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천재 화가 이인성의 삶과 예술세계: 대구미술관&이인성
[미술관 탐방] 천재 화가 이인성의 삶과 예술세계: 대구미술관&이인성
  • 김명해(화가)
  • 승인 2021.01.2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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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걸어가는 초겨울 늦은 오후. 대구미술관 입구는 지금 피라칸사스 나무의 붉은 열매가 도드라지게 빛나 행인들이 일렬로 서서 고개 숙여 맞이하고, 길 가장자리엔 낙엽 카펫이 황금색으로 깔려 일부로라도 밟고 지나가도록 펼쳐져 있다.

  대구미술관은 입구가 여러 곳이라 어느 쪽으로 가든 출입문까진 비슷하게 도착한다. 서편 주차장에서 직선으로 곧게 뻗은 넓은 오르막길은 무리 지어 가기 좋은 길이고 서편 주차장에서 피라칸사스나무 울타리 길은 친구나 연인과 둘이 속삭이며 걷기 좋은 길이며 남쪽 주차장에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름다리를 건너 미술관 앞까지 바로 연결된 길은 급할 때 가기 좋다. 그런가 하면 개인적으론 계곡물이 흘러 고여 있는 분수대 옆 지그재그로 이어진 계단길이 좋으며 동편 주차장에서 원형으로 이어진 달팽이 길도 재미있다.

  대구미술관은 2011년 5월 26일 개관하고 대구광역시가 지원하는 시립미술관이다.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1천 점 이상의 근·현대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하 1층의 프로젝트 룸, 1층의 어미홀과 1전시실, 2층의 2~5전시실, 선큰가든(sunken garden, 건물 높이보다 낮으면서도 외부와 통하는 장소에 설치한 정원-편집자 주)을 활용해 다양한 규모의 기획 전시가 개최된다. 지하 1층의 프로젝트룸은 24개의 기둥이 있는 공간으로, 진취적이고 실험적인 신진 작가들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다목적홀인 어미홀은 ‘품어내는 장소’, ‘자연의 모체’라는 뜻에서 지어진 명칭으로 미술관 각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관람이 가능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3층 높이의 통창이 특징인 대규모의 공간으로,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설치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 2층 2전시실은 바깥 풍경이 내다보이고 선큰가든은 자연광이 유입되는 전시 공간으로 회화, 조각, 설치 등 어떠한 작품을 전시해도 작품이 멋쩍어 보인다. 전시실마다 지닌 이러한 장소적 특수성을 이용해 다양한 전시가 기획된다.

  대구의 근·현대미술의 뿌리와 역사를 한국미술의 맥락 속에서 조명하고 대구 미술의 정체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동시대 국제미술의 흐름 반영하는 전시를 기획해 선보이고 있다. 또한 우수한 명사 초청 강연은 물론 어린이, 청소년 등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비롯해 미술관 공간과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공연들과 각종 이벤트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구미술관에서는 대구 출신 화가 이인성(1912-1950)의 작품세계와 예술정신을 기리고 회화 영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2000년부터 “이인성미술상”을 제정하여 운영 중이다. 이인성미술상은 회화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작품 활동을 개진하고 있는 작가를 대상으로 매년 한 명의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이듬해엔 수상자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개인전을 개최한다. 올해(2020년)는 제21회 수상자로 강요배(1952∼, 서양화가) 작가가 선정되었으며 현재 대구미술관에서는 제20회 수상작가인 조덕현(1957∼ ) 작가의 ‘to thee 그대에게’라는 전시 제목으로 제2전시실, 선큰가든, 제3전시실에서 작품이 전시 중이다. 또 미술관 4-5전시실은 올해 이인성미술상 운영 20주년을 맞이하여 역대 수상자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 선보이는 특별전도 개최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대구미술관 탐방>에서는 일제강점기 대구가 낳은 천재 화가 이인성(1912-1950)의 삶과 예술세계를 짚어보고자 한다.

  이인성이 태어나서 화가로 활동하고 생을 마감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6·25 전쟁까지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터널을 거쳤던 화가 이인성에게 고향 대구는 유일한 빛이었고 그는 어두운 시대 상황과 넉넉하지 않은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고향 사람들의 전폭적인 도움과 격려를 받으며 근대기의 거장으로 성장했다.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나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으로 불리며 이름을 알렸으며 대구와 일본을 오가며 작업에 매진하였던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는 그의 황금기였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인성은 유럽 근대회화의 사조인 인상파·후기 인상파·야수파·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을 자신만의 표현기법과 양식으로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작품 표현에 있어 수채화의 과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는 근대 한국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이 그로부터 처음 보인다고 미술학자들은 평하고 있다.

