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12] X세대는 자신만의 문화를 향유한 최초의 세대였다
[한국 대중문화의 결정적 사건들 12] X세대는 자신만의 문화를 향유한 최초의 세대였다
  • 오광수(시인, 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21.01.2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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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1990년대가 시작될 무렵 한국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끝난 뒤 소위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를 바탕으로 한국 경제는 급속한 성장세를 탔다. 여권 발급 제한이 폐지되면서 해외 배낭여행이 자유로워졌으며 세계화와 정보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문화가 거침없이 밀려들어온 시기였다.

  그즈음에 대중문화계에 X세대가 탄생했다. X세대는 1960년대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지칭하는 말로서, 전체적으로 정확한 특징을 묘사하기 어려운 세대로 정의된다. 일설에 의하면 1993년 아모레 화장품의 ‘트윈엑스’ 광고로 인해 X세대가 신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연령대로는 1990년대에 청소년기나 청년기를 맞은 1970년대생들이었다. 문화와 소비를 중요시하고, 본인이 재미있어하는 것에 집중하는 ‘덕후’ 기질이 있는 세대였다.

  돈이 넘쳐났던 1990년대는 우리 대중문화가 번성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광고기획사인 제일기획이 만든 트렌드 리포트에 의하면 X세대는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개성파이자 경제적 풍요 속에 성장했던 세대로 경제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던 세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1990년대 워크맨의 보급과 삐삐의 유행은 X세대를 자기들만의 문화를 가진 감각적인 소비자로 만들었다. 1994년에 처음 실시된 수능세대이자 일본 만화와 홍콩 영화를 즐긴 다문화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당시 X세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는 파격적인 음악과 춤으로 대중음악계를 평정한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에 발표한 1집이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거두며 X세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세대라는 의미의 X세대와 서태지가 구사하는 자유로운 음악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X세대는 조국 근대화를 위한 산업 역군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근검절약이 몸에 밴 전 세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성장기를 보냈기 때문에 소비 지향적이라는 특징을 드러낸다. 이들이 청년기를 보내던 시절에는 유흥가도 최고의 호황기였다. 나이트클럽이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이에 따라 댄스그룹들도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다. 듀스, 코요태, R.ef, DJ DOC, 룰라, 클론, 박진영 등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댄스그룹과 가수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밤무대를 지배했다.

  젊음의 해방구인 압구정동에는 소위 오렌지족들이 넘쳐났다. 이들은 다른 세대와는 다르게 영상매체에 가장 익숙한 세대였다. 소비지향적인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X세대들은 자기표현에도 과감했다. 컬러풀한 염색을 하고, 찢어진 청바지에 워커, 배꼽티, 화려한 악세사리, 자유분방한 음주문화 등으로 늘 화제가 됐다. 이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신세대 배우들도 많이 등장했다. 이병헌, 이정재, 신은경, 구본승, 이본, 고소영, 심은하, 김원준 등이 트렌디한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으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드라마 <느낌>, <마지막 승부>, <종합병원> 등을 비롯해서 영화 <비트>, <너에게 나를 보낸다>, <세상 밖으로> 등 기존의 문법을 뒤집는 작품들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당시 경향신문사는 ‘매거진’과 ‘X’의 합성어로 《매거진X》라는 섹션신문을 내놓으면서 신문업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이 섹션신문의 홍보 모델로 신은경이 출연하기도 했다. 서태지의 등장 이후 댄스음악이 주류를 이루면서 랩과 힙합 등 빠른 비트의 노래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지금의 아이돌 음악, K-POP의 원형을 만든 시기가 바로 X세대가 주도한 90년대였다. 그 당시 개국한 케이블TV 음악 채널인 ‘엠넷(Mnet)’이나 ‘KMTV’가 음악 시장의 변화를 주도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X세대가 몰락한 건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였다. 한국은 혹독한 경제적 시련을 겪으면서 저성장 사회로 진입했고,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심화됐다. 불과 얼마 전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진입했다면서 환호했던 영광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거리에는 실업자들로 넘쳐났다. 외환위기 직격탄을 맞은 X세대는 경제적 안정과 풍요로운 삶이 불투명해지면서 불완전한 세대로 전락했다. 이후 X세대는 X세대는 생존을 위해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에 순응하면서 개인의 경쟁력 강화에 몰두하는 세대로 탈바꿈했다.

환불원정대

  그러나 그렇게 사라졌던 X세대들이 다시 부활한 건 요즘 들어서다. 촛불 정국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진보세력으로 부상한 X세대들은 요즘 대중문화의 트렌드도 주도한다. 그들은 왕성한 문화 소비로 소위 ‘뉴트로’ 열풍을 몰고 왔다. 90년대 히트곡을 내놨던 연예인들의 LP가 한정판으로 발매되면 순식간에 매진된다. 9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여성 연예인 엄정화·이효리가 밀레니얼 세대인 화사·제시와 함께 결성한 4인조 프로젝트 그룹 ‘환불원정대’가 음원 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소위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90년대 X세대의 문화 콘텐츠를 추억하는 X세대가 인터넷의 흐름을 주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X세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았지만 여전히 ‘낀세대’로서 불완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외환위기로 인해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불우한 시기를 넘겼지만, 코로나로 인한 세계적인 위기로부터 가족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무도 지게 된 것이다.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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