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쿨투라 신인상 웹툰평론 부문 당선작] 찌질의 예술
[제15회 쿨투라 신인상 웹툰평론 부문 당선작] 찌질의 예술
  • 한유희
  • 승인 2021.03.0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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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영신, 〈아티스트〉

  별은 졌다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1 1962년, 아직은 문화를 대신해서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발언하며 논쟁해왔던 시기2 루카치는 현실에서 더이상 자연발생적인 삶의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삶의 충족인 동시에 예술의 본질을 고민하던 루카치의 언술은 2021년의 우리에게 또 다른 별이다. 2021년의 예술, 삶은 무엇일까. 별, 총체성과 같은 말은 그저 ‘문자’로만 존재할 뿐, 이를 제대로 감각할 수 없다.

  이제 예술이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해졌고, 고상한 취향으로 치부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시대가 흘러도 대중은 여전히 예술가-예술의 관계를 자본주의의 영역으로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서 돈벌이와 밥벌이를 해야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본인의 작품이 잘 팔리고, 평가를 높게 받아야만 업적을 인정받는다. 그렇지만 대중들은 예술가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초연한 태도를 지녀야만 한다고 한다. 예술가는 ‘예술’을 하기 때문에 예술의 본질과 가치만을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가난해도 어쩔 수 없다고도 말한다. 본인이 ‘원하는’ 예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어불성설이다. 예술가는 직업이다. 따라서 자신의 작품을 사고팔 때에서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의 작품을 직접적인 경제적인 가치로 구체화할 때 예술가는 일견 속물로 치환된다.

  속물이 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바우만을 소환할 수 있다. 바우만은 ‘문화 소비자’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쇄신된 민중3과 예술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예술이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과거의 무거운 짐에서 놓여난 결과 중 하나는, 흔히 반어적 또는 냉소적으로, 예술의 수혜자들만큼이나 창조자들도 예술과 거리가 벌어졌다4는 것이다. 지금의 예술이 처한 현실이다. 예술가도 수용자인 ‘문화 소비자’도 예술과 멀어졌다면 도대체 누가 진정한 의미의 예술을 논할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늘의 별은 없다. 깜깜한 하늘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도 잊었다. 이미 별은 실체도 없고, 허상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지 못한 별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다. 따라서 예술은커녕 삶의 총체성조차 고민할 수 없다. 상상이라도 별을 바라볼 수 있었던 시선은 이제 아래로, 밑으로 향한다. 파편화된 일상을 살아내는 것조차 버겁기 때문이다.

  웰컴 투 마영신’s 콤플렉스(complex)

  마영신은 핍진성을 담보한 작품들을 그려낸다. 마영신의 인물 또한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들은 욕망을 솔직하게 발화한다. 현실에서 표출할 수 있는 감정의 마지노선을 마영신은 과감하게 횡단한다. 그리하여 마영신이 그려내는 세상과 인물들은 작품을 접하는 모든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은 기저에 숨겨둔 ‘무엇’을 소환한다. 문제점으로 인식하고 싶지 않았던 애써 숨기고 감춰둔 나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마영신의 전작 〈엄마들〉은 노장년층 여성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엄마들〉에서 등장하는 ‘엄마’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발화한다. 문제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사회적으로 쉽사리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욕망은 어느 정도 거세된 상태인 욕구라는 형태로 사회에 드러난다. 하지만 마영신은 다르다.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불편한 웃음을 유발하는데 있다. 목도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궁금한 이야기. 그것이 마영신이 추구하는 작품의 본질이다.

  〈아티스트〉도 마찬가지다. 〈아티스트〉에서는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자들의 콤플렉스가 고스란히 드러낸다. 욕망을 적극적으로 발화하는 것은 사회에서 위험하다. 욕망을 숨기지 않는 것 자체가 콤플렉스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의 인물들은 욕망을 꾸미지 않기에 콤플렉스가 더욱 강조된다. 이는 내용뿐만 아니라 작화로도 표현된다. 대충 그린 것 같은 인물들과 배경은 각기 의미를 지닌다. 특히 득녕의 큰 머리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작화를 통해 생각이 많은 복잡한 인물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사실, 〈아티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초면이 아니다. 〈빅맨〉은 화가 곽경수가, 〈연결과 흐름〉에서는 소설가 신득녕이 등장한다. 여기에 밴드를 하는 천종섭까지 합류하면 〈아티스트〉를 이끄는 찌질한 동인, ‘오락실’의 멤버가 완성된다. 콤플렉스 덩어리인 그들이 복합체로 뭉쳐있을 때 속물화된 예술은 적나라하게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들은 각기 다른 예술 분야에 종사하지만 모두들 적당히 자신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나태와 권태에 매몰되어 그저 시간을 허비할 뿐이다. 특히 각 인물들이 표상하고 있는 결점은 모여서 더 큰 결점으로 전락한다. 예술은 ‘오락’으로 치환되며 새로울 것도 없는 반복되고, 반복되는 일상을 지속할 뿐이다.

