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맛은 설득하는 게 아니에요.": 정은정 셰프와 함께
[INTERVIEW] "맛은 설득하는 게 아니에요.": 정은정 셰프와 함께
  • 김준철(시인·미술평론가, 미주특파원)
  • 승인 2021.01.26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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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이라 쓰고, 밥이라 읽으면 뭔지 모를 온기가 느껴진다. 배고프면 울고 배부르면 자는 유아의 1차원적 본능이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었다가 무심결에 반응하는 걸까? 엄마 냄새처럼 말이다. 끼니는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먹는 밥이다. 배고팠던 시절을 겪으며 지나온 우리 민족에겐 유독 식사에 관한 인사가 많다.

  “식사하셨습니까?”,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끼니 거르지 마라.”,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등이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되었다. 좋은 인사도 많은데 한국인들은 왜 하필 밥에 집착할까 싶다가도 서로의 끼니를 염려하고 챙기는 마음이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식구(食口)라는 말은 가족 구성원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역시 먹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엿볼 수 있다. 밥은 그렇게 생존의 의미에서 교류의 도구 또는 집단의 무기로 쓰이기도 한다.

  2020년은 그 어떤 해보다 지루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악몽 같은 시간 속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2021년을 맞는다. 하지만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 그래서 새해라는 말이 전하는 희망으로 ‘밥’이라는 주제를 정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새해 첫 끼로 떡국을 먹는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첫날이니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자는 의미에서 맑은 물에 흰떡을 넣어 끓여 먹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데 의미를 두기도 한다.

  육당 최남선이 1937년 1월부터 9월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했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 의하면 설날에 떡국을 먹는 것은 상당히 오래된 풍속임을 알 수 있다. 떡국의 주재료인 길고 흰 가래떡은 순수와 장수를 의미하고, 흰쌀로 만들어 겨울의 춥고 어두운 음의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양의 상징으로 먹었다고 전해진다.

  ‘밥’에 대해 전 세계에 고객과 키친을 가진 세계 최대의 항공 케터링 다국적 기업인 ‘SKY Chef North America’ Headquarter에서 Executive Chef로 오랜 기간 경험을 쌓으며 대기업 셰프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던 정은정(E. J. Jeong) 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김준철(이하 준)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식당에서 파는 음식이나 집에서 만든 음식을 먹기만 했지, 이렇게 셰프님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무척 기대됩니다. 우선 본인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은정(이하 정) 네, 저도 반갑습니다. 저 역시 ‘밥’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신다고 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조금 늦게 요리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을 했는데 생각보다 재주가 있었나 봐요. 그래서 ‘Le Cordon Bleu Program, California School of Culinary Arts’에서 본격적인 요리 수업을 받기 시작했어요. 요리사의 길이 생각보다 상당히 거칠고 힘들거든요. 그렇게 20년간 다양한 푸드 인더스트리에서 경력을 쌓으며 베테랑 Certified Executive Chef(CEC)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CEC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드린다면 Executive Chef로서 10년 이상의 경험을 쌓은 셰프들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시험으로 American Culinary Federation에서 주관하는 힘든 시험 과정을 통과한 수석 셰프들에게 부여되는 호칭입니다.

말씀만 들어도 상상 이상으로 고된 길인 것 같은데요. 제가 알기로 지금은 그렇게 어렵게 오른 자리에서 사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새로운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사퇴했어요. 첫째는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인 한식과 와인의 페어링에 관해 연구하며 『Chef on the Road, 내가 알려줄게. 와인』과 『아들아, 사랑받는 남자가 되어라.』라는 요리책을 준비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업계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문화원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한국 음식을 외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 외의 활동으로 KBS 방송 프로그램인 ‘스카우트’의 심사위원, JTBC ‘힘 있는 이야기’ 등 몇몇 방송국의 초청을 받아 힘 있고 긍정적인 음식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고요, 현재는 미주 최대 방송인 라디오 코리아 RK 1540을 통해 꾸준히 음식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요.

