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쳐 비평] 부러우면 지는 걸까?: 〈오소마츠 6쌍둥이〉(2015)
[서브컬쳐 비평] 부러우면 지는 걸까?: 〈오소마츠 6쌍둥이〉(2015)
  • 양진호(영화평론가, 본지 에디터)
  • 승인 2021.03.09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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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BOX

  1. 자립 코미디

  〈오소마츠 6쌍둥이〉(후지타 요이치, 2015)의 주인공인 여섯 쌍둥이는 백수로서 ‘평범하게’ 살아간다. 원작인 아카츠카 후지오의 〈오소마츠 군〉(1966)에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이들은 놀기 좋아하고 생각하는걸 싫어하는 아이들의 멘탈 그대로 20대가 되었다.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이 나이를 먹은 뒤의 일을 그린다는 점에서 최규석의 〈공룡 둘리〉1를 떠올릴 수도 있겠는데,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다 손가락을 잘리고 초능력을 쓰지 못하는 둘리의 삶을 그리는 최규석의 작품과 오소마츠 가(家)의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쌍둥이들의 일상에서는 씁쓸한 맛이 아니라 캔디 소다 같은 청량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얼떨떨한 감각은 일종의 ‘진공상태’ 같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시즌1의 1화 중 첫 번째 에피소드 ‘취직하자’에서 여섯 쌍둥이 중 한두 명은 분명히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헬로워크(공공직업안내소)에 다니고, 스타벅스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사회로 가는 문턱에서 수도 없이 넘어지며 ‘방구석’으로 돌아온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다수 한국인이 의도치 않게 ‘방구석 생활’하게 되면서 OTT 플랫폼은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그중 선두주자인 넷플릭스가 공교롭게도 작년 12월에 ‘방구석 코미디’인 〈오소마츠 6쌍둥이〉를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가깝지만 먼 ‘사회’를 방에서 내다본다는 점에서, 쌍둥이들과 우리는 지금 우연히 비슷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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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건 내가 아니라……

  시즌1 2화인 ‘뒷이야기 모음’ 중 ‘OSO(직쏘 패러디)’ 에피소드는 여섯 쌍둥이가 서로의 분신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붉은 글씨의 제목 ‘OSO’가 나타난 다음 어두운 통로를 지나 창고로 들어가는 익숙한 시점 쇼트가 이어지고, 쌍둥이 중 한 명이 입을 틀어막히고 의자에 묶인 채 등장한다. 그의 앞에 전기톱을 들고 나타난 직쏘가 “10년만이군, 오소마츠”라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의자에 앉은 그는 “에~ 이치마츠(넷째)인데요”라고 힘 빠진 목소리로 답한다. 멍해진 직쏘와 그를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보는 이치마츠에게 잠시 멈춰 있던 화면은 ‘OSO2’라는 제목으로 채워진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OSO2’에서는 직쏘의 같은 물음에 대해 의자에 앉은 이가 “카라마츠(둘째)예요”라고 답하고, ‘OSO3’에서는 자기가 누군지 밝히지도 않는 쌍둥이가 고개만 젓는다. 이렇게 계속 엉뚱한 상대만 데려오던 직쏘는 결국 허공을 향해 전기톱을 휘두르며 “더럽게 복잡하네”라고 외친다.

  쌍둥이들은 조금씩 다른 성격과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을 위협하는 ‘외부’가 쉽게 구별해낼 수 없을 만큼 닮았다. 말하자면, 그들의 닮음은 일종의 ‘보호색’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데이터베이스(거대서사가 무너진 이후 일본 오타쿠 문화의 구심점이 된 ‘작은 이야기’의 집합소이자 원천)2’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개념과 비교해보지 않더라도 그들의 닮음이 쌍둥이들과 그들의 ‘바깥’에게 어떻게 기능하는지는 유추해볼 수 있다. 쌍둥이들은 먹을 것이나 푼돈을 놓고 싸우지만, 서로의 ‘근원’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힘, 혹은 사회로의 진입이 어려워지자 그들 마음속에 생긴 알 수 없는 힘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힘이 사회와 쌍둥이들 사이에 보호막(혹은 장벽)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호막으로 지켜낸 것은 캔디 소다 맛 나는 ‘명랑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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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오지 않는 토토코 짱

