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퀴어하지 않지만 퀴어한 영화에 관하여: '아이들'과 '파수꾼'을 통해 바라본 영화의 동성애적 욕망
[제15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 부문 당선작] 퀴어하지 않지만 퀴어한 영화에 관하여: '아이들'과 '파수꾼'을 통해 바라본 영화의 동성애적 욕망
  • 송석주
  • 승인 2021.03.09 12: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이들〉 포스터

퀴어(queer)영화란 무엇인가? 이성애규범성, 그러니까 성별 및 젠더 이분법에 반하는 명백한 성소수자(LGBTQ+)들이 표면적으로 등장해야만 ‘진정한’ 퀴어영화로 호명될 수 있는가? 서두를 의문문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퀴어영화가 거대한 물음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퀴어영화는 정의와 재정의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의미화의 불가능성을 담지하며 영화 장르의 자장 안에서도 맥락 없이 파편화된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퀴어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퀴어영화가 무엇인지 왜 알려고 하는가?”라는 반문이다. 계보학적 논법으로 고찰하면 퀴어영화는 다분히 관점적인 것이며 이미 다양성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퀴어영화에 대한 논의는 그것의 명징한 의미나 장르적 정의가 아니라 특정한 영화가 퀴어적으로 ‘읽힌다’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각과 “퀴어영화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태제로 나아가야 한다.

독자의 반응에 초점을 둔 효용론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영화는 퀴어영화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화의 효용은 관객의 생각이나 태도, 처지와 깊은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 영화를 이성애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퀴어적으로 독해할 필요가 있다. 감독이 무의식적으로(혹은 고의적으로) 영화 전반에 새겨 넣은 ‘퀴어다움’(queerness)을 영화 언어로 논고하는 일이 퀴어영화 비평, 나아가 영화 비평의 저변을 넓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업은 영화의 표면이 아닌 이면적 의미를 새롭게 발굴하는 작업과 상통한다. 그것은 이른바 ‘징후적 독해’로써 숏의 배치나 대사 등 영화의 형식과 내용에 암묵적으로 발현하고 있는 퀴어의 징후들을 포착하여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이는 영화학자 로제 샤르티에가 말했듯이, 비평가가 1차 저작물인 영화를 끊임없이 발명하고, 변화시키고, 왜곡하는 일과 맥이 닿아있다. 특정 영화를 적극적으로 오독(誤讀)하는 행위야 말로 징후적 독해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윤성현의 두 영화 〈아이들〉(2008)과 〈파수꾼〉(2011)이 충분히 퀴어적으로 독해될 수 있는 영화라고 보았다. 윤성현의 첫 단편 연출작인 〈아이들〉과 첫 장편 연출작인 〈파수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았다. 우선 두 영화는 모두 남자 고등학교라는 ‘남성동성사회’에서 벌어지는 친구 관계의 복잡 미묘함을 스크린에 아로새겼다. 두 영화에는 일진과 왕따가 등장하며, 두 관계는 ‘합일’(〈아이들〉)을 이루기도하고 ‘파국’(〈파수꾼〉)을 맞이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두 영화가 그 합일과 파국의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제시할 의도조차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제시하지 않았다면 ‘고의적 은폐’이고 제시할 의도조차 없었다면 ‘무의식적 침묵’이다. 그렇다면 두 영화는 무엇을 은폐하고 무엇을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태준과 진욱의 경우

