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무의미에 대한 감각: 이지아 『오트 쿠튀르』
[문학 월평] 무의미에 대한 감각: 이지아 『오트 쿠튀르』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0.11.2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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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아의 첫 시집 『오트 쿠튀르』를 읽는다.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는 최첨단의 옷들을 선보이는 화려한 패션쇼를 뜻하는 말이다. 샤넬, 베르사체 같은 유명 브랜드가 개최하고 최고의 디자이너와 최상의 기술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작품’을 공개하는 자리인 만큼, 세계적인 스타들도 오트 쿠튀르에 초청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 행사의 출품작을 봐도 별다른 감흥을 얻기 힘들다. 출품된 옷이 대부분 이해도 버거운 하이패션이기 때문이다. 하기사, 한 벌에 수천 만원 내지는 억대 가격이라니 애당초 ‘보통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제품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그렇다면 이지아 시인은 특출한 소수를 위한 쇼의 이름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것일까. 자기 자신이 전위적 예술가로서 살고 싶다는 결의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시집을 톺아보면 그런 설명이 타당치 않음을 이내 알게 된다. 이 책은 결코 예술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 같은 것을 펼치고 있지 않다. 가끔 난해한 구절이 나올지언정 작품 속의 착상도 독자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시집의 서두에 배치된 작품을 예로 들어본다.

  “그것은 속도와 힘으로 가득한 것이다. 놀리고 싶은 것들이 생길 때는 그 뒤에서 따라 했는지도 모른다. 가령 희망이거나 가능성, 아니면 상관없어 이런 말들(중략)문어 빨판을 처음으로 만지면서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소름과 소음 속에서 끓는 물이 생성된다. 누운 이의 두껍고 웅장한 마음을 이끌면서”(「들판 위의 챔피언」)

  이 작품은 직관적인 비유와 이미지로 이루어진 만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그 내용을 굳이 풀어 쓰자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희망과 가능성을 꿈 꾸면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희망과 가능성은 “속도와 힘으로 가득한 것이다.” 한데 누군가는 그런 낙관적 꿈을 거부하고 “아무래도 괜찮아”라든가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도 있다. 이런 마음도 사람들을 살아내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는 이상 “속도와 힘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인용한 작품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비관적’ 태도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엘리트주의적’인 태도가 아니다. 반대로 이 작품은 섣불리 ‘희망’을 꿈꿀 여력조차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담담하게 대변한다. 이런 ‘비관적’인 태도는 『오트 쿠튀르』에서 시인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겨난다. 우리가 아는 많은 문학 고전들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행동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허나 인간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어떨까. “희망”이나 “가능성” 같은 것들이 실체 없는 환상일 뿐이라면, “누운 이의 두껍고 웅장한 마음을 이끌”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 문학작품을 쓸 수 있을까. 이것은 낙관적 인간주의를 거부한 모든 작가들이 맞닥트릴 수밖에 없는 질문인데, 이 글은 그에 대한 작가들의 대응을 자세히 개괄할 여력이 없다. 이지아 시인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만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표현주의는 안식과 맛소금을 찾겠지만/돗자리야/그래도 여기가 네 자리는 아니지/공동체를 부르는 건 속임수잖아(중략)여기는 아무도 없습니다/미워할 대상이 없어서/감각은 두 계단 위에서 있습니다”(「감각은 어떻게 실패했을까」)

  이 작품의 제목 「감각은 어떻게 실패했을까」는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대하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변용한 것이다. 오스트롭스키는 러시아 혁명 당시에 적군(赤軍)으로 참여한 투사였는데, 두 눈이 실명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하려는 소망으로 이 소설을 썼다. 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주요인물은 순진해 보일만큼 선량한데, 그런 인물들이 여지없이 혁명에 투신한다는 식의 당위적 전개로 구성된 만큼 『강철』을 문학적으로 상찬하긴 힘들다. 그러나 어쨌든 이 작품은 인간이 용기와 정의감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장 결연하게 형상화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세계 문학사에 남아 있다.

  이지아의 「감각은 어떻게 실패했을까」는 이런 낙관적 휴머니즘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여기에서 화자는 “공동체”나 “미워할 대상”에 대해 침묵할 것을 제안한다. 오스트롭스키를 비롯한 20세기의 투사들은 “공동체”의 이익에 복무하겠다는 결의 혹은 “미워할 대상”을 향한 분노에 의거하여 행동했다. 그런데 이제는 “결의”와 “분노” 같은 사회적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가기 힘들고, 또한 이런 감정을 윤리의 기반으로 삼자고 주창하기도 머쓱한 시대가 되었다. 이지아의 시는 거창한 공동체적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 현재적 인물을 문학의 무대 위로 올리고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다는 이물적 ‘감각’을 호소하게 만듦으로써, 오스트롭스키 스타일의 낙관적 휴머니즘과 결별하고 있다.

  요컨대 『오트 쿠튀르』는 사회로부터 어떤 확정적 의미도 느낄 수 없는 인간들의 감각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해낸 책이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2개의 작품만으로도 어느 정도 예증되는 사항이겠지만, 사실 이 감각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작품은 시집의 말미에 수록된 극시 「반인류를 향한 태양과 파동과 극시」이다. 수십 쪽의 분량에 단일한 ‘의미’를 갖는 작품은 아닌지라 자세히 소개할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인데, 관심이 있는 독자는 천천히 눈으로 음독해보길 바란다. 이번 시집의 해설에서 조재룡 평론가는 이 시집의 전략을 “트랜스로직(translogic)”이라 명명했다. 기존의 사회적 의미망을 우회하거나 가로지르고자 하는 시인의 문제의식과 감수성을 상찬하기에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엄정한 평가를 위해서는, 『오트 쿠튀르』가 고유한 문제의식을 일관된 방법론적 논리(logic)로 구체화시키진 않았으며, 이 시집은 독특한 감각을 가시화하는 일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음을 덧붙여야 한다. 이것은 『오트 쿠튀르』의 장점이자 동시에 약점일 수도 있겠는데, 아무렴 어떤가. 첫 시집이 시인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화려한 패션쇼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지만, 어쨌든 뛰어난 예술가는 런웨이가 끝난 후에도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법이다. 이 시인이 훗날 견고한 시적 논리를 강화시켜나갈지 아니면 더욱 첨예하게 이물적 감각을 현시하게 될지를 단언하긴 어려우나, 이번 시집은 그녀가 어느 쪽으로든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임을 기대하게 만들어준다.

 

* 《쿨투라》 2020년 11월호(통권 7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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