  이인성이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의 보나르, 세잔의 양식을 섭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서구 사조의 무분별한 차용자는 아니었다. 1935년을 전후한 그의 작품들은 이인성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분위기를 확립시키고 있다. 향토색에 대한 민족주의 또는 식민주의의 논의와는 별도로 이인성의 향토색 작품들이 특히 6·25를 겪은 1950년대 작가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종합해 보면 이인성은 우리나라 근대 화단의 중앙에 위치한 화가였다. 그런데 화가 이인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성공이 조선미전과 일본의 관전을 통해서였고 따라서 이것은 그를 출세지향적 화가로 비치게 한다는 점과 그의 향토색 작품 역시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아마도 그의 한계였다고 할수 있다. 그리고 다른 화가들이 해방이후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며 작품을 전개한 것처럼 가능성을 펼칠 기회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김영나, <이인성의 성공과 한계> 중에서

가을 어느 날, 1934, 캔버스에 유채, 리움미술관

  이인성의 초기 작품은 주로 근대적 도시풍경을 담백하고 산뜻하게 표현한 풍경수채화이다. 이것은 이 당시 근대 대구미술의 주류가 수채화이고 세밀하고 구체적이지 않고 습작을 할 정도의 현장스케치 같은 담채 기법의 풍경수채화를 많이 그렸다. 서양의 유화가 유입되기 전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전통 수묵 문화가 수채화 문화로 이어졌으며 초기 서양화가들은 수채화가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인성은 그의 미술선배이자 스승인 서동진(1900-1970)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1930년 중반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그의 작품은 수채화에서 유화로 옮기면서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등 다양한 주제의 변화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 나갔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계산성당을 그린 <계산동 성당, 1930년 중반>은 푸른 하늘과 붉은 벽돌이 색의 대조를 이루며, 시간대별로 변화하는 찰나의 색감을 그대로 옮긴 <팔공산, 1930년 중반>은 팔공산이 지닌 산세를 사방으로 흩날리는 붓터치로 과감하게 보여준다. 포근하고 따뜻한 실내 정원을 그린 <온일warm day, 1930년 중반>과 <여름 실내에서, 1934>는 평화롭고 안락한 일상의 모습을 느끼게 해 준다. 아내 김옥순 여사를 모델로 그린 <노란 옷을 입은 여인, 1934>과 어린  딸 애향의 뒷모습을 그린 <침실의 소녀, 1930대 말기>는 그가 가장 행복한 생활을 보냈던 시기의 작품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는 그림이다.

노란옷을 입은 여인, 1932, 종이에 수채

  하지만 우리가 흔히 화가 이인성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서정적 향토화가’이다. 당시 1930년대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들여온 서구문화와 서양화가 점차 정착되던 시기로, 이를 바탕으로 ‘조선적 회화’에 대한 화가와 평론가들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이 논의를 시발점으로 미술계는 ‘조선의 땅’,‘조선의 공기’, ‘조선의 심(心)’,‘조선의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자는 향토색론(鄕土色論)에 대한 회화이념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인성도 대구 서양화가들이 창립한 <향토회, 鄕土會>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예술의 순수성을 살린 정신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 미술의 향토색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연재기행문 <향토를 그리다>라는 글을 보면 자신의 향토색 화풍실천에 관한 글을 언급하면서 유난히 ‘적토’를 강조하고 있다.

“나는 제전(帝展) 출품 제작 때문에 향토의 풋풋한 흙의 향기를 보면서 걷게 되었다. 역시 나에게는 적토(赤土)를 밟는 것이 청순(淸純)한 안정을 준다. 참으로 고마운 적토(赤土)의 향기다.”
- 《동아일보, 1934. 9. 7.》

  1934년 작품 <가을 어느 날>은 그러한 그의 이념과 향수가 잘 구현된 그림으로 작품에 도시적인 분위기를 담으려 했던 이전과는 달리 풍부한 색채, 연속적인 붓질, 탄탄한 기본기와 구성력을 바탕으로 향토적인 색과 정서를 불어넣었다. 이후 <경주의 산곡에서>(1935)를 비롯한 <한정>(1936)의 작품에도 화폭에 구릿빛 흙빛을 담아냈다.

