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Theme] 2021년 한국소설의 이름은: 〈2021 오늘의 소설 좌담〉
[2월 Theme] 2021년 한국소설의 이름은: 〈2021 오늘의 소설 좌담〉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21.01.2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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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며

김민정 안녕하세요. 오늘 사회를 맡게 된 김민정입니다. 작년에 이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코로나19에게 2020년 일 년을 통째로 빼앗겨 버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느낀 상실감이 매우 큰 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좌담도 비대면 ZOOM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을 보내고 새로운 2021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국소설을 사랑하는 분들을 위해 위로와 격려의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방민호 세상살이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즈음입니다. 장사하시는 분들, 얼마나 힘들까요? 부디 올해는 코로나도 진정되고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소설은 본래 방 구석에서 읽기 좋은 것이니,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때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하지만, 삶에 쫓기는 마음으로는 소설 읽는 것도 간단치 않겠지요. 모쪼록 작가분들이 이 시대의 고민의 저층에까지 내려가는 작품 쓰고 있기를 바라봅니다.

허희 모두가 코로나19로 힘듭니다. 하지만 똑같은 힘듦은 아닐 겁니다. 그중에 더 힘든 분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의 역할 규정이야 저마다 다를 것이나, 저는 문학이 대문자 서사에 가려진 소문자 목소리들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이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입장에 서있습니다. 오늘의 문학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힘듦에 닿아 있다면, 그리고 그 작품을 읽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 자체가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2. 2021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김민정 2020년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소설이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소설가, 평론가, 출판·편집인으로 구성된 100명의 추천위원을 통해 『2021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추천작을 설문하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격리 시간이 길어지면서 한국소설 판매량이 작년 대비 30% 증가해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다양한 작품세계를 가진 좋은 소설과 소설집들이 많이 추천되어 흐뭇합니다. 허희 선생님이 먼저 ‘오늘의 소설’에 우수작으로 추천된 작품들의 경향에 대해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허희 문단과 대중에 인지도를 확보한 작가들의 작품이 많은 추천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긍정적이면서 부정적인 이중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는데요. 긍정적인 면은 중견 작가들이 여전히 좋은 작품을 쓰고 있다는 것. 부정적인 면은 좋은 작품을 쓰는 신인 작가가 실제로 드물거나, 반대로 이들이 좋은 작품을 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작가 발굴에 우리가 덜 신경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어느 쪽이 정답에 가까울까요?

김민정 우리 문학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중견 작가와 신인 작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품세계를 가진 작가와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작가 모두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할 텐데, 다시 한번 이번 소설 선정의 소중함과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2021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은 소설을 쓰고 비평하는 작가들이 직접 추천을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을 논의해볼까요. 100명의 동료 문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작품은 은희경 작가의 단편소설 「장미의 이름은 장미」입니다. 47살이란 늦은 나이에 뉴욕에서 단기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만난 외국인들과 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데요. 무엇보다 저는 해외 여행이 불가능한 코로나 시대에 외국에서 외국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를 읽으니까 새롭더라고요. (웃음) 이 작품은 그동안 은희경 작가가 보여주었던 매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작품세계는 깊어지고 스타일은 더 세련되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분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 인지 궁금합니다.

방민호 아주 옛날에 은희경, 공지영, 신경숙씨를 비교하는, 아니 그들의 공통점을 이야기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당시 평론가들이 공지영 씨를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걸 보며, 약간은 동정심에서 셋 다 통속적인 요소를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들 재능 있고 가능성 있는 작가들이다, 정도로 썼던 거지요.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공지영 작가는 지금 작가로서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이상한 상황에 빠져 있지요. 도대체 왜 그런 진흙 구덩이에 스스로를 밀어 넣은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나 할까요? 신경숙 작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은희경 작가뿐이고, ‘오늘의 소설’을 보면 그는 여전히 건재해 보이는군요. 이만큼 버티기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소설에서 저는 어떻게 보면 이 작가의 ‘전략’ 같은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도 같아요. 마마두의 피부가 말할 수 없이 검고 깨끗했다고 썼을 때, 이미 이 작품의 방향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요. 아프리카 사람에게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마마두가 말한 것도, 이 영어 교실의 에피소드들을 이것저것 엮어나갈 때도 방향은 명백해 보였습니다. 그대로 저는 이 작품이 좋아 보였는데, 단순히 인종 문제 같은 것 말고도 이 작품은 어긋남이라든가 오해라든가 상상의 의미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묘미가 있으니까요. 이 소설의 마마두는 섬세한 흑인 청년이고 상고르를 좋아하는 만큼 문학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장미를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달콤한 향기는 그대로라는 말 앞에 섰을 때, 저는 왠지 이 마마두가 참으로 아름다운 청년일 것만 같았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여성 화자 주인공은 나이 가 마흔여섯 살이었나, 했으니까 마마두와 그녀 사이에는 더 이상의 관계의 진전 같은 것은 쉽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 은희경 작가의 여성 주인공들이 늘상 그렇듯이 현실이나 관습을 강하게 의식하는 까닭에 미리 방어선부터 치고 나오는 데는 역시 한때의 에피소드로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래서 마마두의 목소리가 나직하고 멀고 아름다웠다든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상상, “나는 여전히 미래에 대해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는다. 가끔은 작가 마마두가 나무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가서 뜨거운 소금을 검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 푸른 하늘과 호수의 장밋빛이 얼마나 아름다울지를 상상해 본다. 누군가의 왜곡된 히스토리는 장밋빛으로 시작한다.”라는 문장은, 이미 예고된 결말이었음에도 강한 이국적 매력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관습과 편견과 현실을 넘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할 테니까요. 마마두는 흑인으로 불려도 그 안에 장미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청년이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임에 틀림없습니다.