우선 〈아이들〉을 살펴보자. 영화는 태준과 범석 그리고 진욱의 삼각관계를 주축으로 전개된다. 태준과 범석은 학교에서 ‘일진’으로 군림한다. 반면 진욱은 ‘왕따’로 범석의 표현을 빌리면 “얼굴만 봐도 재수가 없는” 학생이다. 영화는 태준이 실수로 진욱의 연(鳶)을 망가뜨리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태준은 연의 주인이 진욱의 것으로 밝혀지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과하고 돈까지 주려고 한다. 흔한 일진과 왕따의 관계라고 하기엔 태준의 태도가 지나치게 친절하다. 태준의 ‘이상한 행동’은 이후 그가 진욱과 함께 버스를 타고 있는 장면에서부터 더욱 도드라진다. 사실 태준과 진욱은 서로 얼굴을 트고 말을 섞진 않았지만 집 방향이 같아 자주 함께 버스를 탔던 사이다. 둘의 관계는 연으로 인해 갈등하기 전부터,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됐다. 태준이 진욱을 바라보는 동안 버스는 긴 터널을 지나고, 이에 따라 화면 역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진다. 영화의 진짜 시작은 여기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영화는 태준과 진욱의 동성애결합에 초점을 맞춘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등장인물의 이성애결합에 관한 이야기를 복수의 점프 커트를 통해 드러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점프 커트는 인물의 행위를 세부적으로 서술할 가치가 없을 때, 그 연속성을 파괴할 목적으로 사용된다. 영화는 태준이 친구들과 여자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점프 커트로 묘사하는데, 이는 점프 커트라는 편집 스타일을 통해 이성애결합이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점프 커트 직후 진욱이 태준의 시점 숏으로 포착되는 장면은 점트 커트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버스에서 내린 태준과 진욱이 함께 노래를 듣는 모습을 투 숏으로 프레이밍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성애결합은 점프 커트로, 동성애결합은 점프 커트 없이 한 호흡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또한 점프 커트는 태준과 진욱이 밖에서 함께 음악을 들으며 얘기하는 장면에서도 사용된다. 영화는 고무동력기에 관한 얘기는 점트 커트로 표현하는 대신, 태준이 진욱과의 동성애결합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장면은 점프 커트 하지 않고 자세히 보여준다. “여자를 사귄 적이 있냐?”는 태준의 물음에 진욱은 그렇다고 답한다. 하지만 태준은 “연 만드는 사람을 좋아하는 여자가 어디 있냐?”라며 진욱의 이성애결합을 조롱한다. 그러면서 “난 연도 안 만드는데 왜 여자가 없는 거야”라고 말하며 자신의 성적 결핍을 진욱에게 드러낸다.

이어 영화는 태준의 성적 결핍을 봉합하고, 그가 진욱과 함께 남성동성사회를 탈피하여 그들만의 자유로운 만남을 추구하게 하는 수단으로 연(鳶)이라는 상징적 기호를 이용한다. 연은 태준과 진욱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둘의 관계를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태준과 진욱은 ‘망가진 연’에 각자의 서명(sign)을 새겨 넣으며 처음으로 무언가를 공유한다. 태준과 진욱이 서명을 새겨 넣음으로써 공유한 ‘망가진 연’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불가능의 메시지를 표상한다. 달리 말하면 태준과 진욱은 불가능의 메시지를 공유한 사이가 된 것이다. 그 불가능의 메시지란 남성동성사회가 억압하는 동성애이며 동시에 태준과 진욱의 동성애결합을 뜻한다.

주지하다시피 연은 동성 친구들로부터 배척의 원인이 되는 이상한 물건이다. 고등학교 2학년 남자가 학교에 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이상한(queer)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범석의 대사에 따르면 연을 가지고 다니는 행위는 ‘쪽팔림’ ‘이상함’ ‘변태’라는 단어로 정의된다. 태준 역시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진욱이 연을 각별하게 생각하기에 태준 역시 연을 배척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연을 등장시키는 사람이 진욱이 아니라 태준임을 명심해야 한다(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진욱의 연을 망가뜨린 태준이 그것을 들고 진욱에게 사과하기 위해 간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진욱보다 태준이 더 적극적으로 연날리기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태준의 연날리기는 ‘연싸움’이 아닌 ‘액(厄)막이연’ 형태에 가깝다. 액(厄)막이연은 액운을 내쫓고 복을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연날리기는 기본적으로 연실이 꼬이지 않도록 장애물이 없는 드넓은 벌판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의미를 고려해볼 때, 〈아이들〉에서 연은 액(동성애결합을 혐오하는 남성동성사회)으로부터 진욱을 보호하는 태준, 태준의 복(동성애결합)을 실현하는 진욱으로 전유된다. 연은 태준이며 동시에 진욱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얼레와 실이 진욱의 옆모습과 겹쳐진다. 여기서 연은 태준(연의 몸통)이 하늘을 마음껏 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욱(얼레-실)으로 세분화되어 재전유된다. 사실 연날리기엔 학교 운동장만큼 좋은 장소가 없다. 하지만 태준과 진욱은 그곳에서 연을 날릴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둘은 장애물(남성동성사회)이 없는 탈영토화된 공간에서만 연날리기를 시도 혹은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욱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태준이 의심스럽다. 그래서 태준과 연을 만들 때 “너 나한테 왜 그래? 왜 이렇게 잘해줘?”라고 묻는다. 이에 태준은 “내가 너한테 뭘 잘 해줬다고 그래?”라며 진욱을 쳐다보지 못하고 머쓱하게 웃는다. 진욱이 “동정심이냐?”라고 묻자 태준은 연으로 화제를 돌리며 딴 얘기를 한다. 이 같은 진욱의 물음은 관객이 태준(혹은 영화)에게 던지는 물음과 일치한다. 그러니까 ‘일진인 태준은 왕따인 진욱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것일까?’라는 물음. 태준은 진욱의 물음에 끝내 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태준이 진욱에게 가지는 감정이 범석을 비롯한 다른 동성 친구들에게 가지는 감정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준은 진욱과 있을 때 범석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는 진욱을 혐오하는 범석이 불편하고, 또 진욱과 함께하는 시간을 그 누구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태준에 대한 진욱의 호의. 그 저변에 깔린 정동(情動). 그것은 태준의 섹슈얼리티가 진욱에게로 향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파수꾼〉 포스터

