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드라마 월평] 사랑을 그대 품 안에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1.01.2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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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다양한 얼굴 〈성 소수자〉
ⓒJTBC

  외국에 나갈 일이 생기면 꼭 그 나라의 시장에 들른다. 유래 깊은 유적지도 좋고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좋지만, 왁자지껄 사람 사는 냄새 풍기는 장터가 늘 나의 우선순위에 놓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금만 여건이 되면 비행기를 타고 사람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해야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다 보니 오랜 시간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다. 코로나라는 국제적 재난 상황까지 맞물려 우물 안 개구리 신세로 기약 없이 세월을 보내는 요즘, 낯선 사람이 들려주는 다양한 세상 이야기가 너무나 그립다.

 

  웰컴 투 타일랜드

  결국, 비행기를 타는 대신 넷플릭스에 들어가 태국을 클릭했다. 〈보이프렌즈〉. 태국드라마는 처음이었다. 궁금증 반 호기심 반으로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내 예상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스무 살 대학생의 러브스토리는 맞지만, 로맨스의 주인공이 남자와 남자라는 것은 내 상상 밖이었다.

  먼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비행기 타고 대여섯 시간만 날아가면 닿을 수 있는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렇게 평범한 연애를 하며 살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워 질투가 날 정도였다. 세상사에 닳고 닳은 나의 메마른 심장이 이렇게 세차게 박동할 줄은 정말 몰랐다. 신세계였다.
  드라마의 원제목은 〈2gether〉. 2020년 9월에 방영된 시즌 2는 〈Still 2gether〉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GMMTV 방송국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영어자막 달린 영상이 방영 직후 업로드되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인터넷에 떠도는 짧은 클립 영상으로만 볼 뻔했다. 넷플릭스 덕분인지, 유튜브 공식 채널 덕분인지, 아니면 대만과 필리핀에서 동시 방영된 덕분인지 드라마와 주연 배우들의 인기는 글로벌하다. 드라마 굿즈 구매 후기를 보면 캐나다와 미국 등 비아시아권에서도 팬덤이 형성되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태국에서는 BL(Boy Love)이란 드라마 장르가 특화되어 있는데, 경이로울 정도로 열린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 개방성이 성적 지향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성 정체성과 함께 인종과 국적 등등 세상 모든 장벽을 아주 쉽고 당연하게 허물어 버린다. 태국에서 인기 있는 배우 랭킹을 보면 혼혈이 꽤 많다. 〈2gether〉의 주연배우 ‘브라이트(Bright Vachirawit)’는 중국과 미국과 태국의 혼혈로,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 배우인 동시에 게이에게 제일 인기 있는 남자 배우다.

 

  게이와 레즈비언

  성 소수자 캐릭터는 비아시아권 나라에서는 매우 빈번하게, 아니 꼭 빠지지 않고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다. 극 중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듯 성 소수자도 당연하게 존재한다. 시즌제 미국 드라마 〈모던 패밀리〉는 로스앤젤레스 배경의 3대로 구성된 가족 시트콤이다. 연장자인 할아버지 ‘제이 프리쳇’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는데, 아들 ‘미첼 프리쳇’이 게이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베트남에서 입양한 딸아이를 키우며 보통의 부부처럼 살아간다. 아기가 자지러지게 우는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헤매기도 하고, 아기 엄마들 모임에 나가 실수하기도 하고, 또 여느 부부처럼 사소한 일로 다투고 토라지기도 한다.

  신기한 것은 극에 등장하는 세 가정 중 그와 동성 연인으로 구성된 그의 가정이 가장 평범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나이, 인종, 직업, 성격… 캐릭터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성 정체성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는 듯 말이다. 너무 현실적인 나머지 재미가 없어서 게이 부부가 나올 때는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여성 교도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즌제 미국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블랙〉은 등장인물이 거의 다 성 소수자다. 레즈비언이거나 양성애자이거나 트랜스젠더이거나. 이성애자라는 게 오히려 어색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극 중 유독 튀는 존재인 이성애자 ‘래리’는 약혼자 ‘페이퍼’가 마약 관련 일로 갑자기 교도소에 수감되어 버리는 바람에 홀로 남겨진다. 외로움도 감당하기 벅찬 그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데, 약혼자가 십 년 전 사귀었던 동성 연인과 함께 수감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전전긍긍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짠하다 못해 불쌍하다. 양성애자를 사랑하는 이성애자의 비애랄까. 이보다 애절한 삼각관계는 세상에 없다.

