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Theme] 시련의 상징, 치유의 도구: 한국 대중가요 속의 ‘밥’
[1월 Theme] 시련의 상징, 치유의 도구: 한국 대중가요 속의 ‘밥’
  • 강백수(시인, 싱어송라이터)
  • 승인 2020.12.29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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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C프로덕션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 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 조용필 <꿈> (조용필 작사)

  ‘가왕’ 조용필은 스스로 작사·작곡한 노래 ‘꿈’을 통해 고향을 떠나 도시 노동자가 된 어느 청년의 모습을 그려냈다. 청년은 도시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채 냉엄함과 삭막함, 그리고 고독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조용필은 청년이 밥을 먹는 장면을 그려내었다. 노랫말에는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라고 되어 있지만, ‘먹는다’는 표현으로 보나, 전후의 문맥상으로 보나 ‘뜨거운 눈물’은 서러운 식사의 은유일 것이다. 1절에서 청년은 춥고도 험한 도시의 한 구석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2절에서는 모두가 고향을 향해 떠나가는 명절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뜨거운 눈물 섞인 식사를 한다.

  냉엄하고 삭막한 도시를, 그리고 고독한 청년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조용필은 밥 먹는 행위를 선택해서 보여주었다. 어째서 다름 아닌 ‘밥’인가. 밥이란 한국 대중가요 속에서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는가.

이제는 밥을 먹어도 눈물 없이는 삼키지 못해
억지로 먹고 먹어도 속이 늘 허전해…
밥도 잘 먹지 못해 네가 생각 날까봐
네 생각에 체할까봐 네가 떠난 후로
오늘도 눈물로 하루를 먹고 살아
- 포맨 <못해> (민연재 작사)

  밥을 먹는 것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인 행위이며 식욕은 수면욕, 성욕과 더불어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노랫말의 화자는 이별로 인해 ‘밥도 잘 먹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별로 인한 고통이 생리적 현상까지 지배할 정도로 극심하다는 의미이다. 밥은 이처럼 어떠한 심리적 시련의 상황이 극에 달해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흔하게 사용된다.

사랑이 떠나가도 가슴에 멍이 들어도
한순간 뿐이더라 밥만 잘 먹더라
죽는 것도 아니더라
눈물은 묻어둬라 당분간은 일만 하자
죽을 만큼 사랑한 그녀를 알았단
그 사실에 감사하자
- 옴므 <밥만 잘 먹더라> (방시혁 작사)

  옴므의 <밥만 잘 먹더라> 속 화자는 앞서 이야기한 ‘못해’의 화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별에 접근하고 있다. ‘못해’의 화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슬픔에 빠져 그 슬픔 자체를 노래한다면 <밥만 잘 먹더라>의 화자는 적극적으로 이별을 극복해보고자 한다. 여기서 또 밥이 등장한다. 화자는 이별 후에도 생활은 계속되며 ‘당분간은 일만 하’는 방식으로 실연을 잊고자 한다. 밥은 일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별을 극복하기 위한 원동력이 된다. 창작자는 이별 후에 밥을 잘 먹지 못하는 클리셰를 비틀어 밥이라는 소재에 적극적인 극복의 의지를 부여한 것이다.

  다시 조용필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조용필의 <꿈>에 나타난 화자의 밥 먹는 장면에도 심리적 시련의 상황이 극에 달해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밥과 적극적인 극복의 의지를 담은 밥, 두 가지를 모두 대입해볼 수 있다. 뜨거운 눈물로 목이 메는데도 불구하고 밥을 먹는 모습은 모두가 고향을 찾아가는 명절날 냉엄하고 삭막한 도시에 홀로 남아 밥을 먹는 화자의 고독함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도시에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꿈>의 화자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또다시 밥인지도 모른다.

야근을 밥 먹듯 아침은 안 먹듯하며
소화제를 달고 사는 더부룩한 날들
약간의 조증 폐쇄공포증
혼자뿐인 넓은 집
냉장고엔 인스턴트 식품
혀끝에 남은 조미료 맛이 너무 지겨워
그가 간절하게 생각나는 건 바로
어 어 어어어 어 어머니의 된장국
담백하고 맛있는 그 음식이 그리워
그때 그 식탁으로 돌아가고픈
- 다이나믹듀오 <어머니의 된장국> (다이나믹듀오 작사)

사람이 날 부서지게 해 꼭 물거품처럼
산산조각이 났어 욕심이 날 흐려지게 해
꼭 물안개처럼 멀리 흩어져
집밥 너무 그리워 가족의 마법
본가 따뜻한 집으로 내가 쉴 수 있는 곳
- 김범수 <집밥> (김범수, 슈퍼창따이, 진보 작사)

  속은 더부룩해서 소화제를 달고 살게 만들고, 조증과 폐쇄공포증 같은 정신질환까지 야기하는 도시의 삶 속에서 언제나 그리운 것은 바로 어머니의 된장국이다.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욕심에 사로잡히기 일쑤인 사회생활 속에서 그리운 것은 바로 ‘가족의 마법’인 집밥이다. 밥 중에서도 유독 어머니의 밥, 집밥은 치유의 도구로 노랫말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화자들처럼, 아니면 조금은 다른 모습일지라도 녹록지 않은 한 해 동안 저마다의 시련과 싸워 온 우리들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이야말로 따뜻한 집밥 한 그릇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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