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Theme] 2021년 한국 시의 미학: 〈2021 오늘의 시 좌담〉
[2월 Theme] 2021년 한국 시의 미학: 〈2021 오늘의 시 좌담〉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21.01.29 14: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성호 안녕하십니까? 오늘 좌담은 2020년 한 해 동안 펼쳐졌던 우리 시의 동향을 개괄적으로 점검하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시집을 검토함으로써, 현재 우리 시의 지향이랄까 좌표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우리 평단에서 가장 활발하고 역량 있는 현장 비평을 해오신 두 분 선생님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최근 한국 시단은 내외에서 활력과 모순이 공존했고 문학장 전체의 변동이 심하게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지난해에는 다양한 층위에서 활달한 자기 성취가 있었다고 생각되는데요, 특별히 ‘오늘의 시’에 선정된 시집의 목록을 살펴보면 중진과 중견과 신진 시인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씩 이야기해보지요. 먼저 제가 황동규, 이재무 시집에 대해 의견을 드리고 홍용희 선생님께서 나태주, 안도현 시집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중진 시인들의 시세계

  유성호 황동규 선생의 『오늘 하루만이라도』(문학과지성사)는 마지막이라고 의식하면서 완성한 시집인데, 선생 자신에게는 실존적 자유로움을 확보하게끔 하고 타자들에게는 심미적 언어의 미감을 부여하려는 윤리적 태도를 담고 있습니다. 제일 앞에 실린 「불빛 한 점」에서 선생은 한때 ‘시’가 눈부시게 앞길을 밝혀주던 ‘횃불’이었지만, 지금은 어둑해진 눈을 따라 출항하지 못하는 조그만 배의 ‘불빛’으로 몸을 바꾸었다고 노래합니다. 미세한 빛을 따라 하나씩 켜지는 불빛들의 나지막한 연쇄가 말하자면 ‘시인 황동규’의 마음을 어느새 “그 무엇을 만나도/다른 만남이 되는”(「이런 봄날」) 차원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끊긴 시에 길을 낸다./더 나가지 않아 다른 길을 낸다./이번엔 길이 습지로 들어가는군./지우고 다시 길을 낸다.”(「한밤중에 깨어」)라고 고백함으로써 운명과도 같은 ‘시인’의 길을 걸어갑니다.  자연인으로서 육신이 약해지는 상황은 한 편으로 “죽음이 없다면/세상의 모든 꽃들이 가화가 되는”(「죽음아 너 어딨어?」) 진실을 알게끔 해주기도 합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불빛’으로의 이행 과정을 수납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이러한 존재론적 고투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려는 의지로 한없이 이어져갑니다. 선생에게 “과거의 나에게 문학은 험한 산지였다. 지금은 막막한 들판, 미래는 노을 한 자락이 묻은 채 저무는 바다가 될 것이다.”(산문 「나의 문학 25년×2.5」)라는 문학적 예감은 하나하나 현실이 되어갔지만, 스스로 베토벤의 음악을 두고 “계속 물리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곡이 있다는 사실”(산문 「나의 베토벤」)을 기뻐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물리지 않는 선생만의 시를 남겨준 것입니다.

  이재무 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천년의시작)는 지상의 감각들이 그의 예민한 관찰에 의해 다양한 소리와 풍경으로 선연하게 되살아난 명품입니다. 시인은 창으로 들어오는 빗소리나 “차갑고 투명해진 개울물 소리”, “엄마의 음성”, “개구리 울음”, “낙과처럼 떨어지는/종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스스로의 서식처인 “고요의 마을”에서 “어쩌다 쓰는 시에도 소리가 들어와 울음 짓는”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평생 소리의 형태를 관찰하며 살아온 연장선에서 “매순간 태어났다 사라지는 소음들”도 소중하게 안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점, 이재무 시의 가장 살가운 성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지상의 감각에 머물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한 편마다의 미학적 완결성을 중시하되 그것이 삶의 구체적 조건을 충실하게 반영하게끔 하고 자연스럽게 시대의 내력을 환기하는 내러티브적 속성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데스밸리에서 죽은 자신을 품고 넘으면서 “시간의 먼 길”을 떠납니다. “안부가 그리운, 먼 곳의 사람”을 그리고, “먼 곳에 사는 정인에게 손 편지”를 쓰고, “저 멀리 돌아갈 집”을 아득하게 바라봅니다. 물론 그는 “60년째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니까 갑자기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비현실의 세계로 비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재무 시의 중추인 간결한 서정성, 타자를 향한 연대, 시대와 사회의 증언, 사랑의 열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의 후반기 시가 인간 존재에 대하여 더욱 두터워진 철학적 질문을 품어갈 것이라 생각해보게 됩니다.

