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Theme] 때로는 투박한 그 시절의 노래들이 그립다
[4월 Theme] 때로는 투박한 그 시절의 노래들이 그립다
  • 오광수(시인·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21.04.0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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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영화 〈박하사탕〉 스틸컷

  청량리 시계탑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봤다면 대성리나 춘천 쪽으로 MT를 가 보았을 것이다. 주말이면 통기타와 배낭, 또 큼지막한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든 청춘들이 시계탑 아래를 메웠다. 청량리를 출발하여 춘천으로 가는 비둘기호 열차는 좌석은 물론 입석까지 가득 메워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MT를 떠나는 설렘으로 가득한 대학 신입생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몇몇은 벌써 소주잔을 건네고, 또 누군가는 기타 줄을 고르며 그날 저녁 펼쳐질 결전(?)을 준비했다.

조금은 지쳐 있었나봐 쫓기는 듯한 내 생활
아무 계획도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어보며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행
지난 일이 생각나 차라리 혼자도 좋겠네
춘천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 김현철 <춘천 가는 기차>

〈응답하라1994〉 공식 홈페이지

  그 기차는 90년대 김현철이 세련되게 노래한 춘천행 기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80년대에 그 기차에 올라탔던 청춘들은 춘천에 도착하기 전에 대성리역에서 대부분 내렸다. 주말 아침 대성리역은 학교와 학과 혹은 동아리 이름이 적힌 깃발을 들고 행렬을 이루어 숙소로 가는 대학생들로 넘쳐났다.

  대성리는 지금도 MT를 전문으로 하는 각종 숙박시설과 유흥시설이 몰려있지만 8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강변을 따라 늘어선 민박촌이 전부였다. 강변을 앞에 두고 너른 마당을 가진 허름한 농가 주택이 MT를 위한 장소였다. 방이 여러 개일 리도 없다. 그저널찍한 안방과 조그마한 사랑방 정도가 전부였다. 사랑방은 대개 지도교수한테 배정됐고, 남학생이든여학생이든 구분 없이 안방이 숙소였다. 어차피 바람직한 대학 생활을 위한 토론을 한다든가 지도교수의 일장연설이 준비된 모임이 아니었다.

  짐을 풀고 나면 마당에서 족구와 피구시합으로 몸을 풀고, 한쪽에서는 몇몇 술꾼들이 소주나 막걸리로 목을 축이기 시작한다. 시합이 끝나면 어스름 저녁까지 식사를 준비한다. 그때만 해도 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는 건 사치였다. 그저 돼지고기 몇 점 들어간 김치찌개만 끓여도 진수성찬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하나둘씩 마당으로 모여든다. MT의 하이라이트인 캠프파이어를 위해서다. 캠프파이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다. 기타 연주에 맞춰 개인의 노래 솜씨를 뽐내다가 이내 싱어롱으로 넘어가는 것이 순서다. 서로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자기 순서가 오면 으레 노래를 못한다면서 뒤로 빼는 친구들이 꼭 있었다. 그런 친구들을 향해 노래를 독촉하면서 부르던 노래도 있었다.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 아, 미운 사람/ 노래를 못하면 시집을 못가요. 아, 미운 사람”

  “노래야 나오너라. 쿵다리 쿵닥/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다리 쿵닥.”

  이렇게 조금씩 분위기가 고조되면 싱어롱이 시작된다. 시대마다 떼창을 하는 노래들이 달라졌지만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노래가 있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도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은
더욱 아름다워라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모닥불은 타오르고 통기타 소리가 높아지면 모두가 다 아는 노래들이 주로 단골 레퍼토리가 된다. 〈연가〉는 태평양의 섬나라 뉴질랜드의 전통 민요를 개사한 노래였다. 김세환을 비롯하여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자주 불렀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

  박인희가 불렀던 〈모닥불〉은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곡이었다. 세대가 바뀌어도 MT는 계속되기 마련이다. 다만 시대에 따라서 같이 떼창하는 노래가 달라질 뿐이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잡으러’(〈고래사냥〉, 송창식)를 소리높여 부르기도 하고,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를 목이 터져라 부르기도 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서른 즈음에〉, 김광석)를 부르며 감상에 빠지기도 하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광화문 연가〉, 이문세)을 멋지게 불러젖히기도 했다. 김현식의 〈골목길〉을 부르다가 산울림의 〈청춘〉으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술과 노래로 이어지는 MT의 끝에는 때로 싸움이 기다리기도 한다.

  서로 마음에 품어두었던 불만들이 터져 나오면서 끝내 주먹다짐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와 더불어 MT는 삼각스캔들이나 사랑이 싹트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도 했다. MT를 다녀온 뒤에 캠퍼스 커플로 발전하는 남녀들이 꽤 많았다.

  MT가 늘 소모적인 야유회나 캠핑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80년대에는 MT가 비밀결사 모임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래서 정보과 형사들이 대성리 등으로 은밀하게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들의 동태 감시를 위해 출장 나오기도 했다. 이런 모임의 경우에는 술 마시고 노래하는 분위기보다는 학생운동의 방향성을 놓고 벌이는 밤샘토론이 많았다. 그리고 학생운동 현장이나 노동운동 현장에서 많이 부르던 노래들을 묵직하게 불렀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사계〉, 노래를 찾는 사람들)나 ‘긴 밤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아침 이슬〉, 김민기)도 그 시절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요즘은 캠핑이 세련된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MT라는 이름으로 치러졌던 저 70년대와 80년대의 캠핑 혹은 야유회는 허름했지만 낭만이있었다. 가끔은 투박한 것들이 더 그립고 아름답다.

 

오광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저서로는 시집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시해설집 『시는 아름답다』, 대중문화에세이집 『낭만광대전성시대』 등이 있다. 현재 대중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 《쿨투라》 2021년 4월호(통권 8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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