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12] 클라이맥스는 오르가즘과 같다!
[재미있게 시나리오 쓰기 12] 클라이맥스는 오르가즘과 같다!
  • 이무영(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 승인 2020.12.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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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인이 성관계를 맺는 이유가 뭐든 각각 절정의 순간 만족스런 오르가즘을 느낄 때 행복감이 넘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이 오르가즘이 돼야 한다. 감정적으로 영화가 정점을 이루는 상황이고, 주인공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이 목표를 달성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다. 작가가 제기했던 드라마적 문제와 관객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졌던 커다란 궁금증이 클라이맥스에서 해결된다. 그리고 영화의 주장이 명확히 드러나고, 시각적 면으로도 절정을 이루는 게 일반적이다. 소위 작가가 작심하고 끝장을 봐야 하는 대목이 클라이맥스다. 만약 클라이맥스가 약하다면 작가가 스토리를 구축해나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원래 의도를 놓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클라이맥스를 지표 삼아 시나리오의 모든 내용을 꼼꼼히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씬이든, 시퀀스든 클라이맥스와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데 적합지 않다면 다시 고민하고 수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버려야 한다. 만약 관객이 클라이맥스로 시원한 오르가즘의 쾌감을 얻지 못한 채 극장 문을 나선다면, 곧바로 영화에 대해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이다.

 “뭔 개소리야?”
 “야, 이런 영화는 나도 만들겠다.”
 “괜히 시간낭비만 했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영화 끝부분에 다다를 즈음 자신이 구축하려는 클라이맥스가 관객에게 충분한 매력으로 다가갈지, 그들의 이해를 얻을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나리오의 가장 큰 패착이 이 부분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가 막바지에 다다르면 모든 작가는 빨리 마무리하고픈 조바심을 느낀다. 마라토너가 서둘러 레이스를 끝내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시나리오 마지막 장에 ‘서서히 페이드아웃 된다. 끝!’이라고 쓰고 싶어 안달이다. 하지만 이런 조급함은 클라이맥스를 망치는 결과로 작용하기 쉽다. 특히 경험이 부족한 작가들이 그렇다. 그렇다면 전율과 쾌감으로 다가와야 할 클라이맥스가 왜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밋밋하게 느껴질까? 이유는 간단하다. 클라이맥스에서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폭로’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전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폭로’는 말 그대로 몰랐거나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거의 대부분 주인공, 혹은 주요 인물에 대해 관객이 인지하지 못했던 내용이 밝혀지는 걸 말한다. 영화에선 등장인물이나 관객에게 어떤 커다란 비밀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순간이 무조건 오게 돼있다. 이 비밀이 드러날 때 관객의 심장은 놀라 숨이 멎을 듯 요동쳐야 한다. 가장 커다란 진실이 드러날 때 관객은 주인공, 또는 주요인물이 왜 그런 행동을 해왔는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등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관객은 이 부분에서 영화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도 알게 된다. 작가가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스토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단 이 놀라움은 관객의 동의를 확보해야만 설득력을 갖는다. 개연성의 원칙에 위배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CJ엔터테인먼트

  <복수는 나의 것>에서 야수처럼 격돌하는 주인공 둘의 대결은 동진의 승리로 귀결된다. 클라이맥스에서 동진은 자신의 딸을 유괴해 죽게 만든 류를 냇물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동진의 대사는 관객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동진은 알고 있다. 류가 일부러 딸 유선을 죽인 게 아니라는 걸. 뿐만 아니라 류의 딱한 처지도, 그가 딸을 환대한 사실도 알고 있다. 동진은 번민하는 듯 보이나 결국 무자비하게 물속에서 류의 아킬레스건을 잘라 익사케 한다. <밀양>의 클라이맥스에서 신애는 사과를 먹다가 뜬금없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봐? 보여?”라고 말한다.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을 향한 마지막 투정이요, 도전이다. 카메라가 빠지면 관객은 그녀가 칼로 손목을 그은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신과 맞서지 못한다. 연약한 그녀는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외친다. <마더>의 클라이맥스에서 엄마의 캐릭터 변화는 실로 관객을 놀라자빠지게 만든다. 도준의 결백을 밝힌다며 모든 걸 걸었던 그녀는 고물상 사내의 증언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배신당한 사실을 깨닫는다. 경찰이 곧 도준을 풀어주려 한다는 엄마의 말에 고물상 사내는 신고하려고 전화 송수화기를 집어 든다.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주저 없이 그를 둔기로 때려죽인다. 도준의 결백을 밝히려던 그녀의 목표는 전광석화처럼 그에게 해가 되는 어떤 존재도 세상에서 흔적을 지우겠다는 의지로 수정된다. 부지불식간에 바뀐 그녀의 새 목표는 달성된다. 따라서 도준은 풀려난다.