  〈아티스트〉를 볼 때 불편한 점은 구체적인 그들의 ‘잉여짓’ 때문이다. 현실적인 모습들과 직관적인 대사는 그들 기저의 콤플렉스를 거침없이 내보인다. 밴드를 하는 천종섭은 저작권 수익 구조를 이야기하며 음악을 공짜로 보내 달라고 하고, 작가로 돈을 벌지 못해 웹툰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토렌트 사이트에서 영화를 불법적으로 다운받는다. 곽경수의 말은 속물적 예술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지금 (미술)작업을 하고 있냐고 묻는 득녕의 말에 “작업은 무슨… 노가다 하냐? 아트지 임마.” 그러나 그들에게 ‘아트’는 먼일이다. 그들의 모임에 예술은 없다. 그저 ‘술’뿐이다. 술자리에서 그들은 비참한 욕망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억눌린 화를 대책 없이 꺼내고, 트집을 잡으며 남을 비난할 뿐이다 .

  그들이 ‘오락실’이라는 동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동류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나의 콤플렉스가 ‘너’의 콤플렉스보다 더 낫다고 위안할 수 있어서다. 따라서 〈아티스트〉 초반 같은 동인에 있던 영화감독을 깎아내리는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성공한 ‘쟤’도 나보다 나을 것 없다는 시기심 때문이다. 콤플렉스의 콤플렉스화로 오락실 멤버들의 관계는 오히려 안전하다. 동시에 불완전하기도 하다. ‘나’보다 결점이 가득한 ‘너희’가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맞지 않는 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락실’은 유지된다. 이런 이유로 영원하자던 맹세는 서로의 콤플렉스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약속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관계의 안정감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성공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모든 행동을 예술로 승화하기 때문이다.

  〈아티스트〉에서 득녕은 문제적 인물이다. 적당한 현실감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콤플렉스의 근원을 에피소드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콤플렉스였던 득녕은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종섭을 돕는다. 하나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분명 종섭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자신의 콤플렉스를 인지하고 고치고자 하는 의지로 돕는다. 종섭의 책의 구성과 기획, 제목 심지어 계약까지 득녕이 대부분 도맡는다. 종섭의 책 『가튼 놈들』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팔방미인 천재 뮤지션. 음악을 당장이라도 그만둬야 했던 종섭의 성공, 그리고 점차 잊혀지는 득녕의 수고, 복잡한 감정을 열등감이라고 표현하는 경수. 셋은 이제 더이상 함께할 수 없다. 관계는 쉽사리 무너진다. ‘너’의 콤플렉스는 ‘나’의 또 다른 콤플렉스를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이후 그들의 콤플렉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특히 득녕이 잡지 〈오락실〉 성공 후 인터뷰에서 종섭을 ‘천재’라고 말하며 비꼬는 장면은 오히려 자신의 콤플렉스, 성공을 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완벽하게 표출한다. 응원을 가장한 조롱. 득녕은 결국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다. 다만 ‘그런 척’ 해왔을 뿐이다.

 

  진화하고 싶은 잉여

  〈아티스트〉에서 중요한 소재는 ‘인정’이다.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5에서 인정을 세 가지 형태로 이해한다. 상호인정관계가 사랑이라는 형태 속에 있고, 동등한 권리의 인정을 통해 형성되고, 사회적 연대라는 것이다. 불인정은 결국 배제를 뜻하고 이는 무시나 모욕으로 이해되기에 분노라는 심리적 반작용6을 일으킨다. 〈아티스트〉에서의 인물은 사실 분노라기보다는 ‘화’에 가까운 감정을 내비친다. 분노가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방향성과 에너지를 지니고 있는데7 반해 ‘화’는 상황에 대한 노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아티스트〉의 인물들은 ‘화’에 지배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인물과 환경이 다르지만 이들이 터지는 지점은 단 하나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본인보다 열등한 사람에게 무시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자격지심에서 빚어지는 ‘화’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화’가 상황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당하게 분노해야 할 지점에서는 그들의 ‘화’는 조용히 넘어간다. 문하생 시절 부당하게 맞았을 때, 교수가 자신에 입맛에 맞게 자신을 부릴 때. 그들은 침묵한다. 남은 ‘화’는 자신들보다 못한 자들에게 향한다. 그야말로 감정의 ‘연결과 흐름’이다. 주인공 경수, 득녕, 종섭의 사건에서 시작하여 〈아티스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확장된다. 질투와 질시의 감정에 사로잡힌 인정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다. 분명 예술가 동인 ‘오락실’ 멤버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예술관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인정받고자 하는 기형적인 욕망으로 인해 예술의 상은 굴곡된다. 예술을 한다는 행위자체를 남들이 고귀하게 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표출하는 것이다.