기태와 희준의 경우

〈파수꾼〉 역시 남자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세 친구의 삼각관계를 주축으로 전개된다. 기태와 희준, 동윤은 학교에서 일진에 속하는 학생들이며 거기서 기태는 짱으로 군림한다. 〈아이들〉이 인물들의 감정을 모호하게 표현하는 대신 비교적 명확한 인과성의 플롯을 가진다면, 〈파수꾼〉은 인물의 감정과 플롯 모두 모호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즉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적 흐름이 아닌, 원인이 제거된 무수한 결과의 나열에 의한 플롯 진행이 그것이다. 게다가 인물들은 시종일관 “그냥” “좀”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등의 의미 없는 대사들만 쏟아낸다. 하지만 뜨겁게 분노하며 처절하게 슬퍼한다. 이처럼 부재하는 원인과 실재하는 결과로서의 내러티브는 〈파수꾼〉의 내러티브를 완성하는 계산된 작법이라 할 수 있다.

〈파수꾼〉의 내러티브는 관객의 이해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교란하는 쪽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가 인물을 포착할 때 클로즈업을 자주 사용하며, 영화의 중심 화두인 ‘기태의 죽음’을 현재 시점이 아닌 플래시백으로 서술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그러니까 인물이 처한 공간적 상황을 탈색하고 배제하는 클로즈업과 현재에는 죽고 없는 기태를 플래시백이라는 주관의 소산으로 포착하는 영화의 형식은 기태의 행위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정황이 전무함을 은유한다. 애초에 기태의 행위는 관객의 동의를 구하기가 어렵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파수꾼〉은 지나칠 정도로 모호하다. 의미화하기 어려운 기표들만 떠도는 인과율 제로의 디제시스에서 관객이 명시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인물들의 대사에서 어렴풋이 감지되는 감정뿐이다. 그렇다면 〈파수꾼〉을 강하게 추동하는 표면적(혹은 이면적) 감정은 무엇인가. 사실 〈파수꾼〉을 다룬 글(기사와 칼럼, 비평 및 논문의 영역)에서 어느 누구도 기태의 섹슈얼리티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강병진은 “친구의 죽음을 통해 이들이 환기하는 것은 그 시절의 소년들에게 있었지만, 잊었거나 지워버렸던 사랑의 단면”이라고 짧게 언급하지만, 그 사랑의 단면에 관해 면밀하게 고찰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수꾼〉을 퀴어영화로 위치 짓고, 접근하는 시도는 일부 블로그와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여기서는 위 논의를 바탕으로 〈파수꾼〉을 퀴어영화로 독해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파수꾼〉의 가장 큰 사건은 기태가 자살했다는 것이고, 의아한 것은 영화가 그 자살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태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했을 때는 삶의 뿌리 자체를 뒤흔드는, 자존에 대한 심각한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태는 그 고뇌가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즉 기태의 고뇌가 감독도, 관객도 감각하지 못한 어떤 비밀스러운 층위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파수꾼〉은 누군가를 폭행하는 기태의 모습을 포착하며 시작한다. 기태의 무자비한 폭력성의 근저에는 어머니의 부재가 있다. 그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그래서 기태에게는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취하고자 하는 오이디푸스 궤적을 밟은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기태의 오이디푸스적 욕망은 의도치 않게 거세당했다. 상징계로의 진입에 실패한 기태는 혼돈과 무질서가 판치는 폭력적인 상상계의 어둠으로 던져진다. 이후 영화는 기태의 불안정한 욕망이 동성애적 욕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데 온전히 바쳐진다. 영화는 오프닝 신에서 기태를 원 숏(one shot)으로, 희준과 동윤을 투 숏(two shot)으로 프레이밍하면서 그들의 관계가 ‘1(기태 / 동성애자):2(희준, 동윤 / 이성애자)’의 구도로 나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에 기태는 희준과 동윤에게 이성 친구들(보경과 세정)과 함께 놀자고 제안한다. 그들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희준은 보경을, 동윤은 세정을 좋아한다. 하지만 기태만 어떠한 이성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태는 왜 이런 제안을 한 것일까. 그는 남성동성사회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여성을 능란하게 다뤄 동성 친구들 사이에서 어른의 위상을 점유해야 하는 ‘짱’이다. 기태가 동성 친구들 사이에서 짱으로 군림하는 이유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성 친구들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해서이다. 기태의 말마따나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비참해지더라도 친구만 자신을 알아주면 되기 때문에 기태는 ‘동성 친구’들의 애정을 얻기 위해 친구들의 데이트를 의식적으로(혹은 무의식적으로) 주선한다. 하지만 거기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