  홍용희 등단 반세기에 이르는 나태주는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더욱 왕성한 시작 활동을 통해 국민시인의 반열에 오른 시인이지요. 그의 시세계는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귀와 눈과 마음을 순화시키는 감응력을 지닙니다. 그에게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자각하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누구나 아름답고 풍요로운 우주와 자연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문득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는 것이지요. 시집 『어리신 어머니』(서정시학)에서도 다음과 같은 시편이 등장합니다. “오늘도 나는 살아있다/오늘도 나는 어딘가를 간다/오늘도 나는 누군가를 만난다/오늘도 나는 무슨 일인가를 한다//오늘 하루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좋은 일」) 아주 평이한 일상이 기적 같은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이 새삼스러운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생활 속에서 명징하게 자각하고 향유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겠지요. 나태주는 이에 대해 자기방어와 오만의 벽을 허물고 “겸손하고도 따스한 마음을 가”(「시인의 마음」)질 것을 전언합니다. 그는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조문객들에게 절을 하면서 “어머니 가시는 마당에 한 수/가르쳐주고 가셨다”(「납작 엎드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절을 하는 것이 곧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는 이치를 몸소 터득한 것이지요. 이처럼 겸허하게 “나를 내려놓”으면 “꽃이 말을 걸어주고/풀들이 귀를 기울여주고/하늘 구름이며 바람이며 새들이/눈길을”(「시인의 마음」) 주는 행복한 공감과 향유의 마당이 펼쳐집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행복의 시학을 행복의 언어와 어법을 통해 적실하게 노래하고자 합니다. “세상에 와서/내가 하는 말 가운데서/가장 고운 말을”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의 행복의 시학이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한 동요의 리듬과 화법을 타고 흐르면서 어느덧 독자들을 본래의 맑고 투명한 동심의 감성과 감각을 되찾게 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적 언어들은 치유와 위안의 힘을 갖게 되지요. 그가 국민시인의 반열에 오른 안팎의 사정이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안도현은 누구보다 정교하고 섬세한 언어의 세공술이 두드러진 시인이지요. 그의 시세계 또한 잘 다듬어진 언어의 수정체에서 배어나오는 아련한 무늬결과 화음이 어우러지면서 개진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간행한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는 이러한 기왕의 창작방법론과는 다른 층위를 보여줍니다. 기존의 예민한 시적 촉기와 기예가 다소 무던해지고 그 자리에 내성적 사유가 대신하고 있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를테면 「연못을 들이다」에서 “마당에 연못을 들이는 일”에 대해 “세상의 풍문에 귀를 닫고 실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게 찰랑거릴 수 있다면 나는 그걸 연못의 감정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못에 대한 물질적 감각화를 통한 의미의 환기보다 마음의 연못을 향한 사유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호미」에서 역시 “호미는 불에 달구어질 때부터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렸을 것”이라고 그 의미를 전달합니다. 보여주기의 묘사보다 해석하기의 진술 쪽으로 창작 방법론이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 장르의 이론가이긴 하지만 게오르크 루카치가 개념화한 추상적 이상주의에서 환멸의 낭만주의로의 전이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까요. 외적 삶이 영혼에 제공할 수 있는 운명들보다 영혼이 더욱 넓고 크게 구성되면서 외부 현실보다 내성적 삶의 지향이 우위에 놓이는 지점이지요. 「경행(經行)」은 이러한 변이의 한 극점에 놓입니다. “일용직 새들이 강으로 가는 소리 들린다 강변에 세숫물 떠다 놓았다 고라니는 백사장에 벌써 발자국을 몇 켤레나 벗어 놓고 숲에 들었다”. 담박한 선미(禪味)의 감각이 느껴지기도 하지요. 낙향한 시인의 마음의 밭의 경계가 어디까지이고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과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합니다. 이 점에서 안도현의 이번 시집은 또 다른 출발 지점으로서 유별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중견 시인들의 시세계