  백욱인8은 속물과 잉여를 아주 적확하게 정의한다. 속물은 체제 내에 포섭되어 축적하고 소비하는 주체로 자기 주체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없다. 시기심이 많고 야심도 크다. 잉여는 속물 대열에 가담하여 속물 지위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한 자들 가운데 속물되기를 유예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예술과 속물의 관계. 〈아티스트〉를 볼 때 홍상수의 영화가 떠오르는 것은 동류의 감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홍중은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을 자만심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작가와 예술가들, 세속적이고 편협한 대학 교수들, 순수한척하지만 사실은 타락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청년들9이라고 정의한다. 〈아티스트〉 속 인물들은 사실 속물조차 될 수 없다. 이상은 저만큼 위에 있는데 그들은 속물도 되지 ‘못’하는 잉여일 뿐이다.

  예술-잉여의 거리는 예술-속물과의 거리보다 더 멀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그들을 오히려 더 ‘인정’ 받아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몬다. 경수, 득녕, 종섭은 오락실 동인이 흩어지고 각자의 방식대로 어느 정도 인정받는다. 그러나 인정 후에 급격히 변하는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인정받은 후, 예술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유지하지 않는다. 온갖 적폐의 행동을 지속할 뿐이다. 경수는 여전히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고, 종섭은 성공에 취해 여러모로 몸을 사리지만 바람을 피운다. 득녕은 잡지를 유지하기 위해 상황을 독재하며 통제하면서 자기합리화의 방식을 취한다. 성공으로 그들은 잉여에서 속물로 진화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던 성공은 너무나도 짧았다.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달콤한 인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이었던 ‘예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예술적인 일에 몰두하던 득녕조차 예술보다 잡지를 운영하는데 힘을 쏟는다. 속물로 진화한 그들은 여전히 ‘잉여짓’에 몰두할 뿐이다. 그들에게 예술은 허울이다. 따라서 그들의 추락은 당연하다.

  바닥으로 떨어진 그들의 영향력은 다시 미미해진다. 성희롱, 성추행이 ‘미투’거리도 되지 ‘못하는’ 잉여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 차이의 우월감, 힘들 때 더 힘든 사람을 보면서 일상을 버텨낸다는 곽경수의 대사는 인정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스스로 잉여임을 알기 때문에 언제든 다른 잉여보다 나은 속물로 진화할 순간을 꿈꾸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예술가’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타인들에게 인정을 받아 잉여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수치의 유머

  재미있지만 불편하다. 〈아티스트〉는 시쳇말로 공감성 수치를 불러일으킨다. 직접적으로 사건에 개입되지 않았지만, 보는 것, 즉 공감을 통해서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서양에서 유머의 어원이 조롱을 의미하고 가학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10한다면 마영신이 그려내는 웃음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분명히 그들의 에피소드는 웃기다. 찌질한 그들을 보면서 통쾌하기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티스트〉의 인물들은 ‘적폐’로 불리는 일들을 끊임없이 행하는, 욕구와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다. 웃음 포인트는 오히려 현실적인 욕망을 드러낼 때 발생한다. 술집에서 직원에게 구찌 옷을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쓸 때, 어떻게든 상황을 포장하려고 하지만 녹록지 않을 때. 특히 곽경수의 샤워신은 불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있을 법한 모습이지만 감추고 싶은 상황을 보여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동시에 수치심을 대리로 경험한다. 우스개의 대상이 된 사람이 모멸감을 느끼거나, 그것을 바라보는 제삼자가 민망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유머의 위험요소를 피하는 것11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티스트〉는 제삼자인 독자가 오히려 모멸감을 대리로 경험하게 된다.

  『리바이어던』에서 나오듯 다른 사람에게서 꼴 사나운 일을 발견하고 자신과 비교하여 갑자기 스스로를 칭찬할 때 일어나는 웃음, 곧 갑작스러운 득의의 감정12이라고 한다. 〈아티스트〉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힘들 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봐야한다는 가치와 일맥상통한다. 조롱없는 순도 100퍼센트의 웃음이 가능한가. 마영신은 질문한다. 이미 코미디라는 말 자체는 언제든 블랙이 묵음으로 내포되어 있다. 상황을 보면서 웃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조롱의 한 부분 아닌지 고민하게 만든다. 마영신은 본인 스스로가 말뚝이가 되어 스스로 몸담고 있는 현실, 좁게는 예술계를 희화화한다. 〈아티스트〉를 보면서 불편한 감각을 견지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마이너스의 에너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청년문화가 사회적 좌절을 손쉬운 적대를 발명하고 그것을 조롱의 유희 문화로 승화하여 혐오를 공고히 하는 패턴에 빠지는 것을 막기13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마영신의 신랄한 유머 감각은 그러므로 유효하다.