허희 은희경 작가의 작품 제목이기도 합니다만, 「비밀과 거짓말」은 은희경 소설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아닐까 합니다. 은희경 작가가 쓴 거의 모든 작품을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요. 「장미의 이름은 장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남을 속여 이용하겠다는 악의적인 사기라기보다, 위태로운 상태일지언정 자기 세계를 유지하겠다는 방어적인 둘러대기인데요. 그것이 이 소설에서는 깨지고 부러진 언어-외국어로 전달되면서 역설적인 진실을 내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아이러니를 은희경 작가는 특유의 시니컬한 통찰로 포착해내지요. 예컨대 이런 문장이 그렇습니다. “나는 나의 왜곡된 히스토리와 함께 나의 시간을 끌고 가야만 한다.” 왜곡된 히스토리로서만 지속될 수 있는 ‘나’의 시간이 빚어내는 고독에 독자가 공감하지 않기란 웬만해서 어려울 듯합니다.

3. 오늘의 ‘소설’

김민정 앞서 대상작인 은희경 작가의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살펴보았는데요. 이 작품과 더불어 ‘이름’을 모티프로 깊은 성찰의 지점을 보여주는 작품이 이장욱 작가의 「유명한 정희」입니다. 제목에서 이미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기지요? “정희 중에서 제일 유명한 정희는?”이란 소설의 첫 문장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은 재미있는데 섬뜩하고, 진지한데 웃기고, 과거의 이야기인데 현재로도 읽히는, 그리고 유명인인 동시에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한, 아주 복잡미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허희 선생님은 이 작품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허희 이장욱 작가는 「변희봉」이라는 단편에서도 그랬고, 실존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켜 실제인 듯 실제 아닌 그러나 실제가 아니라고 할 수만은 없는 현실을 창조하는데 능합니다. 「유명한 정희」도 궤를 같이 해요. 결말부에서야 밝혀지는 거지만, 초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정희와 똑같이 화자도 정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정희는 “유신 시대의 저 유명한 박정희”와 중첩됩니다. 이 소설은 그의 죽음,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망령”에 들린 어린 정희들의 엇갈린 행보를 보여주지요. 그럼으로써 박정희의 유령에 계속 사로잡혀 있는 오늘날 한국의 시대적 좌표를 낯설게 들여다보게 합니다. 소설의 ‘나’는 정희라는 이름을 개명함으로써 곽정희와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장욱 작가는 그런 ‘나’의 인생 역시 실상 곽정희(≒박정희)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못한 게 아니겠냐고 반문하고 있기도 해요. 세련된 정치적 알레고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김민정 이름 혹은 호칭 시리즈 제 3탄입니다. (웃음) 정이현 작가의 「이모에 관하여」에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재연은 마음이 상했다”란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에 밑줄이 쫙 쳐져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소설은 소수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문학적으로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해왔는데요. 이 작품은 최근 소수자 서사가 보여주었던 일상의 폭력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선함과 올바름의 폭력이랄까요. 우리는 언제 어떻게 선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새로웠습니다. 방민호 선생님은 이 작품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방민호 이미 진부한 용어가 되어 버렸습니다만, 정이현 씨라면 이른바 ‘칙릿’형 소설을 가장 잘 엮어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작가가 이 말의 본래 어감처럼 그렇게 ‘얕다는’ 뜻은 아니고, 현실 메커니즘에 ‘포획된’ 듯한 외면성을 보여주는 여성 인물들이 어떤 ‘교활한’ 기술이나 트릭을 안에 품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상당히 날카롭게 표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소설을 보니 이제 이 여성 작가의 인물이 작가를 따라서만큼은 아니지만 꽤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중국에서 온 ‘이모’, 그는 학력도 맞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원래 전해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고, 그 때문에 재연이라는 여성의 ‘이모’ 채용 실험은 갑작스럽게 끝이 나고 맙니다. 무슨 이야기일까 생각 했습니다. 흑룡강성 출신으로 유치원 보모 경력을 가졌다던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어쩌면 불법 체류 중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건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특수한 사례라 할 수 있는 조선족 이야기 일까요? 저는 이 ‘조선족’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하고, 이 말에 월급도 적게 줄 수 있다는 식의 한국적 편견과 차별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만, 이 소설은 이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직장 여성의 아이 키우기와 관련된, 현실에 ‘포획된’ 여성들은 어떻게 견디고 헤쳐 나가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보는 것이 나을 성싶었습니다.

