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11] 대학가요제의 영광과 좌절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11] 대학가요제의 영광과 좌절
  • 오광수(시인, 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20.12.2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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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그 어느 날 차 안에서 내게 물었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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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가을 펼쳐진 제2회 MBC 대학가요제 무대. 당시 명지대학교에 재학 중인 심민경(예명 심수봉)이 원피스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청승맞지만 강렬한 끌림이 느껴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시청자들은 피아노를 치면서 세미트로트풍의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심민경은 이날 입상자 대열에 합류하지는 못했다. 아마추어가요제에 지나치게 프로페셔널한 그녀의 등장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요시장의 반향은 뜨거웠다. 사방에서 러브콜을 보냈고, 심민경은 그 열기만큼이나 뜨겁고, 빠르게 스타반열에 올랐다. 대학가요제는 시작부터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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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대 대학가요제가 시작되던 시기의 우리 대중음악계는 폭발 직전의 용암 같았다. 1960년대 말부터 신중현 등이 만들어놓은 포크음악 바람이 대학가에 충만했다. 누구나 통기타 한 대쯤은 갖고 있었으며 집집마다 전축 한 대씩 장만하던 시절이었다. 비록 정품이 아닌 해적판이 주류를 이루긴 했지만 최신 유행하는 팝음악을 손쉽게 들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 그러나 가요계는 대마초사건의 여파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신중현을 비롯해서 포크음악을 주로 했던 가수들이 모두 활동금지 됐으며, 그들이 부른 노래들도 모두 금지곡으로 묶였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은 서울대 농과대학 노래동아리 샌드 페블즈가 부른 <나 어떡해>였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그룹 산울림의 멤버 김창훈이었다. 원래 김창훈은 ‘무이’라는 팀 이름으로 형 창완, 동생 창익과 함께 대학가요제 예선에 참가해서 1위를 차지했으나 형인 김창완이 이미 대학을 졸업했기에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 대신 샌드페블즈에게 자신의 곡을 줘서 영예의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들 삼형제가 산울림이라는 이름으로 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꿔놓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1회 대회에서 동상을 차지한 서울대트리오의 <젊은 연인들>도 큰 인기를 얻었다. 개최 첫해의 인기를 등에 업고 대학가요제는 해마다 젊은 층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었다. 2회 대회에서는 부산대 중창단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에>가 대상을 차지했으며 노사연과 배철수(활주로), 임백천 등이 입상했다. 3회 대회는 김학래와 임철우 듀오의 <내가>, 4회 대회는 이범용과 한명훈 듀오의 <꿈의 대화>가 대상을 차지했다. 그 당시 대학가요제 입상곡은 막강한 MBC의 전파력을 타고 순식간에 온 국민의 히트곡으로 떠올랐다. 또 대부분의 입상자들은 대회 입상을 계기로 가수의 길을 걸었다. 말하자면 가장 유력한 가수 등용문이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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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에도 대학가요제는 기존의 대중음악 문법과 다른 노래들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학생들이 만들고 부른 노래들이 기존 가요계에 자극을 준 것도 사실이다. 5회 대회 대상 곡인 정오차의 <바윗돌>은 대학가요제 수상 곡 가운데 유일하게 금지곡으로 묶였다. 광주항쟁 당시 망월동에 묻힌 자신의 친구를 기리는 노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1982년 6회 대회는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가 대상,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이 금상을 받았다. 7회 대회 때는 서강대 동아리 에밀레의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가 대상을 받았다. 이후로도 대학가요제는 시작 지점에서 보였던 폭발력은 다소 누그러졌지만 매년 스타탄생의 산실이었다. 김장수와 임은희로 결성된 높은음자리와 유열, 이정석, 원미현, 전유나 등은 대학가요제 입상을 계기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가수로도 승승장구했다. 1988년 12회 대회의 대상은 신해철을 배출한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수상했다. 신해철은 수상을 계기로 성장하면서 한국 록음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아티스트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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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대학가요제의 인기는 급격하게 시들기 시작했다. 그룹 전람회, 김경호, 배기성 등 괄목할만한 가수들이 배출되기는 했지만 어쩌다 한 번 뿐이었다. 그러하다면 왜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학가요제가 쇠퇴했을까? 9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이 급격하게 산업화 단계를 거치던 시기였다. 대학가에서 노래 좀 하는 실력파 가수지망생들은 클럽 등지를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가수의 길을 모색했다. 아니 대학에 들어오기 이전에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일찌감치 음악에 빠져들면서 가수로서의 길을 걸었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어느 날 가요제에 출전하는 방식은 갈수록 고전이 돼갔던 것이다. 또 젊은층들의 음악적 취향도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유로팝이나 댄스음악, 힙합으로 이어지는 음악적 트랜드의 변화를 대학가요제가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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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생산하는 시스템도 변했다. 지금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소속된 SM엔터테인먼트 등이 아이돌 연습생을 모집하여 훈련시킨 뒤 H.O.T.와 S.E.S. 등 소위 아이돌그룹을 내놨다. ‘연습생’ 이라는 이름으로 외모, 실력 등을 갖추게 하는 시스템이 생겼고 기업화된 음반회사들의 자금력 및 기술력을 등에 업고 성장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중·고등학교 시절에 밴드의 일원으로 시작하여 음악적 역량을 키워온 가수들이 대학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시장에 나왔다. 양현석과 이주노 등도 이태원을 중심으로한 클럽에서 춤꾼으로 소문나면서 가요계에 입문한 케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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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보니 대학가요제는 갈수록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가요제라는 이름으로 일약 스타로 발탁되는 가수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작사, 작곡, 편곡, 댄스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아이돌을 육성하는 제작사와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내는 음악과의 괴리감이 차츰 커진 것이다. 대학가요제를 위축시킨 건 2010년대 이후 활성화 된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하는 대학가요제는 시작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학가요제는 2012년을 끝으로 잠시 폐지됐다. 당시 MBC는 낮은 시청률 등을 이유로 2013년부터 대학가요제를 개최하지 않기로 했으나 시청자들의 항의와 대학가요제 수상자들의 서명운동으로 2014년부터 대학가요제를 재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새로운 스타와 히트곡 탄생의 부재,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등장 등을 이유로 2014년 결국 최종 폐지로 결정되면서 대학가요제는 한동안 개최되지 못했다. 이후 폐지 7년만인 2019년에 대학가요제가 부활했지만 여전히 성공여부는 불투명하다.

 

* 《쿨투라》 2020년 12월호(통권 7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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