  유성호 이제는 한국 시의 중간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시인들로 가볼까요? 이분들의 성취는 한국 시의 자산을 예감케 한다는 점에서 퍽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먼저 함돈균 선생님께서 최정례, 김행숙 시집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주시지요.

  함돈균 최정례는 ‘생활의 시인’입니다. 그가 생활의 시인이라는 말은, 그가 산책하거나 관조하거나 달관하거나 품평하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자신이 누추하고 지리멸렬한 생활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내놓고 까발린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 시에서 가장 솔직한 시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가 생활을 얘기할 때, 그는 생활을 대상화하지 않으며, 시를 쓰는 과정에서조차 그 자신을 생활의 일부로 겪으며, 생활인의 감정을 삽니다. 그는 생활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떼어놓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화판에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이 있다면, 문학판에는 최정례의 ‘생활의 감각’이 있습니다. 인간 군상들의 위선에 대한 까발림, 생활의 부조리를 직면하는 순간의 당혹스러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생의 이중성, 시간과 인연의 엇갈림, 그리고 시인 자신이 이 모든 상황의 일부라는 사실을 ‘폼 잡지 않고’ 얘기해온 것이 최정례의 시였습니다. 그러던 시인이 『빛그물』(창비)에서는 유난히 꿈 얘기를 많이 합니다. 실재인지 알았는데, 이 생조차 ‘꿈’이었음을 알게 된 ‘호접지몽’의 자각에 관한 시집입니다. 생의 마지막 무대에 서있음을 지각한 시인은 기쁨도, 슬픔도, 모두 지나가며, 결국 이 모든 생활의 이야기 끝에 ‘혼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나지막하게 읊조립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들 것/나는 그들 사이에 맺혔다/사라지는 물방울 같은 것”이라는 순간성을 지각합니다. 지식인일 수 있었지만 지식인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생활인이지만 생활인일 수도 없었던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시인의 일생은, 아슬아슬한 ‘공중제비’로 비유되고 압축됩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사실상 ‘유고’가 된 최정례 시인이 짜놓은 ‘빛그물’이지만, 그러나 이 시집은 여전히 시인의 그물답습니다. 절망도, 희망도, 밝음도, 어두움도 그 어느 편에도 이 시집은 가담해 있지 않습니다. 이 시집의 수작으로 꼽고 싶은 한 작품의 표현대로라면, 생활은(죽음은) “새도 날아야 하고/강물도 흘러야 하니까” 겪어야 하는 누구나의 그러나, ‘혼자’ 일입니다.

  자연수를 가능하게 하는 0, 실수를 가능하게 하는 허수. 없지 않으나 있을 수도 없는 바탕으로서의 세계가 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점에서 (순수)수학을 닮은 시들이 있습니다. 물리학의 세계에서 메아리는 현실의 목소리로부터 출현하나, 김행숙의 시에서 현실의 얼굴은 먼저 ‘에코’라는 배후를 거느립니다. 실재의 바탕이 되는 가상, 얼굴의 배후가 되는 초상, 목소리보다 먼저 있는 ‘에코’. 김행숙의 시는 허수이자 0의 세계입니다.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문학과지성사)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시적 질문은, 물리적 현실의 근거를 묻는 현실 이전의 가상들입니다. 그러니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라는 질문에서 ‘무슨(what)’을 특정한 실체적 ‘답’을 요구하는 수학능력시험 오지 선다형 질문으로 여기는 것은 치명적인 오독이 아닐까요. 이 시집의 질문은 생산적 답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라고 믿고 있던, ‘정답’이라고 믿고 있었던 삶의 토대를 흔듦으로써, ‘정답’의 허구성, 가상성, 이데올로기성을 질문합니다. 현실의 생산성을 허무는 반생산성, 아니 생산성의 의미가 포괄하지 못하는 비생산성의 영역을 개방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집의 질문들은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거나,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거나 목적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어린아이의 풍선’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집의 질문은 수학자이며 동시에 시인이었던 루이스 캐럴이 바쁘게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고 있는 토끼에게 던진 질문과 유사합니다. 19세기 루이스 캐럴의 그 질문은 근대인을 이상한 나라의 토끼굴로 인도했습니다. 인류의 지상 세계가 거의 종말에 이른 21세기 지금에도 그런 토끼굴이 남아 있을까요. 2000년 초 한국 시의 전성기에 가장 낯선 목소리를 돌출시킨 외계인 시인이 견지하고 있는 이 초지일관의 감각은 가히 경이롭습니다.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유성호 다음으로 홍용희 선생님께서는 박형준, 안상학의 시세계를 개관해주시지요.

