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영화 격월평] 아버지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앤트 팀프슨 〈컴 투 대디 : 30년만의 재회〉
[장르영화 격월평] 아버지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앤트 팀프슨 〈컴 투 대디 : 30년만의 재회〉
  • 양진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1.01.0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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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아버지는 영화에서 권위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소유’ 혹은 ‘존재’의 문제에 있어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기생충>(2019)에서 생활력 없는 아버지(기택)는 아들(기우)에게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라고 당당하게 얘기하고, 이창동의 <버닝>(2018)에서 아버지(용석)는 죄수복을 입은 상태에서만 아들(종수)을 만날 수 있다. 그나마 연상호의 <염력>(2017)에서 이혼당한 아버지(신석헌)는 딸(신루미)을 공권력으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해 초능력이라도 쓴다.

  전 세계에 걸친 자본주의적인 내부공간, 즉 ‘구(球)’의 체계에서 ‘안(세계)’과 ‘바깥(개체)’을 연결하는 것은 ‘돈’이다. 아버지는 여기서 가부장의 권위를 유지할 수 없다. 구의 주민들은 자신의 교환가치를 통해 소통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임을 알리는 기표인 ‘이름’을 버리고, 그 자리에 ‘정가(定價)’를 붙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아버지는 자식과 세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세계 속에서 둘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단어는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다. ‘구’에 남은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믿음을 보장해주는 무언가가 이 세계에 거의 남지 않기 때문이다.

  앤트 팀프슨 감독의 <컴 투 대디: 30년만의 재회>는 그런 아버지에게 편지를 받은 주인공 ‘노발’의 불안으로부터 시작한다. 노발의 아버지는 30년 만에 그에게 편지로 연락해온다. 양육을 포기한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에게서 거의 들은 게 없어서, 그에게 아버지는 타인이나 다름없다. 30대 초중반쯤 되는 노발은 아버지의 도움 없이 성장한 나름 성공한 음악 업계 종사자이다. 비벌리 힐스에서 살 만큼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없이도 ‘어른’이 될 수 있었고, 딱히 아버지에 대한 결핍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손수 편지를 써서 ‘꼭 찾아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한 것이다. 그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질문, ‘잘 팔리는’ 전문가가 되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어쩌면 아버지가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하지 않았다면 불안도 없었겠지만, 편지는 이미 그의 매끈한 일상에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빼곡하게 적힌 글자와 ‘집으로 오는 지도’의 곡선들이 가리키는 곳. 숲속 깊이 자리한 별장으로 그는 의심에 찬 한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벽난로 앞 탁자에 체스판이 놓여 있다. 아버지가 주는 와인을 거부한(알콜 의존증때문에) 노발은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며 “네 엄마랑 잤냐?”라고 묻는 아버지의 속내를 도무지 읽어낼 수 없다. 미열과 연기로 느슨하게 짜인 대화 위에 그가 ‘레지널드(가수 ‘앨튼 존’과의 친분을 드러내기 위해 노발은 그를 본명으로 부른다)’라는 체스 말을 올려놓는다. 나름 잘나간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미 ‘대결’이 되어 버린 아버지와 자신의 대화를 억지로라도 이어 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레지널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비숍 이상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그 말을 아버지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레지널드의 운전사였다고 하며, 밤중에도 사적으로 전화를 할 만큼 친한 사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레지널드에게 전화를 걸려고 한다. 그러자 노발은 아버지에게 “제발 전화를 걸지 마세요”라고 부탁하며 자신이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느꼈다던 레지널드와의 관계가 거짓이었음을 실토한다. 그러자 아버지도 자신과 레지널드의 얘기는 거짓이었다고 말한다. 둘의 대화를 중계한 것은 레지널드였다. 하지만 그 기표는 텅 비어 있다. 이미 체스판이 되어버린 노발과 아버지의 대화 속에서, 어쩌면 레지널드가 체스 말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레지널드의 체스 말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지 않은 대화를 성립하게 하는 유일한 보증인이 바로 레지널드이며 노발과 아버지는 그와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엎어진 말들이 치워진 뒤, 그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노발은 30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막말하고 치욕을 준 아버지를 더 이상 아버지로 여기기 어렵게 된다. 이제 노발에게 남은 것은 그를 숲속 오두막으로 이끈 질문 뿐이다.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아버지’는 누구인지. 또 아버지는 왜 이제야 자기 안에서 그 질문을 꺼낸 것인지. 그는 아버지에게 “왜 30년 만에 편지를 써서 나를 여기로 불렀죠?”라고 묻는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에게 “적당히 해 **”이라고 욕설로 답하고, 노발도 ‘아들’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붙들고 있기 어렵게 된다. 대화가 필요 없는 그들은 서로에게 분노를 퍼붓고, 마침내 아버지가 아들에게 식칼을 들고 다가오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버지는 노발의 멱살을 쥐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곧 숨이 멎는다.

  보안관과 검시관이 다녀가고, 시체는 방부처리가 된 뒤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홍수 때문에 저장고가 고장 나서 아버지의 시신을 놓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포대 속에 담긴 아버지와 하룻밤을 보낸다. 아버지의 옷을 입어 보고, 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던 터무니없는 책(제목이 『천상의 예언』이다)도 읽어보고, 아버지가 바라봤을 해변과 바다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의 아버지는 분명 편지를 썼다. 휴대전화도 있고 인터넷도 있는 시대에, 아버지는 오두막으로 오는 지도까지 그려가며 꼭 아들을 만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불러낸 이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갑자기 죽어버렸다. 노발에게 남겨진 것은 아버지의 머릿속과 같은 오두막뿐이었다. 아버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비벌리 힐스로 돌아가도 그를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아들에 대한 눈곱만큼의 존중도 없는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해서 그가 아버지에 대한 결핍감, 혹은 자기 근원에 대한 결핍감을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발은 텅 비어 있는 아버지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모든 아버지의 비밀 상자들이 그렇듯, 오두막에는 ‘무기’와 ‘장난감(성인용)’들이 숨겨져 있다. 노발에게는 전부 위험한 물건들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순간 자신의 현실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 위에 피어오르는 그 강렬한 의미들 속에서 노발은 망설이기도 하고, 애써 피하려고 와인을 들이켜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쇳덩어리로 막아 놓은 지하실 입구에서 들려오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으로 돌입한다.

  우리는 지금 아버지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는 어느 순간에, 그는 내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그것은 ‘취향’이나 ‘말투’ 같은 사소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도덕감’이나 ‘윤리’ 같은 복잡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억압을 통해 우리를 사회로 진입시킨 전통적인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라진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격이 매겨지는 동안, 그리고 우리가 디지털 신호로 인코딩되는 동안 아버지는 우리 꿈속으로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 혹은 설명되는 것에 저항하는 감정들을 닮아 있기도 하다. 아버지의 오두막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진짜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 그와 싸워야 할 수도 있고, 그에게 굴복해 우리의 현실을 모조리 갖다 바쳐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는 여태껏 들려주지 않았던 간절한 음성으로, 편지라는 시대착오적이고 어색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해줄 수 없겠지만, 적어도 가상에 중독된 우리의 몸속에도 ‘뜨거운 피’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SNS와 포털 사이트, 유튜브의 텅 빈 정보에 중독되어 삶의 전부가 시뮬레이팅 될 것 같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 《쿨투라》 2020년 12월호(통권 7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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