희준은 안정적으로 오이디푸스 궤적을 밟았기 때문에 어머니를 대신할 이성이 필요하다. 그것이 보경이었다. 하지만 보경은 기태를 좋아한다. 이로 인해 희준은 기태를 적대시하고, 그 맥락을 모르는 기태는 희준과의 동성애결합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타진한다. 기태는 어느 날 희준에게 “부모님 언제 오시냐”라고 묻는다. 희준이 “내일이나 오겠지”라고 퉁명스럽게 답하자 기태는 “나 오늘 그럼 너희 집에 잔다”라고 말한다. 희준이 아무 말이 없자 기태는 “너희 집에서 잔다고. 왜 싫으냐?”라고 재차 묻는다. 기태는 희준과의 동성애결합을 원하지만, 기태로 인해 자신의 이성애결합이 요원해진 희준은 그와의 접촉이 불편하다. 그래서 자고 가도 되느냐는 기태의 동성애결합을 거부하고, 기태의 근원적 결핍인 ‘어머니의 부재’를 공격한다. 이로 인해 희준은 기태에게 폭행을 당한 뒤 왕따로 전락한다. 동윤이 희준을 폭행한 이유에 관해 따지듯 묻자 기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냥 보통은 내가 다 얘기하잖아. 어? 근데 이번엔 그냥 자세하게 얘기 안 해도 그냥 넘어가. 설명 못하는 것도 있잖아.”

기태의 대사는 영화가 명시적으로 쌓아왔던 갈등의 원인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 원인이란 주지하다시피 보경으로 인한 기태와 희준의 불화이다. 기태는 무엇 때문에 이 얘기를 동윤에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동윤과 세정 그리고 기태와 동윤이 만나는 숏의 연쇄에서 징후적으로 드러난다.

세정은 동윤에게 “너 낙인찍혀본 적 있냐?”라고 묻는다. 동윤이 “왜?”라고 되묻자 세정은 “그냥”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동윤은 세정의 얼굴을 감싸며 “없네. 낙인”이라고 말한다. 낙인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욕된 판정을 이르는 말이다. 세정은 그런 낙인(동윤 이외의 남자들과의 추문)의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것을 동윤에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정은 동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기태도 동윤에게 자신의 낙인(동성애)을 말하지 못한다. 그저 묻는다. 끊임없이 묻기만 한다. 그러므로 다음의 대사를 면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기태 : 세정이(여자) 많이 좋아하냐?
동윤 : 어?
기태 : 세정이(여자) 많이 좋아하냐고.
동윤 : 뭔 소리야 갑자기.
기태 : 얘기해 봐.
동윤 : 미친놈아 물을 걸 물어.
기태 : 대답해 봐.
동윤 : 왜 이래?
기태 : 세정이(여자) 많이 좋아하냐?
동윤 : 그래 존나 좋아한다. 갑자기 왜?
기태 : 그냥. 부러워서 물어본 거야.