  이처럼 클라이맥스에서 드러나는 폭로는 사건적으로 영화 앞부분의 ‘드라마적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의 참 모습을 드러내는 ‘캐릭터 폭로’로도 활용된다. 영화에서 클라이맥스까지 관객이 봐온 주인공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관객은 자신들의 믿음을 배반하는 이런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마더>의 엄마가 참모습을 드러내는 씬은 보면 볼수록 충격적이다. 그녀가 아들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고물상 사내를 살해할 거라고 예측한 관객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다. 점쟁이라면 몰라도. 아마 엄마 자신도 스스로 살인할 수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충분히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관객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걸까? 그 답은 내재된 그녀의 결핍과 욕망에서 찾을 수 있다. 엄마는 도준이 어렸을 때 농약을 먹고 동반자살하려 했다. 아마도 실패로 끝난 이 사건이 그의 지적장애를 초래했다고 충분히 추측해볼 수 있다. 물론 지적장애 아들과 살기가 너무 어려워 동반자살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영화는 이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어쨌든 성공했다면 그녀 말처럼 하늘나라 꽃밭에서 알록달록 손 붙잡고 살았을 테지만 살아남은 이상 모자는 ‘죽으나 사나 함께’라는 운명공동체가 돼버린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욕망과 평생 떨어져 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순간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하며 자동적으로 둔기를 들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무조건 아들을 지키겠다는 엄마의 일그러진 자세는 초반 아들이 길바닥에 눈 오줌을 그녀가 신발로 흐트러뜨리는 모습에서 예견된다. 그녀에게 보편적 옳고 그름은 중요한 게 아니다. 무조건 아들을 지키는 게 선이고, 아들에게 해가 되는 존재는 다 악이다. 그런 것들은 모두 신발로 밟아 흐트러뜨리듯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그녀의 숨겨진 마음이다. 엄마의 충격적인 ‘캐릭터 폭로’는 이후 장면에서 연이어 드러난다. 그녀는 도준을 대신해 살인범으로 갇힌 다운증후군 청년 종팔을 찾아가 엄마가 없느냐며 눈물을 흘린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오열이다. 너무나 사악하다.

ⓒCJ엔터테인먼트

  그럼 과연 우리는 어떤가?

  대부분의 인간은 나름 자신이 꽤 선하며 그럴싸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당신도 그럴 것이다. <마더>의 클라이맥스에서 연이어 드러나는 엄마의 모순과 위선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한심한 실체를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과 <밀양>의 신애도 클라이맥스에서 관객의 예측과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딸이 죽기 전까지 동진은 아마도 자신이 누군가를 죽일만한 위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인을 밥 먹듯 하다가 결국 류도 무참히 죽여 버린다. 이런 동진의 변화에 관객은 놀라지만, 동시에 충분히 이해하며 받아들인다.

ⓒ시네마서비스

  신애는 영화 내내 오락가락하는 캐릭터로 일관한다. 과부인 그녀는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고 여러 사람 앞에서 일부러 강한 척 허세를 부린다. 심지어 친동생 앞에서도 말이다. 신애는 주제넘게 아들 준을 유괴, 살해한 도섭을 신의 이름으로 용서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도섭을 용서하겠다는 신애의 주장은 처음부터 어이없는 생각이다. 솔직히 그녀에겐 그를 용서할 능력이 전혀 없다. 어리석은 그녀는 자신보다 신이 먼저 용서했다는 도섭의 말에 분노한다. 그럼 여기서 한 번 논리적으로 신애의 분노를 분석해보자! 만약 애초에 그녀가 도섭을 용서하려던 게 순도 1백 퍼센트의 진심이었다면, 신이 먼저 용서했든 말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그녀는 별의별 기행 끝에 자살로 신과 맞서려하지만 결국은 죽음의 두려움을 감당치 못한 채 살려달라고 거리로 뛰쳐나간다.