정말 요리라는 커다란 방향성 안에서 오랫동안 다양한 형태의 일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정 셰프님은 저희가 흔히 한국 예능에서 만나는 셰프와는 다른 건가요?

보통 셰프들은 참 힘들고 바빠요. 그게 또 정상이고요. 물론 자신의 시그니처 음식을 만들거나 예술적인 작품으로 특출한 요리를 만드시는 셰프도 있지요. 하지만 제 경우는, 쉽게 설명해 드리자면 지휘자 같은 역할을 하는 셰프라고 보시면 됩니다. 가장 효율적인 재료와 방법으로 세계 각지의 점포에 소속된 요리사들이 같은 맛과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지휘하는 게 목표인 거죠.

어쩌면 저희가 이야기하는 ‘밥’과 의미가 같네요. 가장 일반적이고 기본이 되고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끼는 맛일 테니까요. 자, 그럼 ‘밥’이라는 주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선생님에게 밥은 어떤 의미인가요?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요. 일단 밥은 무엇도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 막 떠오른 의미는 추운 겨울날 전기장판 같은 거라고 생각되네요.

역시 온기를 떠올리시네요. 아마도 많은 분이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미국인들은 어떨까요?

아마도 그분들은 햄버거나 프렌치 프라이드 혹은 맥 앤 치즈를 떠올릴 것 같은데요. 제가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세계적인 요리사들에게 죽기 전에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상당히 많은 요리사가 맥 앤 치즈와 스파게티를 뽑았다고 해요. 아마도 그들에게는 한국의 흰 쌀밥 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밥’에 대한 의미는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 같은데 선생님이 느낀 차이점이 있을까요?

먼저 한국과 미국은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미국의 경우는 그 과정이 느리고 손님들과 함께하는 주 무대도 부엌인 경우가 많아요. 손님들이 요리에 참여하고 대화하면서 과정부터 즐기는 거죠.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일단 안주인은 부엌에서 정신없이 바쁘죠. 손님들은 거실에 있거나 혹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고요. 한국 분들은 대접의 개념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래서 모든 것들이 손님이 오기 전에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어느 게 좋고 나쁜지를 떠나 저도 그 차이가 분명히 느껴지네요.

아! 또 그런 것도 있어요. 한국의 부모님이나 방송에 나오는 셰프들까지도 모든 요리의 기승전이 건강으로 끝난다는 거예요. 이것은 어디에 좋고 또 저것은 어디에 좋다 하면 맛이 없어도 먹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아는 미국 셰프 중에는 누구도 그런 말 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일단 맛있게 만드는 걸 목표로 하거든요.

맞아요. 한국에서는 유독 그런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음식뿐만 아니라 얼굴 크기나 몸집에서도 보이는 부분에 대해 상당히 예민하거나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음식은 일단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100% 동의합니다.

네. 그래서 저는 항상 이런 말을 해요. “맛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설득하려 하지 마라.” 먹어보면 알 수 있거든요.

: 네. 먹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을 어디에 좋다든가, 무엇을 넣었다든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거죠.

예전에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삼계탕을 가르쳐드린 적이 있는데, 주최 측으로부터 삼계탕에 들어가는 인삼이 몸에 얼마나 좋은지 길게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정작 요리를 배우러 온 외국인들은 빨리 만들어서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해도 그게 어디에 좋은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더라고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외국인들에게 요리를 가르치시면 아무래도 K-food에 대한 반응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실 것 같은데요. 사실 예전엔 한국 음식이라고 하면 김치 정도였잖아요. 그것도 굉장히 비 선호음식으로, 또 그것을 넘어서 혐오 음식 취급을 받았죠. 그 이후 불고기, 갈비 정도가 그나마 한국인 친구가 있는 사람들이 알거나 한두 번 먹어 본 음식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 L.A. 한식당에 가보면 아무리 작은 식당이라도 외국인이 20~50%, 많은 곳은 80~90%를 차지해 놀라곤 합니다. 외국인들의 반응이나 선호도는 어떤가요?

