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월평] 대신 임신해드립니다: 조앤 라모스 『베이비 팜』
[문학월평] 대신 임신해드립니다: 조앤 라모스 『베이비 팜』
  • 허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1.03.0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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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기사에서는 선수가 구단으로부터 받는 돈을 연봉 대신 종종 ‘몸값’으로 표현한다. 듣다 보다 쓰다 익숙해진 사람도 있겠지. 그러나 몸값이라는 단어는 곱씹을수록 섬뜩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몸값을 세 가지 용례(팔려 온 몸의 값, 사람의 몸을 담보로 받는 돈, 사람의 가치를 돈에 빗대어 낮잡아 이르는 말)로 풀이한다. 어느 것 하나 좋은 뜻이 없다. 그런데도 이런 말은 계속 통용된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사람을 어떤 식으로 취급하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언어적 지표다. 다른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효율적인 이윤 추구를 장려하는 국가라면 더 그러한데 예컨대 미국이 그렇다. 마이클 센델은 거의 모든 것이 거래 대상이 되고 있다면서 그중 하나로 인도인 여성의 대리모 서비스를 거론한다. 6250달러-약 700만 원이면 아이를 외주화해 구매할 수 있다.(안기순 옮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와이즈베리, 2012, 20쪽)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구나.’

  예전에 이 같은 사실을 접했을 때는 이 정도 느낌만 들었다. 그것은 건조한 정보의 형태이지 구체적 실감으로 와 닿지 않았다. 장편 소설 『베이비 팜』을 읽은 후에야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대리모 비즈니스의 일면이 구체적 실감으로 와닿았다. (문학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어떤 사안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는 생생한 재현이다.) 내용을 언급하기 전에 작가 조앤 라모스부터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그녀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 온 필리핀계 미국인이다. 미국 정규 교육 과정을 거쳐 아이비리그에 속한 명문대학 프린스턴에 입학한 라모스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프린스턴은 내가 정말로 커다란 격차를-부, 계급, 경험과 기회라는 측면에서-처음으로 맞닥뜨린 곳이었다.”(602쪽)

  이민자로서 성공 가도에 진입할 기회를 얻은 동시에 그녀는 미국 상류층의 사고와 생활에 대한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체감했다.

  졸업 후 금융계와 언론계에 진출해 탄탄한 경력을 쌓았고, 결혼해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브루클린이나 퀸스가 아닌 맨해튼에 거주하게 된 라모스는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다. 스스로도 인식한다.

  “맨해튼에서 내가 아는 필리핀 사람들은 내 친구들을 위해 일하는 신생아 보모나 유모, 가정부, 청소부들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602쪽)

  센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지적했듯, 라모스는 자신의 성과가 ‘행운과 우연 덕분’임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우선은 자기와 같은 삶을 누리지 못하는 대다수 필리핀인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들의 삶과 장래성, 그리고 나의 삶과 장래성간의 격차는 현격하다. 그 격차를 메운다는 게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지 나는 자주 생각해보곤 한다.”(603쪽)

  그런 경청과 자문의 결과물을 라모스는 『베이비 팜』으로 내놓았다.   

   원제는 더 팜(The farm), 즉 농장이라는 의미다. 한국어판에서는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제목에 베이비를 더했다. 실제로 여기에서 경작해 판매하는 물건은 아기다. 오크나무숲에 지어진 농장의 이름은 골든 오크스. 석양에 물든 황금빛 오크하면 목가적인 분위기를 떠올릴 테지만, “골든 오크스는 여성을 대리모로 고용하는 곳이었다. (……) 골든 오크스의 의뢰인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사람들이며 호스트들은 그들의 아기를 임신한 대가로 많은 돈을 받는다”(99쪽). 이는 대리모를 모집하는 스카우터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호스트는 그곳에서 편히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다. 그렇지만 골든 오크스의 진실은 호스트인 리사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여기는 공장이고 당신은 상품이에요. (……) [의뢰인들은] 자기 아기와 관련된 모든 것에 집착하니까요. 새로운 종류의 나르시시즘이죠. 농장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거예요. 그들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키고, 더 부채질하는 거.”(139쪽)

  문제는 진실을 인지한다고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사는 그걸 다 꿰뚫고 있으면서 골든 오크스의 단골 호스트가 됐다. 그녀는 세 번째 임신 중이다. 절실한 건 돈이기 때문이다. 필리핀 이민자 제인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젖먹이 딸을 사촌 아테에게 맡겨둔 채 이곳에 왔다. 제인의 배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뢰인의 아이가 자라는 중이다. 이상의 서술을 접한 당신은 슬픈, 혹은 끔찍한 기분이 들겠지. 『베이비 팜』은 착취당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만을 부추기는 작품은 아니다. 착취하는 이들을 향한 비판 외에도, 호스트로 선정된 사람들 사이에 인종과 학력으로 구별되는 몸값의 위계를 적시한다. 약자라고 해서 다같은 약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예로 아테를 들 수 있다. 그녀는 미국에서는 ‘부유하고 중요한 사람들’의 부림을 받지만, 필리핀에서는 건물 세 채를 소유한 재력가다. 아테는 필리핀에 있는 자식을 돌봐주는 도우미의 고용주이기도 하다. 계급은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다. 현 시스템에서 부자나 빈자나 상관없이 모두의 욕망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원하는 건 자기 아기가 우위를 차지하는 거라고.”(138쪽)

  리사의 말마따나 제인 역시 딸이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 기득권층에 편입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한 종잣돈을 마련하려고 그녀는 대리모가 됐다. 골든 오크스 경영자 메이는 말한다.

  “우리는 호스트들더러 호스트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그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겠다고 자유롭게 결정하는 거죠. 장담하는데, 기꺼이 말이에요.”(95쪽)

  그녀의 교묘한 화술을 감안하고 들어야 하겠으나, 골든 오크스의 호스트는 (불공정한) 계약서에 자발적으로 사인을 하고 입소한 것이 맞다. 잘못한 쪽은 누구일까. 돈 벌려고 대리모의 삶을 선택한 호스트? 돈 벌려고 대리모 사업을 벌인 골든 오크스? 돈을 지불하고 임신과 관련된 리스크를 상쇄하려는 의뢰인? 책을 덮고 나면 당신도 아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듯하다. (호스트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는 입장과 별개로) 셋 다 공범. 한데 왜 나도 공범 의식이 드는 걸까, 하는 찜찜함을 떨치지 못한 채.

허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 《쿨투라》 2021년 2월호(통권 8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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