  이처럼 주인공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캐릭터 폭로’는 최대한 늦출 수 있을 때까지 뜸을 들여야 한다. 작가는 드라마적 파괴력이 가장 강력하게 쓰일 수 있을 때, 즉 관객에게 ‘캐릭터 폭로’가 가장 적절하다 생각할 때 터뜨려야 한다. 중요한 비밀을 오래 감추면 감출수록 서스펜스는 강해진다. 이건 마치 연애와 마찬가지다. 상대방과 게임을 하듯 작가는 관객과 게임을 해야 한다. 더 적나라하게 얘기하면 연애박사가 효과적으로 상대를 갖고 놀 듯 작가도 능수능란하게 관객을 요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계속해서 추측하게 하고, 이를 연이어 배반하는 게 작가의 숙명이다. 물론 어떤 경우든 이는 무조건 ‘유쾌한 배반’이어야 한다. 클라이맥스에서 드러나는 다른 주요 인물에 관한 ‘캐릭터 폭로’가 주인공에게 곤란한 선택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관객은 주인공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호기심을 갖고 영화를 지켜보게 되고, 따라서 서스펜스 지수도 올라간다.

  <뮤직 박스>(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1989)의 주인공 앤 탈봇 변호사는 나치전범으로 몰린 아버지 마이크 라즐로를 변호, 결국 승소한다. 하지만 그녀가 확보한 뮤직 박스에서 라즐로가 전쟁범죄자임을 입증하는 사진들이 여러 장 쏟아진다. 관객은 이제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숨죽이며 지켜본다. 그녀는 결국 그릇된 가족사랑 대신 정의를 선택, 증거물을 검찰에 보낸다. <올드보이>에서 영문도 모른 채 15년간 감금됐던 오대수는 복수의 일념으로 긴 세월을 버티다 풀려난다. 그는 복수심을 불태우며 자신을 가둔 자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실상 대수는 복수하는 자가 아니라 복수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긴 감금은 그 상대인 이우진이 치밀하게 계획한 복수의 준비단계일 뿐이었다. 클라이맥스에서 동창인 이우진은 대수에게 학창시절 그의 가벼운 입놀림 탓에 사랑하는 누나를 잃은 사실을 알려준다. 우진과 그의 누나는 근친상간하던 오누이였다. 우진은 지난 며칠간 대수가 성관계를 맺은 미도가 죽은 줄 알았던 그의 딸임을 알려준다. 대수의 복수가 아니라, 자신이 당한대로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우진의 복수가 역으로 달성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대수의 목표는 복수에서 어떻게든 딸 미도가 근친상간 사실을 모르도록 조치하는 것으로 바뀐다. 대수는 미도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며 우진에게 매달린다. 결국 대수는 우진 앞에서 개처럼 기며 멍멍 짓다가 속죄의 제스처로 자신의 혀를 자른다. 영화 속 이런 강도의 폭로는 효과가 엄청나게 강렬하고 때론 극단적이다. 이런 폭로는 잠시 주인공을 충격에 빠뜨린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곧바로 충격을 딛고 일어나 다시 힘을 내서 마지막 목표달성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주인공의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하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 왜냐면 이 부분에서 관객이 미처 몰랐던 주인공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말

  아름다운 뒷정리

  손에 땀을 쥐며 중반부를 달려온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기점으로 마치 비행기가 급 하강하듯 서둘러 결말로 치닫는다. 영화 전반부 제기된 드라마적 문제로 인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지닌 채 고군분투해온 주인공의 운명은 궁극적으로 결말부분에서 명확히 결정된다. 더불어 클라이맥스에서 미처 해결을 보지 못한 모든 문제도 여기서 최종 정리된다. 클라이맥스에 이어지는 결말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데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요소로 작용한다. 깔끔하지 못한 해결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것과도 같다. 장편영화의 경우 클라이맥스에서 가장 중요한 드라마적 문제가 해결됐다고 급작스럽게 영화를 끝맺음 할 수 없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아직도 관객이 알고 싶은 내용 중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게 남아있다.