  그에게는 분명한 예술적 지향이 있었으며, 그 점이 그를 평가함에 있어서 핵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첫째, 정통의 서양화적 대상파악법이 철저하다는 점이다. 그의 20년이란 극히 짧은 화도(畵道)의 말기에 있어서는 서양화의 견고한 대상파악이 완벽하게 달성되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화도의 기본을 바탕으로 하여 주변 자연을 서정적으로 개성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둘째는 화폭에 향토색 구현을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암울한 시대인 일제강점기에 있어서 향토색 지향은 전국에서 대구화단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인성은 그러한 향토색 구현을 앞장서서 실현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는 향토색 구현을 주로 주변 자연이나 소재에 대한 정감 어린 파악과 자연이 갖는 색채를 살려내는 것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향토색의 작품화는 그 당시 화가들이 할 수 있었던 이 땅에 대한 애착이었고 정체성을 살리는 애국의 길이었다.
- 이중희 <서양화 태동기에 있어서 이인성 회화의 지향점> 중에서

  ‘향토적 서정주의’라 불리는 그의 화풍은 근대 서양화에 조선 향토색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서정성을 갖추고 있다. 해당화가 만개한 붉은 바닷가와 구릿빛 소녀를 꼼꼼한 붓질과 고운 색채로 공들여 그려낸 <해당화, 1944>, 과수원의 높고 낮은 지형과 지형에 따른 색감, 그림자가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고 바닥과 가까이 그려진 사과 덩이의 수확이 임박한 찰나를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 <사과나무, 1942>는 ‘향토적 서정주의’가 완성된 이후 그의 대표작들이다. 그러나 1950년 비운의 총기 오발 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점차 대중으로부터 잊혀가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그의 작품과 예술세계는 그동안 몇 차례의 추모전과 유작전을 통해 일부가 공개된 적은 있으나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대작들과 예술성 짙은 현존 작품들이 대대적으로 한자리에 전시될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의 작품들은 미술평론가들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으며 한국근대화단의 신미술(서양화) 도입과 정착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유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첫째는 초창기 한국근대화단에서 수채화가로서의 감각적인 기량과 기법의 숙련으로 탁월한 예술적 업적을 일궈냈으며 둘째는 능수능란한 기량으로 한국적 인물 표현을 정립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고, 해방 이후 그의 향토적 소재와 화면구성, 색감 등이 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국전(國展)의 한 지류를 형성하였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

사과나무, 1942, 캔버스에 유채

  이인성 화가가 요절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활동을 했었더라면 우리나라 미술 화단의 계보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듯하면서, 암울한 시기에도 꿋꿋하게 화업을 이어갔던 근대 화가들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오늘따라 유난히 노을이 예쁜 대구미술관과 동네 풍경이 이인성 화가의 그림 속 작품 같다. 붉은 하늘과 검붉은 흙빛 산, 낙엽지고 가지만 남은 나무들의 강한 흔들림, 상쾌함과 시원함이 묻어나는 우리 동네 시지의 공기, 주차장 쪽에서 다시 만난 피라칸사스나무의 붉은 열매까지…….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랑하였으면 딸 이름도 “애향” 이인성 화가, 대구가 낳은 자랑스러운 화가이자 얼지 않는 바람이다.

해당화, 1944, 캔버스에 유채

출처: 대구미술관 https://artmuseum.daegu.go.kr/
이인성기념사업회 http://www.leeinsung.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이중희 저 <대구미술이 한국미술이다>
대구미술관, 2019 이인성특별전 《화가의 고향, 대구》

이인성(李仁星, 1912-1950)

1912년(양) 9월 28일 대구 출생
1928년(17세) 수창보통학교 졸업, “촌락의 풍경”으로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
1929년(18세) 수채화 “그늘” 제8회 선전 입선
1930년(19세) 향토회 참가(1934년까지), 제9회 선전 “겨울 어느날” 입선
1931년(20세) 제10회 선전 “세모가경” 특선, 일본 퀸 크레옹 회사 입사
1932년(21세) 태평양미술학교 입학, 제11회 선전 “카이유” 특선, 13회 제전 “여름어느날” 입선
1933년(22세) 제12회 선전 “초하의 빛” 특선, 제14회 일본제전 “초하의 뜰” 입선
1934년(23세) 제13회 선전 “가을 어느날” 특선, 제15회 제전 “여름실내에서” 입선
1935년(24세) 제14회 선전 “경주산곡에서” 창덕궁상(최고상) 수상
1936년(25세) 제17회 일본제전 “한정” 입선, 이인성양화연구소 개소
1937년(26세) 제16회 선전부터 추천작가 선임 및 출품
1945년(34세) 이화여자중등학교 미술교사
1947년(36세)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부 출강
1949년(38세)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
1950년(39세) 6·25 당시 작고
1998년 월간미술 주관 <근대유화베스트10>에서 “경주의 산곡에서” 1위 선정
2000년 호암갤러리에서 작고50주기 회고전 개최
2000년 《이인성 미술상》 조례제정 대구
2002년 문화관광부 2003년 11월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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