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Theme] 나를 방치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공정하려 애쓰는 마음으로: 은희경 「장미의 이름은 장미」
[2월 Theme] 나를 방치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공정하려 애쓰는 마음으로: 은희경 「장미의 이름은 장미」
  • 허희
  • 승인 2021.01.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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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오늘의 소설’ 수상자 은희경 작가
인터뷰어_문학평론가 허희

“그해 여름 우리는 맨해튼에 있는 헌터 칼리지의 어학원에서 만났다.”1

  은희경이 단편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발표한 시기는 2020년 9월이었다. 칠년 전 뉴욕의 어학원에서 ‘수진’이 만났던 사람들—특히 ‘마마두’와의 인연을 회상하는 이 소설을 읽고 일군의 독자 역시 추억에 젖었으리라. 외국에서 살아본 적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그렇지 않았을까. 지금은 코로나19로 곤란해진 외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현지인 혹은 다른 외국인과의 교류. 그 기억이 아련할 것 같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낭만적으로 느껴지는데, 물론 여기에는 낭만성만 있지 않다. 외국에서는 ‘나’ 역시 외국인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이 내국인에서 외국인으로 바뀌는 경험은 여러 가지 감정을 함께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예 중 하나가 불안감과 해방감의 공존이다. 서툰 외국어로 자기 의사를 또렷하게 전하지 못하는 외국에서 ‘나’는 언어적 존재로서의 불안에 시달리는 동시에, 본국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던 현실적 고민에서는 잠시 벗어나게 되니까.

  또한 이는 역설적이지만, 본국에서는 탈출할 길이 없던 본국어의 자장에서 풀려난다는 의미와 결부된 해방감이기도 하다. 소여로서 거리를 둘 수 없던 본국어를 낯설게 들여다보는 계기는 외국어 공부를 포함한 번역 작업 외에는 외국 체류의 체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자명하게 간주되던 ‘나’의 자명성을 의심하여 스스로를 낯설게 들여다본다는 말이다. 세상에 자명한 것이 거의 없다는 인식이야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식을 실감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 감각으로 변화시키는 까닭에 특별함을 갖는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가 ‘오늘의 소설’에 선정된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다른 소감이 있을 수 없고, 기쁘고 감사합니다.

  서면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은희경은 해당 작품이 ‘오늘의 소설’로 뽑힌 감회를 표했다. 이어 수상작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소설집 『중국식 룰렛』(2016)에 수록된 「장미의 왕자」 이후, ‘장미’가 들어간 제목의 단편을 오랜만에 쓴 것 같다, 무관한 듯 그러나 연결돼 있기도 한 서로의 고독을 인식한다는 점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라는 나의 감상에 대한 답이었다.

  「장미의 왕자」는 같은 제목의 동화에서 따왔어요. 「장미의 이름은 장미」는 주인공들의 대화에 ‘셰익스피어 가든’이 등장하면 서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이구요. 말씀하신 것 처럼 두 소설 모두 고독하고 또 타인에 대해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요. 제가 쓰는 소설의 전반적인 배경 같아요. ‘고독 의 연대’라는 표현을 쓴 적도 있어요.

  ‘고독의 연대’ 라는 표현을 듣고 반가웠다. 은희경 소설이 많은 독자의 지지를 얻은 핵심은 ‘고독의 연대’에 있다고 평소 공감해 와서 그렇다. 홀로 있음의 상태가 불가피한, 그렇지만 고립되지만은 않는 소통의 (불)가능성을 타진하는 은희경 소설에, 예컨대 『소년을 위로해줘』(2014)의 소년처럼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위로를 얻었던가. 

  외국 생활의 상반된 면에 관해 위에 언급한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자. 서툰 외국어로 자기 의사를 또렷하게 전하지 못하는 언어적 존재로서의 불안감, 더불어 본국에서는 탈출할 길이 없던 본국어의 자장에서 풀려난다는 해방감을 거론했다. 전자는 상식이나 후자는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읽고 떠올린 단상이었다. 외국어로 더듬더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 신기하게도 각자 가진 허위의식이 얼핏 사라진다.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세네갈인 마마두와 수진 사이의 영어로 하는 대화도 그랬다. 은희경은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수진이 마흔여섯에 어학연수를 떠난 것은 이혼 과정에서 사람과 언어에 지쳤기 때문이죠. 또 자기 자신 역시 지겨웠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도 벗어나고 싶었고요. 저는 그런 감정을 언어의 특성을 매개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평소의 망설이는 듯한 한국어 만연체’에서 벗어나 낯선 나라에 가서 ‘익명과 일회성의 태도, 깊이 없는 친절, 단답형 문장들, 그리고 여름 시즌 동안만 유효한 임시 신분’으로 살기를 원한 거죠. 그러나 그런 수진의 무책임한 말과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마마두를 만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마마두는 저한테는 문학의 은유이기도 하고요.

  이런 답변은 수진이 이혼 후 느낀 “내게 영원히 소통되지 않는 언어의 찌꺼기들”이라는 문구와도 연동한다.

  저의 첫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1996)에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오해가 시작 되었다는 뜻이다’라고 쓴 적이 있어요. 타인을 이해하고 가까워지려는 욕망은 제가 늘 관심을 갖는 이야기인데요. 그 욕망과 사랑이 결국은 자기애의 구현일 뿐이며 상대에 대한 폭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아요. 수진도 상대에 대한 자신의 순정이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도록 의미를 재단하는 독선적인 진지함의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돌아보게 되죠. 마마두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통해서. 그 과정에서 언어의 역할이 개입되는 거구요.

