(鏡湖)로 모여 아름다운 연꽃의 미소를 펼쳐 보인다.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대관령에서 강릉의 시여행을 떠나보자.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김시습의 대관령은 어땠을까? 매월당이 조카를 내쫓고 권력을 찬탈한 세조에 환멸을 느껴 세상을 떠나 강릉지방을 주유하면서 쓴 시다.

대관령에 구름 처음 걷히니
정상의 눈은 아직 남아 있네
양장처럼 산길은 꾸불꾸불하고
조도같은 역촌은 멀기도 하네
늙은 나무 신당을 감싸고
맑은 안개 바다에 접했구나
높은 곳에 올라 시 지으니
풍경이 사람 흥을 돋우네

  김시습의 시 「대령운초권(大嶺雲初捲)」이다. 대관령의 정취와 화자의 심경이 잘 어우러진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면 강릉의 모습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조선시대의 지성인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떠오른다. 풀과 벌레를 대상으로 그린 <초충도>를 통해 은은한 화풍을 만들어낸 시인이자 화가인 사임당의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 마음을 스친다. 친정 어머니를 그리는 시로, 대관령 고갯길에서 친정 북촌(현 오죽헌)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인 신사임당의 사모의 정이 눈물짓게 한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홀로 서울로 가는 이 마음
고개 돌려 바라보니 북촌은 아득한데
저문 산에 흰구름만 날아 내리네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 또한 고향 강릉을 그린 시를 여러편 남겼다. 그는 강릉 경호(鏡湖)가에 최초의 사설 도서관인 ‘호서장서각’을 을 지어 100권의 책을 소장하고 언젠가 돌아가 책 속의 좀 벌레가 되어 살고 싶어했다. 조선의 이단아이며 반항아였던 그는 140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소나무고개 넘어 대나무길 맑은 안개
고향집 있는 명주는 두 번째 동천이라네
집 주변 계곡물 소리 멀리서 들려오니
발걷고 고운 산색 보며 나를 연민하네

  허균은 우리나라 빼어난 경치를 지닌 12곳 중 강릉을 두 번째라 했다. 강릉은 『동국여지승람』 강릉대도호부 누정조(樓亭條)에서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이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이라고 할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의 정취를 지녔다. 특히 거울호수로 불리는 ‘경호(鏡湖)’는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호수에 얽힌 설화를 비롯한 인문자산 역시 다양하게 존재해 많은 문인들이 찬송시를 썼다. 화가로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으로 남겼다. 경호의 빼어난 경치를 상징하는 ‘경포팔경(鏡浦八景)’이 있는데, 녹두봉에서 맞이하는 일출〔綠豆日出〕, 죽도에서 바라보는 달빛〔竹島明月〕, 강문 앞바다의 수평선에 걸린 고깃배 불빛〔江門漁火〕, 초당마을의 밥짓는 연기〔草堂炊煙〕, 홍장암에서 듣는 밤빗소리〔紅粧夜雨〕, 증봉에서 바라보는 낙조〔甑峰落照〕, 환선정에서 듣는 신선의 피리소리〔喚仙吹笛〕,한송정의 저녁 종소리〔寒松暮鍾〕등이 그것이다. 경호와 경포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풍광이 다르다. 바람의 느낌도, 놀러 오는 새들의 날갯짓도, 하늘가 노을색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경호의 멋스러움이 시와 함께 연상된다. 강릉의 12향현 중 한명으로 세상 일에 초연한 삶을 산박수량의 경포대를 읊은 시는 맑다.

거울 같은 수면 물 속 깊은데
형상은 비추나 내 마음까진 못 비추네
만약 마음까지 들어내 훤히 비춘다면
경포대에 오를 사람 몇이나 될까?

경포대를 지난 호수길을 걷다 보면 고려말 조선초 홍장과 박신의 러브스토리가 담겨 있는 ‘홍장암’과 ‘홍장고사’를 만난다. 관찰사 박신이 강릉에서 홍장을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로 서울로 간 님을 그리워하는 홍장의 시조는 김수장의 「해동가요」에 실려있다.