  홍용희 박형준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창비)은 과거의 시학의 특성을 지닙니다. 그는 스스로 “휴일의 정오/유리창은 과거 속에서만 빛난다”(「나무 속 유리창」)고 표백합니다. 과거를 현재 속에 불러오고 재현시키는 “유리창”이 그의 시세계의 중심음을 이룬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과연 그의 시세계에는 지난 시절의 풍경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차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린 시절엔 논에서 술래잡기를 했지/짚단을 빼낸 다음 그 속에 숨었다가 까무룩 잠이 들곤 했지”(「겨울 귀향」)라고 진술합니다. “차창” 밖 “나무”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연히 전개되는 무의지적인 기억의 세계를 도래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벤야민의 경우 어린 시절 험 중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보다 기억되지 않는 망각된 이미지의 무의지적 재생을 더욱 주목했지요. 그것은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기억되는 것으로서,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무시간적으로 존재하면서 현재 속에 되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박형준의 과거의 기억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생한 현재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를테면 「칠백만원」은 그의 이러한 기억의 현재적 존재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어머니 기일에/이젠 내가 이불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얘기를/식구들에게 하며 운다네” “장가 밑천으로 어머니가 이불 속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이불 속에서 슬프게 칙칙해져갈 만 원짜리 칠백 장”. 어머니나 칠백만원 모두 부재하지만, 그러나 그 부재는 현존보다 더욱 강렬하게 현존하는 부재입니다. 아니 현재적 삶의 구성 내용이며 지침으로 작동하는 과거이고 부재인 것이지요. 박형준의 이번 시집에는 이와 같이 경험된 현재로서의 과거의 시간이 도처에서 살아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의 시간성의 깊이이며 독자들에게 전하는 체험적 동질성과 감동의 깊이라고 할 것입니다.

  안상학의 시적 삶의 주조는 강의목눌(剛毅木訥)의 질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박하다는 것은 꾸밈이 없이 수수하고 어눌하면서 강직한 정감을 근간으로 하지요.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인(仁), 즉어진 자질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안상학 시집 『남아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걷는사람) 역시 이러한 질박함이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남아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이란 고비사막에서의 시간 의식이라고 합니다. 물론 「고비의 시간」에서는 이와 대칭되는 “모든 지나간 날들”은 “어제”로 통칭됩니다. 삶의 시간을 어제와 내일로 평면화하면 지나온 삶의 내력도 좀 더 평명하게 대상화할 수 있겠지요. 과연 이번 시집에서는 지나온 삶의 역정이 마치 시간 여행하듯이 선형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나간 인생길의 파노라마를 마치 손금 보듯 극적으로 조감하고 있는 「생명선에 서서」, 「북녘거처」 등은 이러한 문맥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에게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미래로 나옵니다. “그동안 써왔던 시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며/내 삶의 가장 먼 그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지요. 과거가 새로운 미래의 묘처(妙處)가 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특히 그의 이번 시집에서는 안동의 재래적인 풍속도가 지역 방언과 버무려지면서 실감 있게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안동식혜」의 경우를 보면, “엿지름을 한데 홀 버무려”, “날매동”, “어매가 아니고 맏어매여서”, “그리움을 제우 달래나” 등등의 어휘들에서 배어나오는 토속적 질감이 마치 평안도의 시인 백석의 경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안동식혜”의 식감은 안동 말이 아니고는 제대로 그릴 수 없음을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간고등어」 「헛제삿밥」 등에서 확인되듯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안동 방언만의 시적 가능성이 안상학을 통해 새삼 깨어나고 있는 셈이지요. 이렇게 보면, 안상학 시의 강의목눌의 질박한 미감은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유서 깊은 안동 방언의 내력과 성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신진 시인들의 시세계

  유성호 이번에는 가장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시인들로 가보겠습니다.