은희경의 말대로 이해와 오해라는 관계의 모순적인 얽힘은, 기의와 기표라는 언어의 모순적인 얽힘과 짝지어진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도 그러하리라.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전유한 제목이다. 이름(형식)이 어떠하든 의미(내용)는 변하지 않는다는 본래의 뜻이,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장미의 이름은 장미, 반찬의 이름은 반찬, 마마두의 이름은 마마두”하는 식으로 변용된다. 사실 명제의 반복이 불안정한 세계에서 최소한의 뭔가를 확정짓고 싶어하는 노력처럼 보인다는 요지의 코멘트에 은희경은 길게 답했다.

  이름이란 소통 을 위한 규정이면서 한편으로 일반화 과정이기도 해요. 이름 즉 규정이 선입견이나 편견이 돼서 타인을 내 방식으로 재단하게 만들 수도 있죠. 수진은 처음에 마마두라는 낯선 이름에 반응하지만, 그 이름이 그들의 문화권에서는 ‘마호메트’라는 가장 흔한 이름이잖아요. 이 소설에는 어학연수 교실에서 만나는 외국인 학생들이 좀 많다 싶게 등장하는데요. 모두 다른 문화 속에서 다른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므로 선입견에서 관계가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것들을 우열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 어학연수라는 환경이구요. 저는 그처럼 다른 존재들이 이름 즉 선입견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폭력으로 느껴졌어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편견과 이중성, 세련된 무례함, 우월감에서 비롯된 폭력의 용인도 그려보고 싶었구요. 또 그 나라의 유리한 환경에 속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그리는 것이 저에게는 세계라는 구조적인 폭력을 조금이나마 직시하려는 시도로 느껴졌어요. 힘 있는 자들이 확정해놓은 세계란, 말씀하신 것처럼, 약자에게는 불안한 세계이니까요. 배경이 뉴욕이잖아요.(웃음)

은희경 작가님

 1995년 중편 「이중주」로 등단한 은희경은 25년 넘게 소설을 쓰고 있다. 그 정도 경력이면 나아질 도리가 없는 인생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아니면 인생 자체를 초월한 달관의 자세를 보일 법도 하다. 실제 그런 작가를 찾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계속 그녀의 소설을 읽어온 바를 토대로 단언하건대, 은희경은 무뎌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제가 20년 전쯤 소설집 작가의 말에 ‘소설이란 소설가의 현재 이다. 이야기 속에 과거를 끌어냈든 미래를 상상해 놓았든 간에 거기에서 삶을 읽어내는 것은 현재의 눈이다’라고 썼더라구요. 그리고 최근 『빛의 과거』(2019) 작가의 말에는 ‘과거의 나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없다면 현재의 내 삶에 어떤 새로움이 있겠어’ 라고 써놨어요. 저는 소설에서 새로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저한테 새로움이란 건 ‘현재의 재 편집’ 같은 건가봐요. 쿤데라 식으로 말하면, 저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낯선 여인이 아니라 잘 알던 여인의 낯선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서, 지금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질문을 틀에서 벗어난 시점으로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구요. 노력을 해야만 얻어지는 감각도 있지만 다행히 인간에 대한 공부는 늘 흥미롭게 느껴져요. 그래서 작가는 결국 인간의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은희경은 이런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저는 소설을 쓸 때 특별히 취재를 하지 않아요. 그냥 매사에 성의껏 살아가는 편이고 또 내가 사는 세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 것이 결과적으로 취재인 셈이에요. 저의 경우, 어떤 의도를 갖고 취재를 하다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는 것 같아요. 그냥 평소에 열심히 보고 성실하게 살아둔다고나 할까요. 그때 보는 것, 작가가 아니라 개인으로 보는 것이 더 객관적이고 실감도 더한 듯해요. 「장미의 이름은 장미」도 저의 오래 전 경험이 반영된 이야기인데요. 소설을 쓰려고 겪은 일이 아니라, 겪은 일을 뒷날 소설로 쓰게 된 거죠. 내가 지나온 어떤 시간대를 소환해서 집중하다 보면 내가 이런 걸 기억하고 있구나 놀라기도 해요. 흥미로운 건 시간이 지나면서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이에요. 경험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래서 내 경험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데 그런 게 바로 소설인가 봐요. 그래서 모든 소설이 자전적 요소가 있지만 제 이야기는 아닌 거죠. 그런 의미에서 등장인물도 모두 만들어진 인물이구요.

  뉴욕은 가까운 사람이 살고 있어 제가 비교적 시간을 많이 보낸 도시인데요. 아시아의 이방인으로 서 그 도시의 위력과 복잡함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것이 개인의 불안과 고독, 삶의 폭력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져요. 작년 2월에 당분간은 마지막이 될 뉴욕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장소들에 대해 쓸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와서 「장미 의 이름은 장미」를 썼구요. 이 소설을 포함해서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 네 편을 엮은 소설집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 소설 속 인물들이 ‘위축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공정하려고 애쓰기를 바란다’라는 게 그 책을 준비하는 저의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과 본인에 관한 언설이 빈틈없어 내가 일부러 더할 것이 없었다. 다만 은희경의 이야기를 다 듣고, 그녀가 좋아 하는 작가 쿤데라의 소설 『삶은 다른 곳에』가 겹쳐져 이런 생각은 들었다. 만약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우리의 삶이 있다면 그 중 한 곳은 은희경 소설일지도 모르겠다고.


1. 진하게 인용된 문장은 모두 은희경, 「장미의 이름은 장미」(문학동네 104호, 2020년 9월)의 구절이다.

 

* 《쿨투라》 2021년 2월호(통권 8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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