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너의 목소리가 들려: 〈비밀의 숲〉 〈시그널〉 〈보이스〉
[드라마 월평] 너의 목소리가 들려: 〈비밀의 숲〉 〈시그널〉 〈보이스〉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0.11.2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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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다양한 얼굴 〈여자 형사〉
ⓒtvN

  평범한 사람이 경찰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사고를 치거나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우리가 아는 경찰의 대다수는 현실이 아닌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 존재한다. 일상과 가장 가까운 미디어인 드라마에서 ‘여자’ 경찰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 한국의 대표적인 범죄 수사드라마 <수사반장> (1971~89)은 시청률 70%를 넘나들며 오랜 시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때 등장만으로 화제를 모은 인물이 있었다. 남초현상이 심각했던 드라마에 홍일점 역할을 맡았던 ‘여순경.’ 여러 배우가 거쳐 간 ‘여순경’ 역할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며 스타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화제는 딱 ‘등장’뿐이었다. 한 토크쇼에서 여순경 역을 맡았던 배우 오미희는 “범인이 잡혔습니다”, “반장님, 전화 받으세요”와 같은 대사만 하고 “여순경이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당시 범죄 수사드라마에서 ‘여성’ 수사관의 비중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tvN

  여자 형사는 로맨스와 함께

  2000년대 초반, 드디어 ‘여자’ 형사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등장하였다. <조선 여형사 다모>(2003)의 ‘여형사’ 채옥은 조선 한성부 좌포도청 소속으로 여러 명의 남자를 한꺼번에 제압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무도에 오른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극중 형사로서의 활약보다는 두 남자에게 사랑받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유명한 대사는 상처 입은 채옥을 치료하며 그녀의 아픔을 자신의 몫으로 감당해내는 ‘황보윤’의 가슴 아픈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여자 형사가 주인공인 로맨스물이랄까. <히트>(2007)에서는 여자 형사 최초로 ‘팀장’이 등장한다. 일주일에 평균 닷새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기에 늘 머리는 부스스하고 훈장처럼 발에는 무좀을 달고 사는, 한국최초의 여성 강력반장 차수경. 배우 고현정이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민낯으로 연기했다고 해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극 중 차수경은 연쇄살인범에 의해 연인이었던 동료 경찰을 잃고 그 연쇄살인범에 의해 새 연인인 신임 검사까지 잃을 상황에 놓인다. 자신의 미숙함 때문에 연쇄살인범을 놓쳤단 생각에 그녀는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사격 실력으로 명사수가 되고, 결국엔 자신의 총으로 범인을 검거한다. 미숙한 신입 경찰에서 프로페셔널한 강력계 팀장으로 성장하는 여자형사의 성장 스토리라는 점에서 <시그널>(2016)의 ‘차수현’을 연상시킨다. 이름도 꼭 자매 같다 . 하지만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특히 범인 검거 후 상반된 모습에서 장르적 차이를 명확히 한다. 긴박했던 순간이 지나가고 황폐한 사건 현장에서 차수경 팀장은 연인이자 검사이자 사건 피해자인 김재윤에게 묻는다. “지금 나 키스하고 싶으면 저질이에요?” 이어질 장면은 상상에 맡기겠다. 배우 하정우의 풋풋한 로맨스 연기를 확인하고 싶다면 꼭 시청하시길.