사실 일반인들의 경우 그랬던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입맛이 발달한 제 주위의 요리사들은 오래전부터 한국 음식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오래전에는 중국 음식을 좋아했었고 그다음으로는 타이 음식, 지금은 한국 음식이 확실히 인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유가 뭘까요? 물론 한국의 음악이나 영화,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요.

중국이나 타이 음식도 그렇지만 한식에는 상당히 자극적인 음식이 많죠. 그래서 오감을 자극하는 선명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자극적인 음식의 중심에서 오히려 담백한 흰쌀밥이 빛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외국인들에게 한국 음식을 가르치는 데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제 경우는 일단 한국 음식에 대한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서양 음식을 공부해서인지, 서양 음식과 비교하며 가르치게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제 설명을 어렵지 않게 느꼈던 것 같고, 잘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아쉬운 점은 있죠. 예를 들면 가끔 다른 분들과 함께 요리를 가르치다 보면 한국에서 오신 분 중에 자기만의 레시피로 요리를 가르치는 분이 계세요. 예를 들면 100년 된 종갓집 간장과 50년 된 고추장으로 맛을 내는 요리 같은 거죠. 물론 특별한 음식이 될 수는 있지만, 요리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그 요리법을 집에서 재현해볼 수도, 그 맛을 다시 느낄 수도 없지 않을까요. 그게 어쩌면 한국 음식의 약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렇겠네요. 보다 보급이 가능한 재료로 만들 수 있는 현실적인 레시피가 오히려 의미 있을 것 같네요. 반대로 요즘은 한국에서 한국 음식 보기가 더 어렵다고 들었어요. 수년 전 한국에 갔을 때도 제가 갔던 식당마다 국적 불명의 퓨전 음식들이 판을 치고 있었거든요.

 저도 한국에 갔을 때 그런 것을 느꼈어요. 물론 다 잘못된 것은 아니고, 또 세계화를 하겠다는 도전 의식 같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 얕은 잔꾀로 맛을 가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걸 보면 한국의 ‘밥’은 단순하지만, 그 과정 안에는 많은 품이 들어가는 음식이죠. 씻고 불리고 불을 조절하여 뜸 들이는 모든 과정이 정성으로 묵직하게 담기니까요.

그러고 보면 어느새 음식이라는 것, 밥이라는 것의 의미가 국제적인 통합을 이루고 또 그 한 상의 가치가 단순한 배부름을 위한 것도, 고급스러움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닌 예술의 경지까지 올라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전히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그 한 끼가 단순히 배를 채우거나 특별한 경우, 추억을 되새기는 의미 정도겠지만 말이죠. 셰프님이 추구하는 밥의 의미, 요리의 의미, 한 상의 가치는 어떤 걸까요?

‘밥’은 그리움인 것 같아요. 타국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그리움이 저에게 이 길을 가도록 만든 계기 되었던 것 같고요. ‘밥’을 포함한 한 상의 의미는 화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함께한 이들과 시간을 나누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거죠. 그것은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 국적을 뛰어넘어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신년에 이 인터뷰가 실리게 될 텐데, 정은정 셰프님이 간단하게 저희 독자들에게 추천해주시고 싶은 밥이 있다면요?

며칠 전에도 아들이 와서 해줬는데요. 겨울 무청이나 콩나물, 고구마를 넣은 솥 밥을 해 드시면 어떨까 싶네요. 시래기와 콩나물을 쌀보다 많이 넣어서 섬유질 함량을 높이고요. 고구마를 잘게 잘라 넣어서 탄수화물 섭취를 제한함으로 신년에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신 분들에게도 좋은 무청 고구마 콩나물밥입니다. 간단하게 솥 밥 뜸 들이실 때 준비한 콩나물이나 무청 등을 넣어주시면 쉽게 별미를 즐기실 수 있어요. 그렇게 갓 지은 밥 위에 차가운 우니를 한 두 조각 올려서 비벼 드신다면 더더욱 맛있고 화목한 한 끼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에 당장 해 먹어야겠네요. 셰프님과 함께한 인터뷰여서 그런지 유독 맛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서두에 말씀하신 두 가지의 목표를 모두 이루시는 신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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