김민정 ‘여성의 불안’이란 점에서 정이현 작가의 「이모에 관하여」와 최진영 작가의 「피스」를 함께 읽으면 훨씬 그 의미가 풍부해질 거란 생각이 듭니다. ‘고딕- 스릴러’ 장르인 「피스」는 한 세대의 여성에서 다른 세대 여성에게로 이어지는 심리적 착취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문장의 리듬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라는 독자 리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정말 절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허희 선생님은 이 작품이 그동안 여성 서사를 다룬 다른 소설들과 어떤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허희 글쎄요. 김민정 선생님의 말씀대로 여성 서사의 관점으로 「피스」를 읽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이 작품은 가부장제에 억압당하거나 동조하는 여성의 삶에만 착목하는 소설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가족 구성원을 아빠・엄마・언니 등으로 지칭하지 않지요. 타자처럼 아빠・엄마・언니의 고 유명을 부르는 ‘나’의 호칭법은, ‘나’를 가족 관계의 틀에 밀어 넣지 않은 채 고유한 ‘나’의 세계를 정체화 하려는 불가능한 의지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안온한 공간은 가족 안이 아니라 가족 밖에 위치합니다. 홉의 좁은 방이지요. 그곳에서 퍼즐 조각 (piece)을 맞추는 동안, 그러나 곧 허물어져버릴 평화(peace)를 느끼는 ‘나’와 홉의 감각은 지금의 청춘 이 현실에 당면하여 어떻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방증하는 면 같기도 합니다.

김민정 '오늘의 소설'에 선정된 7편의 단편 소설 중에서 형식적인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 한강 작가의 「교토, 파사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강 작가가 각주로 달아놓은 것처럼 시와 에세이 사이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글과 함께 김중일 작가의 일러스트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먼저 발표되고 다음 해 한국 문예지에 수록되었는데요. 이번 작품이 한강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방민호 선생님이 한번 짚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방민호 이 소설의 주제는 작품 전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유럽어에서 파사드라는 말은 건물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쓰이는데,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나름의 원칙과 습관으로 정형화한, 세상을 향한 건물의 전면 같은 태도나 성격의 전체 윤곽을 가리킨다나요? 일본에서 초대된 글의 하나로 썼다는 이 소설은, 소설이라고 하니까 소설이라는 것이지요. 작가 자신이 화자인 듯한 이 이야기 속에서 화자는 민아라는 일찍 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야기를 엮어 갑니다. ‘파사드’와 다른, 외면, 전면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면, 진심의 고백 같은 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면 주제라 할까요? 이제 한강 작가도 나이가 꽤 되었으니까요, 주변에 뜻밖에 일찍 죽는 친구도 있고, 인생살이가 고독하다는 것도 더 경험적으로 분명해지지요. 그래서 짧은 사소설 같은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은 정말 겉으로는 정형적으로, 전형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매뉴얼에 익숙한 행동방식, 말하는 방식을 그 사람들처럼 잘 보여주는 경우도 없어 보이지요. 그걸 일본인들의 파사드라 보았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보기에 일본 사람들도 다 살아 있는 실체들이니, 내면이 없을 리 없고, 오히려 외면의 강박이 강해서 내면이 더 부풀어 올라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본인이라든가 그네들의 심리의 상징인 교토라는 것이 이렇게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작품은 한강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라고 볼 때만, 그 이면을 슬쩍 들여다보게 하는 힘으로써만 믿음이 간다고나 할까요? 문장과 여백은 여전히 좋더군요.