  쌍둥이들에게 찾아오는 건 무서운 포식자뿐만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다가와도 쌍둥이들은 겁을 먹는다. 그들의 행복은 ‘방구석의 안전함’에 대한 쌍둥이들의 믿음에 균열을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3화 중 두 번째 에피소드 ‘동정 히어로’에서 3남 쵸로마츠는 아니메 페스티벌에서 구입했을 것 같은 물건들이 담긴 종이백을 들고 둔치를 걸으며 행복을 느끼는데, 건너편에 소풍 나온 ‘반짝반짝’하는 젊은이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부러움을 느끼며 자신의 소박한 행복을 내동댕이친다. 그런데 어디선가 히어로 복장을 한 5명의 남자들이 주변에서 날아온다. 자신을 ‘신품 동정 히어로’라고 소개한 그들은 다름 아닌 쵸로마츠의 쌍둥이 형제들이다. 형제들은 말 그대로 ‘신품’이다. 사회에 상품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고, 상품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때 유니폼은 그들에게 있어 앞서 얘기했던 ‘보호막’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수비하고 있는 것은 동정(童貞), 즉 ‘성(性)’인 것 같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상품이 되려면 그들 고유의 독특함이나 생각, 이를테면 ‘재밌을 것 같아서 바보 흉내를 내는 것’과 같은 망상들을 잘라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의 쵸로마츠는 선뜻 그것을 잘라내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말끔해진’ 상품들의 세계를 부러워한다. 상품이 되어야만 교환될 수 있고, 예쁜 대학생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정 히어로는 고민하는 형제의 곁에 나타나 대학생들을 응징하려고 한다. 하지만 형제들은 ‘적’을 물리치는 것에 실패한다. 그리고 결국 형제들 중 가장 냉소적이었던 이치마츠의 몸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오더니 ‘부러움을 인정한 신’으로 변한다. 그는 “희망의 눈으로 보거라. 그리고 너희의 다리 사이를 봐라! 동정에게 지킬 것은 없다”라고 일갈하고, 그에게 설득된 쌍둥이들이 여성들에게 뛰어가면서 이 에피소드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반대편의 여성들은 그저 곤란해할 뿐이다.

  시즌1 4화 중 두 번째 에피소드 ‘떴다, 토토코’에서는 이 시리즈의 히로인인 ‘토토코’가 등장한다. 첫째인 오소마츠가 토토코를 기다리는데, 그녀는 오지 않고 쥬시마츠부터 시작해 다른 형제들이 하나둘 방으로 들어온다. 쵸로마츠를 제외한 형제들이 다 도착한 뒤에도 어떻게 된 일인지 토토코는 오지 않고, 동네 남자들만 계속 들어온다. 그러다 결국 ‘매니저’인 쵸로마츠가 토토코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사람들 앞에서 ‘아이돌 데뷔’를 발표한다. 부모님의 건어물 가게를 홍보하기 위해 ‘마스코트’로서 아이돌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쌍둥이들이 좋아했던 토토코는 결국 그들 중 하나의 연인이 되지 않고 ‘만인의 연인’이 되었다. 그런데도 쌍둥이들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쌍둥이들은 토토코에게 ‘유니폼’을 입혀 주었다. 유니폼을 입지 않은 토토코는 그들에게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 형제가 있으니까

  비교적 진지한 톤으로 진행되는 시즌1 5화의 두 번째 에피소드 ‘에스퍼 냥코’에서는 4남인 이치마츠의 속마음이 드러난다. 쌍둥이들의 방에 사람의 마음을 읽는 고양이가 들어오게 되었고, 대부분은 그냥 신기해했지만 고양이가 이치마츠의 속마음을 읽어내자 그는 고양이를 피한다. 그러다 결국 “친구 따위 필요 없어”라는 그의 말을 들은 고양이가 “친구 따위 필요 없어. 형제가 있으니까”라고 번역(속마음으로 바꿔 해석)해버리자, 그는 고양이를 쫓아낸다. 쌍둥이들이 ‘한 사람’이나 다름없는 이 이야기 속에서, 이치마츠에게 고양이는 “너 왕따야”라고 얘기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쫓겨난 고양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받고, 외로운 이치마츠는 그때 다시 고양이를 찾으러 가는데, 해가 질 즈음까지 찾다가 지쳐 벤치에 앉는다. 그때 오소마츠가 찾아와 “네가 싫다면 우린 고양이를 안 찾을 거야. 정말 그래도 돼?”라고 묻는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소마츠는 동생을 두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그때 쥬시마츠가 형들에게 고양이를 데리고 온다. 이치마츠는 고양이에게 “미안해”라고 고백하고, 고양이는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 읽는다.

  오래전에 가족은 아이에게 사회를 가르침과 동시에 아이가 가진 고유의 감정과 자존감을 다독여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부모가 아이에게 ‘경쟁’을 가르칠 뿐이다. 가족이 사회보다 먼저 아이를 깎아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백수가 되어 ‘평범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증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쌍둥이들은 어릴 적 갖고 있었던 감정들을 ‘어른스럽게’ 다듬지 않았다. 하지만 간혹 말끔한 어른의 세계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에게 지지 않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열등감을 ‘고양이’로 바꿔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쌍둥이들의 말을 알아들어도, 쌍둥이들이 고양이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하면 된다. 왜냐하면 열등감은 쌍둥이들이 쉽게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지만, 그걸 무시하면 형제들과 5살 때처럼 방구석에서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상대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상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방 안에서 쳐내지 못한 ‘쌍둥이들’이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상태로 계속 붙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사회적 ‘역할’ 뿐이며, 쌍둥이들만이 그들의 진짜 욕망이나 고민에 대해 알고 있다. 최근 우리도 재택근무를 하며 ‘오소마츠 6쌍둥이’가 보는 것과 비슷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거리를 두고 보면 평소 회사에서 가끔 마주쳤던 사장님, 이사님의 ‘쌍둥이’들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 같은 걸 부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 부럽다면, 그 열등감에게 “야옹!”하고 말을 걸어 보자.


1《영점프》에 2003년 5월부터 연재된 단편. 이후 단편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길찾기, 2004)에 재수록되었다.
2『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2007, 68면.

 

* 《쿨투라》 2021년 2월호(통권 8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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