  돌고 돌아서

  입체적 인물은 영어로 ‘Round Character’로 표기한다. 아티스트의 인물들은 입체적이고 연속성을 지닌다. 전작에서 나타난 인물들은 생명력을 지니고 지속적으로 작품에 등장하면서 입체적 성격을 부각한다. 〈아티스트〉를 마무리하는 〈곽경수의 길〉은 그래서 외전이 아닌 연속이다. 오히려 에필로그를 통해 곽경수의 과거를 조우해야만 현실을 더욱 온전하게 수용할 수 있다. 곽경수는 어쩌면 작가 본인일 수도 혹은 이 시대 예술가의 복합적 양상을 대변한다. 그러나 아티스트의 외전 〈곽경수의 길〉 말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결국 어쩌면 예술은 예술로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의 영역을 드러낸다.

  〈아티스트〉 복합체(complex)는 깨지지만 콤플렉스는 여전하다. 누군가는 과거의 영광에 젖어 여전히 천박하게. 누군가는 뚝심있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누군가는 초심으로 향한다. 〈아티스트〉는 외전 〈곽경수의 길〉로 마무리된다. 영원할 것 같던 득녕의 성공은 〈오락실〉폐간으로 끝난다. 종섭은 득녕의 실패를 조롱하는데, 비난과 힐난에 언제나 적극적이던 경수가 다른 입장을 취한다. 곽경수는 본인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게 된다. 배 나온 아저씨, 이혼남, 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빠. 곽경수는 어머니의 집에서 자신의 어릴 적 그림을 보며 다시 예술의 처음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곽경수의 입체적 모습과 전시를 통해서 웹툰의 방식을 입체적으로 조망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0년 오프라인에서 진행된 〈곽경수 개인전〉은 결국 곽경수 자체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다. 사회가 예술에 빠져있던 곽경수를 망가지게 했다고 적시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그림을 잘 그리던 아이는 허울이 좋아보이는 그림을 그리다 예술의 엘리트주의와 허망함에 빠지고, 인정받고자하는 욕망 속에 빠져 질척인다. ‘예술’하는 곽경수는 결국 돌고 돌아 예술을 지속한다. 결국 그는 잉여의 상태를 빠져나와 새로운 예술인 그림을 내건다.

  〈아티스트〉의 외전 〈곽경수의 길〉은 잉여의 유지가 아닌 총체성의 재고를 뜻한다. 분명 또 곽경수는 넘어질 것이고, 속물이자 잉여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경수가 득녕의 소설에 “존나 멋있다”고 우는 대목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이 팍팍한 삶에서 예술이, 아니 이 그림이, 더 정확하게는 이 웹툰이 변화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곽경수 아닌 마영신의 소망일 것이다.
  외전 속 소설가 박민규의 말은 마영신의 의도를 다시근 되새긴다. “다만 경수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용서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날 경수는 말했다. 형, 내가 살아온 그림자 속에 그림이 있더라구요. 이제 그게 보이더라구요.” 또다시 실패를 겪더라도 감각적으로 그의 별을 찾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박민규의 말을 빌린다. “부디 잘 되었으면 좋겠다.”

 


01 게오르크 루카치, 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98, p.25.
02 지그문트 바우만, 조은평 강지은 역,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2, p.158.
03 지그문트 바우만, 위의 책, p.158.
04 지그문트 바우만, 윤태준 역, 『유행의 시대』, 오월의봄, 2013, p.26.
05 악셀 호네트, 문성훈 이현재 역, 『인정투쟁』, 사월의책, 2011, p.16.
06 위의 책, p.17.
07 스테판 에셀, 임희근 역, 『분노하라』, 돌베개, 2011, p.15 참조.
08 백욱인 외, 『속물과 잉여』, 지식공작소, 2013, p.8.
09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53.
10 김찬호, 『유머니즘』, 문학과지성사, 2018, p.89.
11 김찬호, 앞의 책, p.93.
12 토마스 홉스, 최진원 역, 『리바이어던』, 동서문화사, 2013, p.66.
13 김낙호, 「웹툰의 사회학과 청년문화」, 『문화연구의 렌즈로 대중문화를 읽다』, 컬처룩, 2018. p.54.

한유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석사졸업.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시간강사. 24회 SICAF 웹툰 평론 공모전 우수상

 

 

* 《쿨투라》 2021년 2월호(통권 8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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