김민정 김금희 작가의 「우리는 페페로니에서 왔어」는 “우리는 페페로니에서 왔어”라는 문장을 자꾸 중얼거리게 되는, 마치 수능금지곡 샤이니의 〈링딩동〉 같은 느낌의 소설입니다. 김금희 작가는 김금희표 연애소설이란 표현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과 심리에 대해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한 작가인데요. 우수상에 이어 이번에 두 번 연속 선정된, ‘작가’가 사랑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허희 선생님은 이 작품의 매력을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허희 현재가 현재만으로 이루어진 단독적인 시제가 아니라, 과거와 끊임없이 연계된 지금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역사철학적 명제를 김금희 작가의 소설은 늘 떠올리게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경애의 마음』에 기록된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복자에게』에 오버랩되는 제주 4·3 과 국정농단 사건등 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개인의 미시사도 김금희 소설에서는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노 교수 가문의 족보 정리 작업을 하면서 만난 은경과 오성, 그리고 강선의 관계가 시간이 흘러도 화석화되지 않고, 이해 섞인 각자의 오해 속에 상기되어 재생되니까요. 얼핏 보면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실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진 채 묘하게 연결된다는 인생관이 드러나는 작품이에요.

김민정 포스트(Post) 코로나, 위드(With) 코로나 등등 코로나 19로 인해 2020년은 삶의 태도와 사유방식에 있어 큰 전환점이 맞이한 해였습니다. 작가들도 다양한 시선으로 시대 변화를 문학적으로 형성화하고 있습니다. 김신우 작가의 「추억만 남은 여자」도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코로나 시대에 관한 현실비판적 상상력에 토대를 둔 작품인데요. 소설을 읽으면서 일주일 동안 집에 머물며 언택트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던 제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저도 “컨텍트 존”에서 살고 싶습니다. (웃음) 그동안 깊은 애정을 갖고 한국문학을 오랫동안 지켜봐오신 방민호 선생님이 「추억만 남은 여자」와 함께 함께 앞으로 한국문학이 나아갈 길, 혹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고견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방민호 김신우 작가, 등단한 지 스무 해 만에 겨우 창작집 하나를 내놓고 이번에 이 단편소설을 발표했던데, 한 마디로 놀랍다 할 정도로 메시지가 강렬하고도 복합적이었습니다. 그동안의 내적 숙련이 여실히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시간적 배경은 근 미래,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나머지 세계는 컨택트 세계와 언택트 세계로 양분됩니다. 지금은 언택트가 막 부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언택트는 일상화되고 컨택트는 그것을 소유할 권리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됩니다.

 이런 근미래 사회는 또 인간의 기억마저도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어 있기도 한데, 이 기억이야말로 컨택트한 경험의 소산일 때 진실성이 담보 될 수 있는 반면, 컨택트 세상을 누리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진정한 컨택트로서의 기억, 그리고 그 중심에 자리잡은 ‘사랑’에는 무능력합니다. 이제 작가는 묻습니다. 이 기억을, ‘사랑’을 돈과, 특권과, 바꿀 수 있느냐? 과연 소설 속 여성 주인공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제가 보기에 이 작품은 지난 해의 단편소설들 가운데 이 코로나 시대의 현실과 미래를 가장 전면적으로 잘 다루었다고 단언해도 좋을 듯했습니다. 앞으로 이 작가의 행보를 더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싶습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을 평가하는 연장선상에서 저는 어째서 한국 소설은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적 현상으로부터 깊고 넓은 주제를 추출 하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세계문학사에는 훌륭한 질병문학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같은 작품, 한국에서는 이광수의 『사랑』 같은 작품 말이지요. 병들어 있다는 것, 병든다는 것은 문학적으로 가장 확실하고도 심오한 상징적 의미망을 형성합니다. 우리 작가들이 현실과 시대에 더 예민하고도 그것을 소설로 ‘옮기는’데는 훨썬 덜 직접적으로 함축적이기를 바랍니다. 방향만 잘 잡으면 워낙 재능 있는 작가들 많은 한국문단인 만큼 앞으로 좋은 결실들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관심을 버리지 않고 기대해 보고 싶습니다.

김민정 이번 좌담은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동안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정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소설을 집필하고 한국소설을 열심히 사랑해주신 작가와 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2021년 한국소설의 이름은 ‘작가’와 ‘독자’ 아닐까요.

 오늘의 소설 7편과 더불어 오늘의 소설집 7편도 함께 선정하였습니다. 길고 긴 코로나 시대의 낮과 밤동안 한국소설을 아껴주시는 독자분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숨 『떠도는 땅』
김혜진 『너라는 생활』
듀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
박지음 『네바 강가에서 우리는』
우다영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황정은 『연년세세』

두 분 모두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내년에 ‘건강한’ 소설로 만나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쿨투라》 2021년 2월호(통권 8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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