  함돈균 천수호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문학동네)는 생로병사라는 생의 감각을 기조로 한 시집입니다. 몸과 가족(‘언니’)은 이 기조가 드러나는 매개물입니다. 시집은 이 감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것같이” 수용합니다. 나 아닌 존재들의 생로병사는 온전히 ‘나’의 것일 수 없지만, 멀리 있지도 않은 ‘열기’로 감지됩니다. 이 시집에는 전체적으로 어떤 ‘미열’이 느껴지는데, 아픔에 대한 감각이 전달되는 이 특이한 방식이 시집을 전통적 서정시와 갱신된 서정시 사이 그 어디에 위치시킵니다. 생의 특정한 국면을 언어로 표현하되, 설명되거나 보이기보다는 어떤 종합적 공감각으로 지각되는데, 이 물질성의 핵심에 깃든 ‘병’과 ‘죽음’이라는 요소가 시집에 애잔한 무게를 부여합니다. 이 시집의 ‘미열’을 느끼면서(읽으면서) 문득 독자는 자기가 겪는 인생 희로애락을 떠올리며 물끄러미 생각에 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기쁨과 만남보다는 병과 죽음이라는 사태가 아마 더 보편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래서 가능한 개인성에 최대한 집중함으로써 역으로 존재의 보편성을 환기합니다. ‘젖은 수건’은 그래서 그 어떤 물건보다 더 잘 건네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닐까요. 하지만 시인은 닦으라고 손수건을 건네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래 울음으로 우는 소리만 듣고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시인은 이것을 시의 위로이자 위의라고 여깁니다.

  “말랑거리는 것들”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 “어마어마한 반딧불”을 찾는 소녀의 시, 안희연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의 세계입니다. 이 시집을 통해 이제 안희연은 자신만의 한 세계를 구축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세계는 완결된 세계라기보다는 계속 찾아가야만 하는 여정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시집에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낭만주의적 이상이 여전히 숨을 쉬며 그 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시인의 낙관주의와 같은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대적 차원의 개방성을 내포하기에 생생합니다. 시인은 ‘여름 언덕에서’ 조화로운 삶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배웠다’)기보다는, 계절의 싱그러운 순환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된 듯합니다. 안희연에게 유토피아는 삶의 기획을 통해 이루어지는 어떤 내용이라기보다는, “완성을 바라는 마음” 자체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없는 현실(‘유토피아’)을 향해, 있는 현실을 돌파하려는 단단한 관념과 역사의 믿음으로 무장하기보다는, 차라리 “네가 아는 가장 연약하고 보드라운 것을 생각”하는 시적 순결성을 떠올립니다. 무엇을 알고 기획하는 이성의 능력이 아니라, 이 순결성의 감각을 늘 상기하고 회복하려는 시인이 노력이, 독자로 하여금 이 시집을 유토피아의 실루엣과 닿게 합니다.

 