  좋은 형사라고 불러다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범죄수사 장르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2010년대부터다. 여자 형사 캐릭터도 로맨스물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형사’로서 보편성을 확보하는 한편 ‘여성’으로서 특수성을 강조하여 남자 형사들과 차별화된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미세스 캅>시즌1·2 (2015~2016)은 그동안 드라마에 나온 여자 형사의 전형성을 해체하는 파격을 시도한다. 강력계 형사이고 팀장인 것은 여전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들이 미혼이 아니라 기혼이라는점이다. 시즌 1의 최영진 팀장은 남자도 상대하기 힘든 흉악범들을 단 몇 마디에 기를 죽이거나 꾀어서 수갑을 채우는 ‘능구렁이 경찰 아줌다’다. 시즌2에서는 여자 형사의 여성성이 더 두드러지는데, 시즌 2의 고윤정 팀장은 미스코리아급 외모에 까만 매니큐어, 세련된 옷차림, 그리고 직설과 독설이 취미인 ‘다혈질 경찰 아줌마’로 오랜 해외 근무와 FBI 연수까지 마친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 형사다. 그동안 드라마 속 여자 형사는 남성에게 육체적으로 뒤처지지 않는, 혹은 남성을 압도하는 체력과 무술 실력이 있는 것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남성성에 대한 모방 혹은 동경이 엿보이는 ‘남성적인’ 여자 수사관 캐릭터에서 벗어나 육체적 강인함보다는 현장을 통제하는 카리스마와 지능 수사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점차 형사 개인으로서 단독성과 주체성이 강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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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그널>(2016)의 차수현 형사는 ‘여자 형사’의 특수성으로 시작해 ‘좋은 형사’의 보편적 성장 스토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주인공 차수현은 형사기동대 신입 순경이었을 때 ‘점오(이분의 일)’이라고 불리며 그녀를 경찰이 아닌 여자로 대하는 동료 남자 경찰들에게 무시를 당하지만 이재한 형사를 멘토 삼아 베테랑 형사로 성장한다. 훗날 그녀는 장기미제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한편 자신을 이끌어주었던 이재한 형사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는데, 그 과정에서 장기미제전담팀 팀장으로서 경찰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프로파일러 박해영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리드하며 카리스마 넘치게 팀을 이끈다. <시그널>의 차수현 팀장이 냉철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 형사로서 현장에서 다져진 실전 감각을 뽐낸다면, 시즌제 드라마 <보이스>(2017~2019)의 강권주 골든타임팀장은 미국 유학파 출신의 긴급 신고 전문가로서 체계적이고 절제된 리더쉽을 선보인다. 그녀는 코드제로 상황이 발생하면 팀원들에게 각각 역할을 부여하고 지시하면서 수사를 진두지휘한다. 그녀의 강력한 통솔력은 시즌1에서 무진혁 형사와 협력관계를 구축할 때 빛을 발하는데, 자신의 아내가 죽게 된 것이 강권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무진혁 형사의 분노에 맞대응하지 않고 그를 차분하게 설득하여 사건을 함께 해결해나간다. 무엇보다 강권주 팀장은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절대 청감 능력을 보유한 ‘보이스 프로파일러’로서 전문성을 갖춘 여성 수사관 캐릭터를 완성한다. 그녀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 단서가 될 만한 작은 소리를 포착해내고 그것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낸다.

ⓒOCN

  여자 형사의 허스토리

  <본대로 말하라>(2020)는 모든 것을 잃은 천재 프로파일러와 한 번 본 것은 그대로 기억하는 능력을 가진 형사가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극중 특수 능력을 가진 형사 차수영은 광역수사대 ‘여자’ 팀장 황하영에 의해 발탁된 ‘여자’ 순경으로 범죄수사 장르에서는 보기 드물게 여자 멘토와 멘티로 구성된 연대 관계를 형성한다. <비밀의 숲> 시즌2(2020)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간다. 경찰대 출신 엘리트 여자 경찰 두 사람을 내세워 범죄수사 장르 안에서 여자 캐릭터의 역사를 새로이 쓴다. 수사구조혁신단 단장 최빛과 주임 한여진은 수사권 독립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강한 연대를 형성한다. 그들의 견고한 관계는 경찰이면서 여자라는 공감대에 토대를 두고 있다. 두 사람은 강력한 ‘워맨스’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극 후반 최빛이 상사의 범죄 행위를 은폐해준 대가로 승진했다는 사실을 한여진이 알게 되면서 둘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그런 생각 안 해봤니? 이번엔 너하고 내 차례야. 나하고 국장님처럼. 이번에는 내가 너 손잡고 널 끌어줄수 있어.” “아, 왜! 왜 그러세요, 진짜. 왜 스스로를 후려치세요. 그딴 손 안 잡았어도 단장님은 좋은 자리 가셨어요. 원하는 만큼 되셨을 거라고요, 단장님은. 몇 년 빠르긴 했겠지만 대신 남이 앉혀줬다고 생각하잖아요. 본인이 따낸 게 아니라. 아이씨. 별장 일이 공론화된다고 해도 뭐 흐지부지 될지 모르겠어요. 그치만 만약에 그걸로 단장님이 타격을 입게 된다면 난 또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어요. 경찰이 되고 처음으로 따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해준 분 커리어를 내 손으로 끝낼 줄은 몰랐어요.” 극 중 최빛과 한여진은 남성 중심인 범죄수사 장르에서 유일한 여성 연대로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남성 멘토와 멘티로 구성된 남성 카르텔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었음을 스스로 폭로함으로써 자정(自淨)의 길을 걷는다. 한여진은 끝끝내 최빛이 옳은 선택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의 과오를 공개하고, 최빛은 이 일로 한여진이 조직 내에서 위기에 처하자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물러남으로써 한여진을 지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진정한 멘토와 멘티 관계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면서 전관예우, 정경유착, 스폰서 검사, 졸속 수사 등 기성 사회의 적폐 청산이라는 드라마의 주제의식에 걸맞은 핵심인물로 급부상한다. 오, 언니 멋져. 스스로 성장해가는 여자 형사의 허스토리(herstory)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김민정
이화여자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에서 스토리텔링콘텐츠 강의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 드라마 인문교양서 『당신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가요』, 『당신의 밤을 위한 드라마 사용법』, 소설집 『홍보용소설』, 이 사람 시리즈 『한현민의 블랙 스웨그』 등이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 《쿨투라》 2020년 11월호(통권 7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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