  모든 정보를 낱낱이 알리지 않은 채 서둘러 끝내버린다면 관객은 궁금증에 목마른 채 극장을 나서게 되고, 결국 이곳저곳에 영화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을 것이다. 작가는 관객이 이런 불만을 같지 않도록 결말에서 그들이 알고파 할 모든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해줘야 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은 류의 아킬레스건을 칼로 자른 후 그가 물에 빠져 죽는 걸 차가운 시선으로 지켜본다. 여기서 일단 클라이맥스는 끝난다. 복수를 완성한 후 허탈한 표정으로 차에 앉아있던 동진은 병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자신이 살리려 했던 팽기사의 아들이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하러 오라는 거다. 동진은 전화를 잘못 걸었다며 끊는다. 이어서 동진이 류의 시신을 묻기 위해 땅을 파는데, 갑자기 트럭 한 대가 나타나고 네 명의 사내가 내린다. 그들은 죽은 영미의 복수를 위해 나타난 테러조직 단원들이다. 네 사내는 번갈아 동진을 칼로 찌르고, 그중 하나가 차에 기댄 채 죽어가는 그의 가슴팍에 사형판결문을 쑤셔 넣는다. 동진은 숨을 헐떡이며 영미가 죽기 전에 살려달라며 했던 말을 떠올린다.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우리 조직 테러단체니까 아저씨 죽어, 백 프로, 확실히!”

  동진은 자신이 토막 낸 류의 시신이 담긴 쓰레기봉투 앞에서 서서히 숨을 거둔다. <밀양>에서 자살을 기도한 신애는 살아난다. 종찬은 서울에서 내려온 그의 남동생을 데리고 퇴원하는 신애를 맞으러 병원으로 간다. 남동생은 차 안의 십자가를 보며 묻는다.

  “요새도 교회 다니세요?”

  종찬이 대답한다.

  “네. 처음엔 신애 씨 때문에 다녔는데 이제는 버릇이 돼서 다닙니다. 안 나가면 섭섭하고 나가면 마음이 좀 편안해집니다.”

  짝사랑하는 신애 때문에 다니던 교회를 이제 종찬이 자발적으로 나간다는 건 굉장한 아이러니다. 병원에 도착한 종찬은 자신이 사준 옷을 입고 퇴원하는 신애에게 꽃을 건넨다. 그런데 신애는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한다. 둘은 미장원에 가는데 하필 거기서 미용사가 된 도섭의 딸을 만난다. 잠시 후 신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뛰쳐나가고 영문을 알지 못하는 종찬은 뒤를 따른다.

  “왜 그래요, 신애씨?”
  “날 이 집에 왜 데려왔어요?”
  “머리 자르려면 미장원에 와야지요?”
  “왜 하필, 이 집, 오늘 이 집에 데려왔냐고요?”

  말을 마친 신애는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노려본다. 아직도 그녀는 신에 대한 원망을 극복하지 못했다. 우연한 원수 딸과의 조우조차 신의 의도적 괴롭힘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마당에 앉아 스스로 머리를 자르려 하는데 종찬이 나타나 거울을 받쳐준다. 잘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마더>의 엄마는 아들 도준을 경찰에 신고하려는 고물상 사내를 둔기로 때려죽인 후 이를 은폐하기 위해 불을 지른다. 살인 후 숲에서 잠시 잠들었던 그녀는 갈대밭을 가로질러 간다. 관객은 여기서 영화의 프롤로그 장면을 떠올린다. 왜 그녀가 생뚱맞은 춤을 추었는지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첫 살인 후의 괴로운 마음을 다스리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이제 약재상의 일상으로 돌아간 그녀를 형사가 찾아온다. 형사는 그녀에게 기도원에서 탈출한 다운증후군의 종팔이 진범이라고 한다. 형사들은 차를 타고 가며 종팔의 옷에서 죽은 여학생 아정의 혈흔이 검출됐다고 얘기한다. 사실 그건 아정의 코피인데 말이다. 그런데 종팔이 결코 진범이 아님을 아는 그녀는 뻔뻔하게도 “종팔이 걘 왜 그랬다니?”라고 묻는다. 형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종팔을 면회 간 그녀는 한술 더 뜬다. “너 부모님은 계시니? 엄마 없어?”라며 울먹인다. 불쌍한 종팔이 오히려 “울지 말라!”며 그녀를 위로한다. 풀려난 도준은 오랜만에 집에서 엄마와 함께 밥을 먹는다. 방금 전 종팔 앞에서 그토록 울먹였던 그녀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아들에게 닭백숙을 먹인다. 갑자기 도준이 엄마에게 묻는다.

  “종팔이는 왜 그 시체를 옥상 위에 올려놨을까, 그 높은 곳에?”