  정형 미학의 세계

  유성호 이번에는 제가 정형시 쪽 성취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먼저 박기섭 시조집 『오동꽃을 보며』(황금알)는 정형 속의 자유를 산뜻하고도 풍요롭게 밀고 가는 율문과 미학을 현대성의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시조는 섬세한 자기탐구와 함께 한국어가 이루어가는 첨예한 현대성으로 한껏 충일하게 전개됩니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묵정밭에 시의 터앝을 연 40년 세월을 스스로 반추하면서 각북(角北)에서 길어올린 서정의 성취들을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시집에 등장하는 수많은 꽃들도 그러한 삶의 산물일 것입니다. 표제인 ‘오동꽃’을 비롯하여 복사꽃, 모란꽃, 연꽃, 매화, 접시꽃 등이 연쇄적으로 나오고, 그것들은 박기섭 시조를 삶의 터전으로 오롯이 귀환시키는 강력한 매개 역할을 합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그루 복사나무처럼 세상을 지켜보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 시조단의 든든한 기둥으로서 존재감을 압도적으로 선사합니다. 그는 작품의 심미적 효과를 통해 우리의 심미적 체험을 형성해주는 시조단의 둘도 없는 장인이니까 말입니다. 결국 이번 시조집은 왜소함에 떨어지곤 하던 우리 시조의 관행을 훌쩍 뛰어넘어 삶과 사물과 시조에 이르는 원형적 사유와 실존적 자의식을 통해 선 굵은 음역과 이미지의 고유한 활력을 보여준 성과인 셈입니다. 그만큼 박기섭의 언어는 회감과 깨달음이라는 서정의 원리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웅장한 스케일의 권역에 대한 인지적 충격을 서늘하게 선사해갑니다. 자연 사물을 통한 근원적 지경을 상상하는 예의 창작 방법 또한 여기서 천천히 그 적실성을 탈환해갑니다. 정제된 율격과 적확한 표현과 절중한 사고가 그 안에 견고하고 또 풍요롭게 흐르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승은 시조집 『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시인동네)는 소재와 의식의 다양한 확산을 통해 정신주의적 편향을 넘어서고 시조에 대해 부단한 탄력을 부여하여 새로운 율격의 다양성을 보여준 미학적 성과입니다. 치열한 정신의 움직임과 독특하고도 활달한 화법을 보여주는 그의 언어와 사유와 감각이 이채롭게 빛나는 돌올한 성취입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 궁극적으로 죽음이나 낡음을 한껏 내포하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단절되지 않고 갈피마다 완연하게 살아나는 것임을 환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시조가 얼마나 활달한 형상과 견고한 정형 미학을 결합할 수 있는 언어적 실체인가를 두루 실증하면서, 인상적 사물의 기억을 섬세하게 세공하고 인생 도처의 여정을 실존적 깨달음으로 온축합니다. 표제작에서 시인은 “학습 없이 갖게 되는 처음의 감각”을 품으면서 거기서 비롯되는 달뜸과 불안을 한없는 양식으로 삼아 “쓸쓸히 간절해지는 나이”를 천천히 알아갑니다. 「해인식당」에서도 “질러가게 그냥 둔 곳”을 안으면서 “저 혼자 취해 저녁으로 기운” 가을에 “언젠가 우리 한번 들렀던 곳”을 되부르는 그의 감각은 지난날을 호출하면서도 우리 삶의 충만한 현재형을 완성해냅니다. 이처럼 다양한 시간의 순례와 거기서 만난 풍경에 대해 신비하고 심미적인 언어를 배열해가는 그의 눈길이 한없이 미덥게 다가옵니다. 이승은은 그 점에서 낯선 것을 친화와 결속의 힘으로 안아들이는 너른 품의 시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등단 40년을 훌쩍 넘기면서 그가 보여준 정형 미학의 실례가 그 자체로 시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예표해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토록 시조집 『흰 꽃, 몌별』(작가)은 제가 해설도 썼는데, 그의 시조는 견고한 정형 율격에 다양한 현대성을 도입해야 하는 현대시조의 형식적, 내용적 요청에 최대한 부응하는 정서적 모더니티의 한정점을 보여줍니다. 그는 양식적 변형을 통해 형태를 일정하게 바꾸어가기보다는 시조의 시조다움을 묵수하면서 시조 미학의 내용적 확장성을 시도합니다. 이러한 정형 미학의 고갱이를 첨예한 형식적 절제 의지로 표현해간 그의 시조집은 그 점에서 우리 시조가 맞닥뜨리고 있는 과제들에 대한 정공법적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언어는 그동안 현대시조가 의존해왔던 부드럽고 안정적인 화해 지향의 에토스를 넘어, 일상의 페이소스와 현실적 중압을 포괄하는 직핍(直逼)의 사유를 훤칠하게 보여주는 탁월한 성과입니다. 나아가 일견 완미하고 일견 거침없는 언어와 형상을 통해 가장 낮아진 시선으로 세계의 심층을 들여다봅니다. 그가 시조단의 신인이라는 것을 잠시 잊게 할 정도입니다. 시인이 바라본 구상나무 고사목은 바람에 끝을 벼린 바늘잎 세필로는 격문을 쓰지 않겠다며 붓을 꺾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수행해 온 고되고도 소중한 필치를 멈춘 것입니다. 그렇게고사목에 비추어 스스로를 사유한 시인은 뼈를 깎는 뉘우침으로 골각체를 만들어갑니다. 산울림을 통해 “필화가 되어 눈 퍼붓는 한라산”에 선 것입니다. 이 때 간결하고 흰 뼈만 내리 꽂는 “뻣센 반골의 획”이야말로, 면암의 ‘지부상소’처럼, ‘시인 이토록’을 예리하고 단호하게 만들어가는 은유적 힘일 것입니다.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허연 시편의 세계