 

  컴백홈

  ‘성 소수자’라는 드라마 캐릭터 관점에서 볼 때 2020년은 한국 드라마의 태동기, 아니 호황기라고 할 수 있다. 투명 인간 취급하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로맨스드라마 주인공으로 급부상했다. 가히 괄목할 만한 성장세다. 〈응답하라 1994〉(2013)에서 학과 동성 선배를 남몰래 지켜보던 ‘빙그레’가 존경과 사랑 사이에서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고, 〈슬기로운 감방생활〉(2017)의 ‘해롱이’가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게이라기보다는 철없는 재벌 2세 마약 사범으로 주목받던 게 그나마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성 소수자의 모습이다.

  동성결혼을 다룬 〈인생은 아름다워〉도 있긴 했지만 2010년은 너무 먼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아닌가. 앞서 언급한 세 편의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동성애로 포장한 ‘남장 여자’ 서사가 대부분이었던 한국 드라마월드에 2020년 드디어 성 소수자를 전면으로 내세운 드라마가 등장한다. 격세지감이란 사자성어를 빌려오지 않고서는 이 감회를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JTBC

  가장 먼저 2020년 ‘개혁’의 포문은 연 것은 〈이태원클라쓰〉의 트랜스젠더 ‘마현이’다. 주인공 박새로이의 군대 후임병인 그녀는 단밤포차 쉐프로 나온다. 최고의 포차를 선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트랜스젠더임이 아웃팅되며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당당하게 실력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극 중 비중은 작았지만, 그녀는 주인공 못지않게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사람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로 살고, 여자로 태어났으면 여자로 살고, 이게 자연의 섭리야. 당연한 거라고. 근데 너 마현이가 어떤 인간인 줄 알아? 그 당연한 것들을 다 쌩까고 지 꼴리는 대로 사는 애야. 같잖은 걱정? 얕보지 마.”

ⓒtvN

  가족 드라마 〈가족입니다〉에는 성 정체성을 숨기고 결혼한 게이 남편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을 부정하는 가족을 떠나 도피처로써 결혼을 선택하지만, 결국엔 아내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한다. 배신감에 휩싸여 남편과 갈등을 빚던 아내는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의 곁에서 친구로 남는다. 남편의 실연을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 주기도 하고 성 소수자로서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한 명의 가족 구성원으로 성 소수자는 우리 곁에 그리고 한국사회에 무사히 안착한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야식남녀〉는 성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한국 로맨스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드라마는 게이 쉐프가 요리하며 상담해주는 힐링 예능 프로그램 ‘야식남녀’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주요 인물관계는 아버지 수술비가 급해 가짜 게이 행세를 하는 쉐프 ‘박진성’을 사이에 둔 이성애자 김아진 PD와 동성애자 강태완 디자이너의 삼각관계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지만, 나는 강태완의 편에 서서 그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응원했다. 이제는 한국 드라마도 성 소수자의 로맨스를 ‘본격적으로’ 다룰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마음으로.

ⓒJTBC

  액자식 구성을 가진 드라마 〈야식남녀〉에서 김아진 PD가 예능 프로그램 ‘야식남녀’ 기획안을 처음 선보였을 때 본부장은 차갑게 질책한다. “왜? 게이가 나오면 뭔가 자극적이니까 시청률이 잘 나올 거 같고 그래 보여? (중) 생각 없이 다루었다가는 이쪽저쪽에서 욕먹기 딱 좋은 소재야. 알아들어?” 이에 김아진 PD는 “뭐가 자극적이라는 거죠? 그리고 욕먹을까 봐 없는 사람처럼 대하면서 살아가요? (중) 사람들은요 본인이 잘 모르면 나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러면 불편해지고 두려워져요. 저는 그들이 사는 방식, 느끼는 모든 감정, 우리와 똑같다는 걸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라고 응수한다.

  비록 기획 의도와 다르게 게이 강태완의 일과 사랑은 김아진과 박진성의 삶에 잠깐 곁들여진 사이드 디쉬에 불과하게 그려졌지만, 그래서 〈야식남녀〉가 이성애자들의 평범한 로맨스가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성 소수자가 한국 로맨스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자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아,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아니 강태완 품 안에 고이 안겨주고 싶은 배고픈 밤이다. 아, 야식남남.

 

* 《쿨투라》 2021년 1월호(통권 7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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