  이 말을 들으며 관객은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비록 지적장애자이지만 도준 역시 엄마와 마찬가지로 위선을 떨고 있다는 걸. 도준은 계속 “내 생각엔 잘 보이라고 한 거 아닐까? 피 질질 흘리니까 병원 데리고 가라고. 그래서 사람들 제일 잘 보이는 데다 올려놓은 거 아닐까?”라고 말한다. 도준은 엄마와 관객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일부러 죽인 건 아니라고, 누군가가 빨리 그녀를 발견해 병원에 데려가길 바랐다고 항변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나들이 떠나는 엄마를 도준이 배웅 나온다. 도준은 엄마에게 불에 그을린 양철침통을 건넨다. 도준이 석방되던 날 진태 차를 타고 가다 불탄 고물상 잔해더미에서 찾아낸 침통이다. 이 새로운 정보를 접한 엄마도, 그리고 관객도 놀란다. 도준도 엄마가 고물상 사내를 살해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거론된 클라이맥스 이후, 결말부분에 등장하는 모든 정보는 관객이 영화를 명확히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자살시도 후 신애가 어떻게 됐는지, 영화 초반 영미가 떠들어대던 혁명조직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엄마의 살인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등은 관객이 알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 꼭 알아야만 하는 정보들이다. 이런 보석 같은 정보들을 풍부하게 제공함으로써 관객의 궁금증을 완전히 해소케 할 때 그들의 만족감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둘째, 영화는 결말을 통해 관객에게 통찰력을 제기해야 한다.

  관객을 일깨우는 건 어쩌면 이야기 자체보다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럼으로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 관객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지 깊게 고민해야 한다. 만약 한 관객이 두 시간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고 나서 아무런 통찰력도 얻지 못한 채 극장을 나선다면, 필경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기억 속에서 영화는 완전히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것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밀양>의 신애는 미장원 씬에서 여전히 신을 향한 울분을 극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나, 그래도 작가는 신애의 삶이 조금씩 변화하리란 암시를 마지막 두 씬을 통해 보여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애는 옷가게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신애가 전에 조언한대로 가게 인테리어를 화사한 색으로 바꿨다고 얘기한다. 전에 그녀는 인테리어에 대해 조언하던 신애를 주제넘다고 비아냥댄 바 있다. 그랬던 여자가 변한 것처럼 장차 신애도, 또 불행으로 점철된 그녀의 인생도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에서 신애는 스스로 머리를 자르려 한다. 이 역시 향후 그녀가 스스로 불행을 딛고 일어서리란 것을 암시한다. 어느새 나타난 종찬은 거울을 들어준다. 그는 변함없이 신애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이 팽기사의 아들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 건 이제 그가 완전히 세상과 단절됐음을 암시한다. 만약 팽기사의 아들이 살아나기라도 했다면 동진은 의욕적으로 뭔가 그를 위해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동진을 처단하는 어설프면서, 동시에 섬뜩한 테러단체원들의 모습에서 일그러진 자본주의의 심장에 사형판결문을 처박고 싶은 작가의 의중을 다분히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테러단체의 칼날은 프롤레타리아를 핍박하는 최고위계급이 아니라, 밑바닥출신으로 자본주의 질서에 발맞춰 조금 도약했다 급작스럽게 몰락한 한 소상공인의 가슴팍에 박혔다. 클라이맥스에서 결말로 이어지는 류와 동진의 연이은 죽음을 보며 이 견고한 자본주의의 틀이 결국 가지지 못한 자들끼리의 싸움만을 조장하는 게 아닌가하는 암울한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의 숭배대상인 돈이 결국 가지지 못한 자들을 다 잡아먹었다. 병원에서 콩팥을 찾았다고 했을 때 류에게 단돈 1천만 원만 있었어도 누나도, 유선도, 영미도, 동진도, 그리고 류 자신도 죽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결말은 관객에게 클라이맥스의 결과에 대한 충분한 정서적 반응의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클라이맥스에서 드라마적 문제가 해결되고 주인공의 운명이 결정되는 걸 보며 관객은 커다란 감정적 반응을 드러낸다. 작가는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미리 예측하고 이들로 하여금 마음을 추스를 충분한 여유를 줘야한다. 슬픈 영화의 경우 결말은 카타르시스, 혹은 정화의 기능으로 작용한다. 주인공의 비장한 죽음에 눈물 쏟기 시작한 관객은 한동안 그 아픈 감정에 사로잡혀 있길 원한다. 이럴 경우 작가는 관객의 심리를 십분 활용, 그들을 최대한 길게 슬픔의 늪에 머물게 해야 한다. 만약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바로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극장불이 켜진다면 어찌 되겠는가? 당연히 관객은 크게 아쉬워 할 것이다. 클라이맥스가 매우 충격적인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관객이 자신들이 막 경험한 상황을 충분히 소화하고 생각할 정서적 여유를 제공해야만 한다.