  유성호 마지막으로 이번에 ‘2021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서 동료 문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허연 시편 「가여운 거리」에 대한 이야기로 한번 옮겨볼까요?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함돈균 선생님께서 대표로 의견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함돈균 2021년 ‘오늘의 시’로 선정된 허연의 「가여운 거리」는 우리가 맞이한 21세기가 새로운 세기가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세기의 또 다른 반복에 불과하다는 시인의 인식을 잘 드러냅니다. 나날의 생활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사는 모두 특별할 것 없는 에피소드들의 한 토막일 뿐입니다. 허연은 도시산책자의 시선으로 일상의 풍경들을 말없이 관조하는 시들을 써왔는데, 쓸쓸하기는 하지만 감정의 착색이 없는 그 시의 풍경들은 희망에 기대지 않는 그의 독특한 시적 태도에 기인합니다. “베란다에 걸려있는 빨래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그는 이 풍경이 속한 시나리오의 전체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는 ‘노래’가 시작되면 어떤 순간에 “화색이 돌기도” 하고 리듬을 타게도 되지만, 결국은 노래가 끝날 것을 압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그의 주특기인데, 사실 이들은 시인의 시에 줄곧 등장한 시인의 페르소나-화자 자신이기도 합니다. 투명하지 않은 “서리 낀 창밖은 질문으로 가득하지만” 답을 하지 않는 이유를 헤아리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의 반복 자체가 질문이 해결되지 않음, ‘답 없는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노숙인들이 앉은 공원의 의자와 그네가 봄날 구청에 의해 다른 색으로 덧칠되어 있다고 해서, 생의 간난신고가 끝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허연에게 이런 시적 인식 또는 태도는 단지 ‘생’이라는 추상적 관념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겨울이 오기 전 거리가 파헤쳐지”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비로소 도시를 이해”하지만, 시인은 이미 ‘도시’가 거짓된 유토피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산책자 시인은 ‘역사’라는 허구를 봅니다. 허연의 시에는 일관되게 ‘허무’의 기조가 깔려 있는데, 이것은 인생에 관한 형이상학적 태도라기보다는, 그가 ‘도시’, 그러니까 인간의 유토피아적 이상에 기초한 ‘역사’라는 이념적이고 계몽적인 계획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날카롭게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의 친구로 불린 작가 모리스 블랑쇼는 시인을 일컬어 ‘희망을 가질 권리가 없는 자’라고 했는데, 허연은 어쩌면 거기에 가장 부합하는 한국시인 중 한 명일지 모릅니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이 부유하는 보헤미안이라서가 아니라, 일관성 있는 허무의 신발을 신고 도시를 걷는 관찰자라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도시’라는 기획이 ‘역사’라는 계몽이 언제나 세기말처럼 닫혀 있는 정치의 나락, 희망 없는 벼랑을 숨기는 문명의 은폐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대면하는 영원한 세기말 산책자입니다.

  유성호 감사합니다. 두 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 《쿨투라》 2021년 2월호(통권 80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