한송정 달밝은 밤 경포대의 물결잔 제
유신한 백구는 오락가락 하건 만은
어찌해 우리 왕손은 가고 아니 오는가

  안개 낀 호수 위에서 뱃놀이를 하는 친구 두명, 당시 조운흘 강릉부사는 사랑에 빠진 친구를 놀려주기 위한 퍼포먼스를 꾸민다. 박신은 ‘홍장이 죽었다’는 친구의 말에 낙담한다. 그런데 갑자기 배 한척이 나타나고 그 배에 홍장이 타고 있는 게 아닌가? 죽었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니 꿈인지 사실인지 분간을 못하는 박신. 이같이 친구 박신을 놀려주기 위해 강릉부사 조운흘이 벌인 마치 연극같은 그림배놀이(신선놀이)는 그 옛날 사랑의 유희로 읽힌다. 홍장설화는 후일 교산 허균이 「호정(湖停)」이라는 시로 읊었으며, 우암 송시열도 홍장암 부근에서 듣는 피리소리를 소재로 한 경호와 홍장을 노래한 「홍장문적(紅裝文籍)」을 남겼다. 조선 시대 문인 어촌 심언광은 10년의 시간을 허비해도 좋으니 경호에 살고 싶다 했다. 그의 시 「경호복거(鏡湖卜居)」다.

수심 깊은 호숫가 작은 섬에
십년을 허비해도 살고 싶은 마음 뿐이네
어느 달 밝은 날 홀로 배를 타고
청삼을 입었으니 옛 한림이구나

  경호를 지나 초당의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에 가면 조선 중기 빼어난 문장으로 유명한 허씨 5문장가 (허엽, 허성, 허봉, 허균, 허난설헌)의 시를 만날 수 있다. 이중 조선중기 대표적인 시인 허난설헌의 시는 애틋하다. 그는 불운한 생을 살다 스물일곱살에 세상을 떴다. 당시에는 너무 야하다 하여 문집에 실리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시가 「채련곡」이다.

거울 같은 호수의 푸른 물 옥같고
연꽃 핀 깊은 곳에 목란배 매어 두었지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따 던지고서
행여 누가 볼까 반나절 부끄러워 했네 

  거울 같은 호숫가에서 사랑하는 임에게 연밥을 따던지고는 누가 볼까 한없이 얼굴 붉힌 처녀의 모습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두 자녀를 먼저 보낸 슬픈 가족사를 지닌 난설헌의 삶과 대비하여 꿈많던 소녀시절 순수한 사랑에 대한 심경이 읽혀진다. 그 시에 화운(和韻)하여 시 한 편 적어본다.

부끄러움에 관하여
-채련곡(採蓮曲)

가을호수는 너무 맑아서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 들킬까 봐
물 속 깊은 곳에 숨겼건만
바람은 어찌 그 마음 알았는지
붉은 얼굴로 내가 딴 연밥 싣고
그대 있는 쪽으로 불어가네

  경호를 지나 드디어 만나는 강릉 바다는 그 색감이 이뻐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공간이다. 봄이면 해당화 가득피고 먼 여행을 떠났던 황어들이 돌아와 하늘로 박차 오른다. 강릉문화를 대관령에서 경호를 거쳐 바다까지 지금까지 남겨진 시문학을 통해 짧게 여행해 보았다. 이밖에도 300년 명품고택 선교장, 해안의 절벽이 부채살같이 이쁜 부채길, 신라 향가 「헌화가」의 무대였던 헌화로 등이 있다. 시를 읽으며 강릉 여행 계획을 짜고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함호영 시, 홍난파 작곡의 <사공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앞의 인용된 시는 필자가 의역했음을 밝힌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
이 배는 달 맞으러 강릉 가는 배
어기야 디어라차 노를 저어라
순풍에 돛달고서 어서 떠나자
서산에 해지면은 달떠 온단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가네
물 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

 

* 《쿨투라》 2020년 11월호(통권 7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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