  <마더>에서 엄마를 응원하던 관객은 그녀가 고물상 사내를 때려죽이는 걸 보며 충격에 빠진다. 공격적 성향이라곤 전혀 없는 듯 보였던 그녀의 살인뿐만 아니라, 이후 들키지 않기 위해 뒤처리를 하는 대담한 모습은 더 놀랍게 다가온다. 고물상 방화 후 산을 넘어온 그녀는 숲속에서 잠든다. 살인의 흥분이 가시고 난 후 밀려오는 피로 때문이었을까? 깨어난 그녀는 갈대밭을 가로질러 걷는다. 관객은 오프닝에서 그녀가 췄던 우스꽝스러운 춤을 연상한다. 영화는 살인 이후 그녀가 약재상으로 돌아가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매우 긴 호흡으로 보여준다. 관객에게 엄마의 살인을 정서적으로 소화할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CJ엔터테인먼트

  <마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두 씬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도준이 버스정류장으로 나들이 떠나는 엄마를 배웅 나온다. 그는 불탄 고물상 잔해더미에서 찾은 양철침통을 건네며 “이런 걸 막 흘리고 다니면 어떡해?”라고 꾸짖는다. 엄마는 이 순간 아들과 범죄로 맺어진 운명공동체임을 확실히 깨우친다. 그녀는 고물상 사내를 때려죽임으로 아들을 구했고, 그는 범죄현장에서 침통을 빼돌림으로 엄마를 구했다. 복받쳐 오르는 죄의식을 참을 수 없는 듯 그녀는 서둘러 아들을 외면한 채 버스로 달려간다. 버스 안, 아줌마들이 막춤삼매경에 빠진 사이,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허벅지에 침을 놓는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나쁜 일, 심지어 살인의 죄의식마저 떨쳐버리고픈 그녀의 무서운 욕망이 섬뜩하다.

ⓒCJ엔터테인먼트

  침을 놓은 후 그녀는 강렬한 석양빛이 스며드는 버스 안에서 막춤을 춘다. 도대체 뭘 의미하는 몸부림일까? 관객은 길게 흐르는 이 장면을 보며 이해할 듯,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분열에 빠진다. 작가는 파렴치한 그녀의 모습에서 관객 개개인이 스스로의 모순과 위선, 그리고 일그러진 욕망을 깨우치게 하려던 건 아닐까! 어찌 됐든 관객은 복잡한 감정으로 미친 듯 흔들리는 마지막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이 팽기사의 아들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을 때 관객은 그가 느끼는 절망에 공감하며 아파한다. 전화가 잘못 걸렸다며 끊는 동진의 모습은 세상 경계 밖으로 밀려난 한 불쌍한 사내의 초상이다. 관객은 측은지심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이 그의 처지가 아님에 안도한다. <밀양>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흐트러지는 신애의 머리카락을 따라가다 더러운 물구덩이를 비추는 햇볕에 주목한다. 과연 그 햇볕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녀가 의지하려 했던 신일까? 아니면 말없이 계속 그녀의 곁을 지켰던 종찬일까? 마지막에 와서야 관객은 영화 초반 신애가 뜻을 풀어 설명했던 ‘밀양’(비밀의 햇볕)이 종찬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는 모든 걸 잃었다며 슬퍼했지만 종찬은 늘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게 신의 섭리이든 아니든, ‘은밀한 햇볕’인 종찬으로 인해 신애의 삶이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관객은 기대한다. 그리고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처럼 그녀의 아픔도 서서히 사라져갈 것이라고.

  만약 세 편 영화 모두 클라이맥스에서 급작스럽게 끝났다고 가정해보자! 관객은 클라이맥스 이후 상황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릴 테고, 결국 다양한 해석이 난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어떤 감정과 깨우침으로 방금 본 영화를 정리할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 할 것이 분명하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처럼 좋은 영화는 마무리가 훌륭해야 한다. 고로 스스로 만족하고, 궁극적으로 관객이 만족할만한 결말을 찾을 때까지 작가는 절대 ‘페이드아웃. 끝!’을 선언해선 안 된다.

 

* 《쿨투라》 2020년 12월호(통권 7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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