위 대사는 앞서 기태가 동윤에게 “설명 못 하는 것도 있잖아”라고 말한 장면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기태는 동윤에게 “세정이 많이 좋아하냐?”고 묻는다. 사실 이러한 물음은 뜬금없다. 하지만 숏의 인과로는 말이 된다. 그 직전 숏에서 세정이 ‘낙인’에 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기태의 물음에 동윤은 “뭔 소리야 갑자기” “물을 걸 물어”라고 답한다. 기태가 연거푸 세정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동윤은 “그래 존나 좋아한다”고 말하고 기태에게 “갑자기 왜?”라고 되묻는다. 이에 기태는 “그냥 부러워서 물어본 거야”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queer) 대답이다. 즉 “세정이 많이 좋아하냐?”는 기태의 질문은 세정에 대한 동윤의 애정 강도를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다. 기태의 질문을 퀴어적으로 독해하면, 그는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동윤의 발화(發話)가 부러운 것이다. 위 대사에서 ‘세정’을 ‘여자’라는 기표로 환치해서 생각하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기태는 여자를 좋아할 수 있는 동윤이 부러운 것이다.

이어지는 대사는 기태의 동성애적 욕망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동윤은 기태에게 왜 보경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 이유에 대해 동윤이 “배키(희준의 별명) 때문에?”라고 짐작하듯이 묻자 기태가 “뭔 헛소리야!”라며 화를 낸다. 여기서 기태가 동윤의 물음에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라도 기태가 ‘배키 때문에(희준을 사랑하기 때문에)’ 보경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것은 아닐까. 기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 기태의 오이디푸스의 칼날이 아버지가 아닌 희준에게로 향한 이유. 그 이유는 아마도 기태가 동성애자이고, 희준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었기 때문은 아닐까.

 

퀴어하지 않은 영화를 퀴어적으로 읽으려는 욕망

나는 명시적으로 동성애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동성애적으로 읽힐 수 있는 〈아이들〉과 〈파수꾼〉의 친구 관계를 숏의 배치, 대사 등을 준거 삼아 퀴어적으로 독해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성 정체성 확립이라는 불안한 진자 운동 속에 속박된 청소년들이다. 그들에게(혹은 우리에게) 섹슈얼리티는 삶의 중요한 화두이지만 누구에게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특히나 그 섹슈얼리티가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통용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면 더욱 침묵할 수밖에 없는, 침묵의 침묵인 것이다. 그 침묵을 섹슈얼리티의 민주화를 외치는 작금의 상황에 대입할 때, 〈아이들〉과 〈파수꾼〉의 이미지가 충분히 퀴어적일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입장이다.

퀴어영화는 장르의 자장에서 탈주하는, 결코 범주화할 수 없는 개념이다. 범박하게 말하면, 퀴어영화는 관람자 각자가 특정 영화를 퀴어영화라고 호명하는 순간, 그러한 의미로 정립된다. 왜냐하면 서두에서 밝혔듯이, 퀴어영화란 관람자의 태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정 영화를 퀴어적으로 독해하는 행위는 ‘논리적 서술’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구호’에 가깝다. 그래서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고, 지극히 자의적이며, 매우 관념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독해가 이성애중심주의를 비롯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일으키고 나아가 삶과 섹슈얼리티를 더욱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면, 분명 생산적이고도 유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비록 누군가에겐 이상한(queer) 일로 비춰질지라도 말이다.

 

 


강병진, 10대소녀못지않게예민한10대 소년의 관계 〈파수꾼〉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65051
https://blog.naver.com/hlhjlee/131452051
https://idlemoon.tistory.com/entry/%ED%8C%8C%EC%88%98%EA%BE%BC
https://sienaakim.tistory.com/1


  영화평론 부문 당선자 송석주

송석주 영남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문화교양지 〈독서신문〉에서 영화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TBN 한국교통방송의 영화 코너 ‘어떤 영화, 진짜 이야기’에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다.

 


 

* 《쿨투라》 2021년 2월호(통권 80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